12. 진리眞理와 무리無理, 그리고 일리一理
조삼모사식 커뮤니케이션을 알게 됐다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란 말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과 무리를 말하는 사람의 특징
성경은 ‘진리의 말이다’라는 생각으로 전개되는 책이다. 그러니 사람이 생기기 이전에,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 이전에 진리의 말이 있고, 그게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시피 ‘발신자’와 ‘말’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수신자’와 ‘의미심장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예수는 여러 설교에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 눅 8:8 등등)”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진리의 말은 ‘발신자’와 ‘말’ 자체를 중시한다.
이와 반대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은 아예 ‘소통이 제대로 될 수 없다’고 낙담한 나머지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며 심지어 자신의 생각도 믿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니 소통을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게 된다.
▲ 진리의 말은 '발신자'와 '말'이 수신자와 상관없이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다.
일리의 커뮤니케이션은
진리眞理의 커뮤니케이션이든, 무리無理의 커뮤니케이션이든 제대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다. 너무도 확고하게 자신의 생각을 믿은 나머지 나의 생각만을 몰아붙여 강제하려 하기도, 모든 것을 의심한 나머지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조삼모사식의 커뮤니케이션’이라 할 수 있고, 그걸 김영민 선생은 ‘일리一理의 해석학(커뮤니케이션)’이라 표현했다.
비유하자면, 진리를 구심에 두는 인식중심주의가 과거중심주의라고 한다면, 무리에 가까운 방산放散에 희열을 느끼는 태도는 인간됨의 한계와 조건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미래중심주의다. 이와 대조적으로 내가 말하는 일리의 해석학이란 이론과 현실의 간극을 최소화하면서 삶과 세상의 모습에 적실한 해석과 글쓰기의 감성을 되찾자는 현재중심주의인 셈이다. 과거의 구심력도 우리의 삶에 간섭하고, 미래의 원심력도 우리를 이끄는 비전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앎의 근원적 권리 원천인 역사적 현재-물론 시간 의식의 고전적 분석이 말해주듯이 현재란 과거의 파지retention와 미래의 예지pretention가 동시에 벌어지는 경계이지만—와 그 터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토불이文土不二와 학행일치學行一致란 삶과 앎 사이의 자연스러운 조건이지 특정한 이념을 위한 슬로건이 아니다. 상대주의에 대한 과도한 염려는 삶의 구체적 현장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 염려의 실체는 인식중심주의의 근대를 거친 지식인 문화의 성마른 논리와 강박 속에 있다. 진리라는 정형의 아름다움도, 무리라는 방종의 자유로움도 우리 삶의 터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우리 삶의 탄력 있는 자생력이 이 두 극단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리란 앎의 조건이자 한계인 삶의 모습에 대한 이해와 구체적으로 공조하려는 학문적 결기며 감수성이다.
『진리 일리 무리』, 김영민 저, 철학과 현실사, 1998년, 172-173쪽
시간도 공간도 비껴 앉은 이름 없는 진리는 바람 맞고 땅을 걸어가면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소용없는 장식일 뿐이다. 진리, 특히 인문학에 있어서의 진리란 인간됨의 조건이나 한계와 상관없이 어느 보석 상자 속에 깨끗하게 보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의 객관적이며 순전무잡한 진리 개념은 대개의 경우 사태의 진상이라기보다는 ‘규제 이념’이라는 명분의 심리적 이상理想에 불과했다. 이 이상의 빛 아래에서 내려다보이는 잡된 삶의 현실은 대체로 애매하거나 피상적이거나 사소하거나 불온하거나 자의적이거나 비학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삶의 실제와 상관없는 진리 개념은 지식인들의 강박으로 군림하게 되고, 이 강박은 지적 허위의식으로까지 부풀었다. 그러니 하나의 참된 이치眞理가 아니면 그것은 당연히 아예 이치에 닿지 않는 것無理이며, 필연이 아니면 우연일 뿐이고, 변치 않는 본질이 아니면 봄눈같이 사그라질 현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일리의 해석학은 이 이분二分을 가로질러가는 제3의 길을 택한다. 그것은 누구나 우러러보아야 할 참은 아니지만 동시에 거짓으로 전락하지 않는 ‘성실’을 말하려고 하고, 진리가 아니되 무리로 흩어지지 않는 ‘일리’를 말하려 하며, 필연이 아니되 우연으로 흩어져버리지 않는 패턴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
일리의 해석학은 이성을 인식의 토대나 특권적 입지로 삼지 않는다. 앎의 과정 속에 조건, 혹은 한계로서 참여하는 ‘인간 됨(being-human)’ 중에서 이성이란 단지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됨이란 인간의 조건과 한계가 주변의 다양한 컨텍스트와 만나면서 자신을 보존하고 개발하며 진화시켜나가는 과정이다. 달리 말하자면 다종다양한 텍스트와 만나는 과정에서 인간이라는 현상이 자기 스스로를 적응시켜나가는 모습을 가리킨다. 이 모습과 과정은 당연히 패턴화된다. 삶의 전 영역에서 나름의 길(패턴)을 확보하지 못하는 유기체는 도태되기 때문이다
『진리, 일리, 무리』, 김영민 저, 철학과 현실사, 1998년, 182~183쪽
▲ 진리의 말이든, 무리의 말이든 소통을 단절한다는 부분에선 크게 차이가 없다.
일리의 커뮤니케이션은 애매모호한 단어를 쓰며, 알 듯 모를 듯한 표현을 쓰는 사람들의 대화를 그려내며 패턴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학문이 규정짓기 전부터, 제도가 옥죄기 전부터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무런 불편함 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진리는 아니되 무리로 흩어지지 않는’ 일상의 모습을 담아내려 하는 것이다.
이번 후기에선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지 살펴봤다. 다음 후기에선 우린 왜 애매모호한 단어를 쓰고, 알 듯 모를 듯한 표현을 쓰며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지금까지 흔히 알고 있던 ‘나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소통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 커뮤니케이션으로 시작된 강의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내용을 와르르 무너뜨리며 새로운 앎의 지경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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