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후회하지 않기 위해 빗길 자전거 여행을 떠나다
▲ 양평 → 올림픽공원 세계평화의 문 / 35.27km
쥐 죽은 듯 조용히 잠만 잤다. 오늘은 자전거 여행을 마무리 짓는 역사적인 날이지만, 어제 저녁의 일로 기쁨보단 깊은 어색한 침묵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새벽 5시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면서 가장 먼저 날씨가 어떤지가 궁금했다. 아침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벌써 내리고 있는지, 라이딩 도중에 올 것인지, 그도 아니면 모두 끝난 다음에 올 것인지 그 순간만큼은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마지막 라이딩을 준비하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확인해 보니, 날씨가 잔뜩 찌푸려 있기만 할 뿐 아직 비는 내리지 않더라. 그러니 ‘서둘러 출발한다면, 비가 내리기 전에 도착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껏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깨우니 비몽사몽하긴 해도 늦장을 피우진 않았다. 보통 땐 잘 일어나지 못하고, 여러 번 깨워야 할 정도였으니, 색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오늘은 집에 가는 날이어서 일찍 서두른 만큼 일찍 도착할 것을 알기에 그런 걸 테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2012년과 2014년에 부산국제영화제를 보러 갔을 때도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그땐 표를 현장예매하기 위해 4시 30분에 일어나야 했는데, 잠이 쏟아질 시간임에도 깨우자마자 바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미 유명산 여행기 때 정해진 시간을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려 있다는 것을 얘기했었는데, 이 날 아침의 상황을 통해서도 그건 재확인할 수 있었다.
▲ 우리가 묵었던 2층 방. 9시간을 머물다가 간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비를 내리고, 나는 인간스럽게 못마땅하고
아이들은 일어나긴 했어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낯선 천장’이란 느낌이 감돌며 꿈인지 생시인지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거다. 분명히 7일 동안 계속된 여행으로 이젠 집이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게 익숙해질 만도 한데도, 익숙해졌다 싶을 때 다시 ‘여긴 어디? 나는 누구?’와 같은 혼란은 찾아온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아이들에게 “아직 비가 오고 있진 않거든. 좀만 서둘러 출발하면 어쩌면 비 오기 전에 도착할지도 몰라”라고 현실을 직시시켜줬다. 그제야 아이들은 정신을 차리고 아침으로 먹기 위해 사온 컵라면과 남은 통닭을 먹으며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더라.
하지만 내가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내 말이 기우제의 축문이라도 된 듯하다. 빗길 여행을 좋아하긴 하지만, 솔직히 이럴 때 내리는 비는 야속하기만 하다. 더욱이 오늘은 오전 9시면 목적지에 도착해서 자전거 여행이 끝나기에 조금 늦게 내려도 될 텐데, 꼭 보란 듯이 출발하려 준비할 때부터 내리니 말이다.
이럴 때 보면 꼭 자연은 ‘심술쟁이’ 같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이런 감상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감상일 뿐이다.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생각대로 움직인 적은 한 번도 없는데도, 인간적인 감상을 붙여 ‘인간을 위한 자연’을 만들려 무던히 애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다)’이란 표현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된 이상, 계속 파고들며 나쁘게 생각하기보다 좋게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비 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자전거 여행 중 빗길을 달려볼 기회는 없었는데 이제야 달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가장 멀리 달리는 날이나 이화령을 넘어야 하는 날이 아닌 가장 짧게 달리는 날에 비가 온다는 것이다.
▲ 어제의 사진. 지금껏 운 좋게도 날씨가 엄청 맑고 좋기만 했다.
달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정말 이대로 올림픽공원까지 갈 것인지, 비가 좀 잦아든 후에 출발할 것인지, 양평역까지 가서 전철을 타고 갈 것인지 고민이 되더라.
예전 같았으면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획에 따라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었기에, 당연히 그대로 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엔 ‘계획과 상황 사이’에 대해, ‘줏대 있음과 융통성 사이’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계획과 줏대 있음만 내세울 경우 ‘너무 뻣뻣하고 고지식하다’는 평을 듣게 되며, 상황에 따른 융통성만 내세울 경우 ‘원칙이 없다’는 평을 듣게 된다. 당연히 나의 경우는 전자의 평을 자주 듣는데, 아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런 부분들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든 후자에 방점을 찍고 행동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고민 때리고 있다.
그런 기본적인 생각의 변화와 함께 ‘비 오는 날에 자전거 여행도 괜찮을까?’하는 부분이 걱정이 됐다. 가장 중요한 건 안전문제인데, 이 부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사고 없이 잘 왔다가 내가 고집을 부려 빗길에 달리다가 사고가 나면, 지금까지 잘 해온 것이 한 순간에 도루묵이 된다. 나 혼자 달리는 거라면 판단하기 쉽지만, 함께 달리는 것이다 보니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갈등을 하고 있는 나를 본 것인지, 그 때 민석이가 “비도 많이 오는데, 올림픽 공원까지 굳이 가지 말고 양평역까지 가서 마무리 짓고 전철 타고 집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라고 제안하더라. 민석이는 안전문제나 몸이 비에 젖는 것보다는 자전거가 비에 맞아 녹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 제안은 솔깃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감행하다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사고가 나서 하게 될 후회보다 이대로 끝내면 하게 될 후회가 더 크다고 생각했기에 원래의 계획대로 하기로 했다.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마지막을 흐지부지 마무리 지으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기 때문이다. 2011년에 ‘사람여행’을 했을 때가 그랬다. 마지막 날에 익산에서 전주로 걸어가는데 그 때 하필 바람도 세차게 불고 비도 많이 오는 날이었다. 원래 계획은 호남제일문까지 걸어가서 거기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것이었는데, 바람이 거세 중심을 잡기 힘든 데다 한 달의 여행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백구면에 집 앞까지 가는 버스(흑석골행 버스)가 눈에 보여서 10초 고민 후에 그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신나게 걸어 다녔던 여행은 한순간의 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어설프게 끝나버렸다. 그런데 웃기게도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니 비도 그치고 날씨도 확 풀리더라. ‘분명히 내가 원해서 여행을 떠난 것인데, 왜 마지막 날 이렇게 일찍 집에 들어오지 못해 안달했던 것일까?’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 호남제일문까지 걸어오려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내가 선택했지만 말이다.
둘째, 올림픽 공원에 ‘깜짝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기에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지금껏 단재학교 영화팀은 지리산 종주, 남한강 도보여행과 같은 도전적인 여행을 줄곧 해왔지만 우리끼리 만족하며 축하해주는 선에서 마무리했을 뿐 부모님의 축하를 받아본 적은 없다. 그런데 이번엔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계획을 짜게 되면서 부모님의 축하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팀 아이들은 부모님이 그곳에 나올지 모르기에, 그 순간이야말로 세상의 둘도 없는 최고의 선물이 될 거라 생각했다.
▲ 도착하는 곳에 깜짝 놀랄 만한 최고의 선물이 있었기에 전해주고 싶었다.
완벽히 채비를 갖추고 길을 나서다
그래서 민석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원래의 계획대로 하기로 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내 마음을 구석구석 알 수 없기 때문에, 따지거나 불평하거나 아예 거부할 수도 있는데 그러진 않더라. 6일간 함께 여행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별 말하지 않고 내 결정에 따라주는 아이들이 대견하고도 감사했다.
출발 준비를 끝내고 자전거가 놓인 하우스에 모이니, 6시 30분이 되었고 그곳엔 펜션 아저씨도 나와 있었다. 어제 8시가 넘어 펜션에 도착하여 아침 6시 30분에 나가는 손님이니 매우 특이하면서도 반가운 손님이라 할 만하다. 아저씨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어떻게 가려고 그러세요?”라고 말을 하시며 얼굴엔 걱정이 한 가득이다. 그래도 이미 맘을 굳혔기 때문에 크게 동요하진 않았다. 아저씨는 방수커버를 씌운 가방이 불안해 보였던지, 큰 비닐봉투를 가져다주시며 “가방을 이 비닐로 꽁꽁 묶으면 비는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라고 하신다. 그래서 우린 배낭까지 비닐로 감싸며 완벽하게 채비를 마쳤다.
▲ 주인 아저씨가 큰 비닐을 줘서 가방을 꽁꽁 싸맬 수 있었다. 출발 준비는 끝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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