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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2. 이중섭미술관은 한바탕 울만한 곳이다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제주도 자전거 일주기 - 12. 이중섭미술관은 한바탕 울만한 곳이다

건방진방랑자 2019. 10. 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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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중섭미술관은 한바탕 울만한 곳이다

 

 

이중섭 미술관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에선 이중섭의 연대기 및 주요 은지화 작품들, 그가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들, 그리고 아내에게 주고 온 팔렛트가 전시되어 있고 2층엔 그의 대표작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3층은 전망대로 제주의 남해를 시원하게 내다볼 수 있다.

 

 

3층 전망대에선 제주의 남해가 시원하게 보인다.    

 

 

 

극도의 외로움과 가족애가 만든 이중섭의 작품세계

 

그는 21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문화학원에 다니며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그 학교에 후배로 있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사귀게 된다. 그 후 28살에 원산으로 입항하며 한국에 정착하게 되고, 30살이 되던 해에 그녀와 결혼하며 그녀에게 이남덕이란 한국식 이름을 지어준다. 그때는 19455월로 해방되기 불과 3개월 전의 일이었다.

서울과 평양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전쟁의 혼란 속에 그는 아내와 두 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제주로 건너와 511월부터 12월까지 단칸방에 머물게 된다. 네 식구가 함께 살았던 방은 몸을 누이면 서로의 체온이 곧바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매우 좁은 방이었다. 그의 은지화銀紙畵에 담겨진 뒤엉킴의 심상들은 바로 이런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상황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네 식구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머물 수밖에 없던 방. 이곳에서 은지화의 심상이 만들어졌다.  

 

 

아내와 두 아들은 그 다음 해(52)에 일본으로 가게 되고 이중섭은 한국에 남아 은지화를 착안하게 된다. 가족과 떨어지긴 싫었지만 한국의 상황이 너무나 어수선하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때라 어쩔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생긴 처절한 외로움과 현실의 무력감을 작품을 만드는 일로 해소해야만 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중섭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휴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아 있던 때에 지인들의 도움으로 미도파 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은지에 그려진 그림이 춘화라는 오해를 받으며 그의 작품은 강제철거 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요즘도 종종 예술작품에 예술이냐? 외설이냐?’는 논쟁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 당시엔 그게 논쟁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작품을 철거하고 아무렇지 않게 낙인까지 찍었나 보다. 그만큼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일방적이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그 사건으로 이중섭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마음의 병을 얻게 되어 시름시름 앓게 된다.

 

 

이중섭의 생애는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품은 생애이고 예술가의 비애가 스민 생애다. 

 

 

그러다 결국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41살의 나이로 극도의 고립감과 절망감 속에 사랑하는 가족은 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만다. 그가 죽기 바로 전 해에 쓴 편지의 상단부엔 길 떠나는 가족이란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하단부엔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그림을 그렸다.”라는 내용이 씌어 있다. 이중섭의 일대기를 알고 이 편지를 읽으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무언가 올라오며 마음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그는 몸이 약해져 가는 그 순간까지도 가족과 함께 따뜻한 남쪽 나라에 가서 행복하게 살길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은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하고 바스러졌다.

 

 

아들들에게 보낸 아빠의 마음. 그림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바탕 울어재낄 만한 곳

 

1층엔 이중섭과 남덕이 가슴 절절하게 나눈 사랑의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기러기 가족 같은 느낌인데 기러기 가족과 다른 점은 그들이야 자신들이 원해서 뿔뿔이 흩어진 반면,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절절해서 어느 편지 하나 마음을 울리지 않는 게 없었다. 저토록 그리워하고 저토록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이 절로 와 닿는다.

 

 

사랑하는 아내 남덕과 두 아들들. 이런 사진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더 가족이 그리웠을까? 

 

 

그들의 그런 절절함이 나에게도 울림이 됐던 걸까?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고, 그렇게 그 자리에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요 근래 맘껏 울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억지로 눈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기에, 이 기회를 빌려 맘껏 울어재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뭔가 꽉 막힌 게 뚫릴 것만 같은 시원함이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그러질 못했다. 그 순간 눈물을 꾹 참으며 여긴 사람이 많잖아. 미술관을 나가서 맘껏 울자라고 감정을 추슬렀다. 그런데 문제는 눈물이 눈에 맺히던 순간이 지나고 나니 다시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로 결론은 눈물 나올 때 그게 어떤 상황이든 실컷 울고 보자라는 거다.

 

 

그의 연대기를 쭉 보고 조금 걸어가면 이 편지가 나온다. 이 편지를 읽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이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난 울 줄 아는 그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게 억울해서든, 행복해서든, 그리워서든, 미워서든 할 것 없이 팔팔 끓는 감정이 있고 그게 눈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연암은 호곡장好哭場이란 글에서 울음은 칠정七情이 절정에 다다르면 나오는 것이라 말했다. 그래서 가슴 속에 답답한 것을 풀어버림은 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거니와, 울음은 천지에 있어서 우레와 천둥과 같다고 할 수 있지.”라고 말하며 맘껏 울어재낄 수 있는 그 정신을 높게 샀다. 연암의 이 말에 나도 동감한다. 그러니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운다느니, ‘눈물이 많아선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은 집어치우고, 얼마든지 감정의 결에 따라 맘껏 울어재낄 수 있으면 그뿐이다.

도올 선생은 대인은 반드시 유머가 있다(맹자 사람의 길 465)”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을 본떠 진정한 어른은 반드시 울 줄 안다라고 말하고 싶다. 울음은 권위로 짓누르고 나이로 짓밟는 무표정한 꼰대가 되지 않도록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중섭 미술관에서 울컥 쏟아지려했던 눈물을 귀히 여기고 그때 맘껏 울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그의 마음이 그대로 나에게 전해져 온다. 애닳고 서글프고 간절한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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