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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3. 이중섭미술관엔 이중섭이 살아있다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3. 이중섭미술관엔 이중섭이 살아있다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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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중섭미술관엔 이중섭이 살아있다

 

 

그의 작품 중 춘화라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은지화는 꼭 봐야만 하는 작품이다.

 

 

'몰고기와 아이들' 작은 은지에 그린 그림이기에, 자세히 봐야만 보인다.  

 

 

 

은지에 새겨진 가족애

 

우선 재료가 독특하다는 점이다. 담배를 감싸고 있던 은지를 날카로운 도구로 긁어 그림을 그렸으니 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해방부터 한국전쟁까지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미술도구를 다 갖추고 창작활동을 할 수 없던 열악한 시대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스케치를 할 수 있는 도화지도 없고, 색칠을 할 수 있는 물감도 없다. 이런 상황에선 웬만한 창작열이 있지 않다면 대부분 창작활동은 포기하고 다른 생업을 찾아 전전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접지 않았다. 그러니 늘 피던 담뱃갑에 있던 은지를 도화지 삼아 자신의 이상향을 새겨 넣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마치 다산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500여권의 책을 저술한 상황과 쇠귀선생이 편지지나 변변한 필기도구조차 주지 않는 비협조적인 영어囹圄의 생활 중에 재생휴지에라도 빼곡히 글(이 귀중한 글이 모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이 되었다)을 써서 외부로 전했던 상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제반 여건이 미비하다 하여, 상황이 급박하다 하여 꺾을 수 없다. 세 사람 모두 상황은 여의치 않고 도구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뜻을 맘껏 펼쳤다는 부분에선 동일하다.

 

 

이중섭과 팔레트. 그의 팔레트는 남덕에게 주고 왔던 건데, 그걸 2012년에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 다음은 은지에 그려진 작품들이 매우 개성 넘친다는 점이다. 인체의 비율이나 근육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마구 엉클어뜨렸다. 그래서 고개는 늘 뒤쪽으로 돌려져 있고 몸은 매우 기하학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마치 입체파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달까. 그런 상황에서 몸과 몸은 서로 맞닿아 있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아마 이런 낯선 느낌 때문이었을까?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그러면서도 사람의 온기가 한가득한 느껴지기에 1950년대 전문가들은 이 작품들을 춘화라 주홍글씨를 새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울음을 잃어버려 생각이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이들의 감상평일 뿐이다. 그런 색안경 없이 이 작품을 들여다보면 포옹’, ‘가족과 같은 작품명처럼 따스하고 포근한 사람의 온기를 맘껏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이중섭에게 가족은 맘껏 껴안을 수 있고, 맘껏 온기를 나눠줄 수 있는 따스한 존재였던 거다. 그래서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한 폭의 은지에 과감하게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포옹'과 '가족', 이런 그림을 보고 춘화를 상상했다니, 그 상상력의 궁핍함이 놀랍기까지 하다.  

   

 

애틋한 그리움이 한껏 담긴 편지들

 

마지막으로 눈길을 끌었던 것 역시 그가 사랑하는 아내 남덕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의 편지는 나의 최고 최대 최미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최애의 사람, 오직 하나인 현처 남덕군이라고 시작하거나 나만의 소중한 감격, 나만의 아스파라가스군(남덕의 애칭, 아스파라가스는 발가락모양을 닮았기에 아내를 발가락군이란 애칭으로 부름)은 아고리(중섭의 애칭. ‘아고는 턱의 일본어이니, 이 말을 풀면 Lee’라는 뜻이 됨. 아내에겐 발가락이란 애칭을, 남편에겐 이란 애칭을 붙여준 것임)를 잊지나 않았는지요?”라고 시작한다. 자신의 절절한 감정을 아내에게 표현하기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20살 초반부터 사귀었고 결혼한지도 10년이 넘어 소위 이젠 부부가 아닌 남매로 느껴질 법도 한데도, 이처럼 애틋하고 절절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부럽고 놀랍기까지 하다.

 

 

빼곡히 쓴 글과 함께 곳곳에 있는 그림이 눈에 띈다. 이 편지도 또 하나의 이중섭표 예술품이다.  

 

 

그의 편지 곳곳엔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다. 편지의 내용을 읽기 전에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유쾌하다. 그의 편지는 그림과 글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 글은 그림의 의미를, 그림은 글의 의미를 보태주고 확장시켜 준다. 그러니 이중섭의 편지도 하나의 작품이라 보아도 될 정도다. 그 중에 백미는 남덕의 건강을 염려하며 아스파라가스군이 춥지 않도록 두텁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아고리가 화 낼 거요. () 화내면 무서워요.”라는 씌어 있는 편지다. 요즘에도 누군가 애칭으로 상대방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닭살이 돋는다며 눈빛 레이저를 사정없이 쏘아댈 텐데, 이들은 70년 전부터 애칭문화의 창달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쯤 되면 ()한국애칭활성화협회에서 명예 회장직이라도 줘야할 판이다.

 

 

화를 내고 있는 이중섭. 박명수가 생각나는 앙증 맞은 느낌의 그림이다. 

 

 

더욱이 그 글 밑에 박명수가 우씨하는 듯한 포즈로 이중섭이 화를 내는 그림이 작게 그려져 있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요샛말로 혼모노, 레알 진성사랑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우씨의 저작권이 박명수가 아닌 이중섭에게 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요즘에 하도 TV 속 연예인들이 사랑꾼임을 과시하기 위해 거창하고 번드르르한 이벤트만 주구장창하여 왜 이렇게 남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과시하려 하는 걸까?’라고 살짝 심기가 불편해지곤 한다. 그런데 이중섭의 편지는 소박하면서도 정감이 어리고, 투박하면서도 진실하기에 그들의 사랑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게 된다. 맞다, 사랑이란 감정은 저런 단순한 그림만으로도, 몇 줄 되지 않지만 또박또박 써 내려간 편지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게 진심이라면 이미 그걸로 충분하고 그것 자체로 서로에겐 최고의 선물이 된다. 이런 생각이 드니 나도 모처럼 만에 손 편지를 쓰고 싶어지더라.

이중섭 미술관엔 이중섭이 살아 있었고, 나에게 사랑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간절함이란 무엇인지?’, ‘힘듦 속에서 꽃 피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하나하나 상세히 알려줬다. 이번 제주여행에서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정말 많이 섭섭하고 아쉬울 뻔했다. 그런 마음으로 이중섭 미술관을 나오니 제주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지만, 가슴 속엔 훈풍이 불었다.

 

 

이곳에서 이중섭을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얘길 들을 수 있어서 더욱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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