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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서장 - 슈바이처와 도마복음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서장 - 슈바이처와 도마복음

건방진방랑자 2023. 3. 16.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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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바이처와 도마복음

그대들은 내가 꿈꾸는 사람이라 말하겠지

 

 

슈바이처를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의사로서만 알고 있지만, 그는 의사가 되기 전에 이미 세계적인 신학자로서 명성을 휘날린 사람이었다. 그의 명저 역사적 예수의 탐구는 서구신학사의 진보적 흐름을 총망라하여 일별하고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의를 종결지었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본인이 종말론적 의식 속에서 산 사람이었고, 또 그러한 신념에 따라 소신껏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분석한다. 종말론에 관한 한 그는 불트만의 선구였다.

 

 

브레데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가 결코 메시아라는 의식을 가진 인물일 수가 없다는 것을 메시아비밀(the Messianic Secret)’ 이라는 절묘한 마가복음서 기술상의 개념을 활용하여 입증한 셈이다. 따라서 복음서는 초기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는 종교사적 변천의 고리들일 뿐, 예수의 생애에 관한 객관적 역사를 구성하는 자료일 수 없다. 이러한 브레데의 관점에 반기를 든 신학자가 바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였다. 그를 일약 세기적 신학의 대가로 만든 획기적 저작 역사적 예수의 탐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1910년 영역)의 독일어 원판 제목이 라이마루스로부터 브레데까지(Von Reimarus zu Wrede)(1906)라는 사실에서도, 그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가 브레데의 연구와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슈바이처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예수를 역사적 사건으로 리얼하게 파악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생애에 관한 어떤 신화적ㆍ초자연적ㆍ이적적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인간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서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자기 실존과 주변의 인간들의 문제를 고심하면서 대면했을까? 슈바이처의 접근은 매우 심리분석적이다. 그리고 복음서의 자료를 역사적 예수의 리얼리티의 단서로서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브레데가 마가의 분석에 집중한 반면, 슈바이처는 마가자료를 뛰어넘어 마태자료의 역사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슈바이처는 역사로서의 예수도그마로서의 그리스도가 결국 하나의 인격체로서 통합되어야만 초기기독교 역사가 바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초기기독교공동체가 종말론적 믿음을 가지게 된 연유에는 궁극적으로 그 뿌리가 예수의 생애 그 자체에 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의 생애에서 메시아됨을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생애(Life of Jesus)로부터, 특히 수난의 내러티브로부터, 메시아성(the Messiahship)을 제거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리고 그 제거된 생애로부터 초기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더욱 어렵다.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343).

 

 

예수의 생애에서 메시아를 제거하면 초기공동체 신학과의 연계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활이라는 사건은 어떻게 뒤늦게 갑자기 튀어나왔으며, 또 어떻게 부활이 예수의 메시아성을 돌연히 확보하는가?

 

 

부활한 예수가 지상에 나타났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어떻게 예수의 메시아됨과 그들의 종말론의 근거를 확보할 수 있는가? 브레데는 이러한 것들을 설명치 못하고 있다. 그래서 브레데는 오히려 부활의 사건역사적기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실상 이 따위 기적은 초자연적 사건보다도 더 믿기 어려운 것이다. (p.343).

 

 

예수의 메시아됨의 종말론적 의미(the Messianic eschatological significance)는 오직 초기공동체 사람들의 심리적인 부활체험(resurrection experience)’일 수밖에 없으며, 그 체험은 역사적 예수의 삶의 메시아적ㆍ종말론적 측면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궁극적으로 예수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부활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예수는 천국을 지상 위에 선포했다. 이 선포는 이미 세례요한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씨는 이미 뿌려졌다. 그렇다면 씨는 반드시 싹을 틔우고 결실의 수확을 기다린다. 따라서 예수는 그의 생애에서 이미 그 수확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견고히 믿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안토니지성소 전경, 오른쪽 벽면에 안토니와 폴의 성화가 그려져 있다. 너무도 성스러운 느낌이 드는 아름답고 깔끔한 곳이었다.

 

 

수확은 종말이다. 추수 때 천국은 온다. 종말은 반드시 선택된 소수의 선민의식이나 예정론과 결부되어 있다. 기독교 전체역사가 파루시아(천국의 도래)의 지연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예수의 삶의 역사 가운데서도 역시 파루시아의 지연은 불가피했다. 예수의 생애는 두 단계로 나뉜다. 전기는 군중에 휩싸인 단계이고 후기는 소수의 12제자들만 데리고 다니는 단계이다. 군중이 그를 버린 것이다. 메시아비밀은 점차 후퇴해 버린다. 그는 죽음을 예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의 종말론적 사유는 물론 유대교적 종말론전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여타 유대교적 종말론이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는 데 반하여, 예수의 종말론은 현실적 인간의 회개를 요구하는 윤리적 심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다니엘묵시록이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종교탄압과 관련 있고, 솔로몬시편은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단의 출현과 예루살렘의 내분과 관련이 있고, 에스라4서와 바룩묵시록은 예루살렘성전 멸망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종말론은 시대적 탄압의 결과가 아니다. 예수가 산 시대를 일별해보면 결코 종말론적 열망을 불지를 수 있는 어떤 결정적 사건을 발견하기 힘들다. 예수의 종말의식은 종말론적 시대분위기의 소산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예수가 그러한 종말론적 분위기를 창출해내었던 것이다. 예수는 그가 산 시대를 그의 종말론적 신념으로 휘몰아가려고 했던 자이언트였다. 과연 역사는 예수의 신념대로 움직였을까?

 

예수의 주변으로 침묵이 감돌았다. 갑자기 요단강에서 요한이 나타났다. 그리고 외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 이어 예수가 등장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 속에서 이 세계의 굴레를 자기의 신념에 따라 굴리려 한다. 그 마지막 굴림이 모든 진부한 역사의 시간들을 종료로 이끌어 가리라는 확고한 신념에 따라. 그러나 역사는 굴러가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예수는 자기자신을 그 거대한 굴레 위로 던져버린다. 그러자 역사는 구르기 시작한다. 그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면서. 종말론적 조건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조건 그 자체를 분쇄시켜버린 것이다. 그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직도 굴러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인간의 찢겨진 몸뚱아리가 아직도 그 수레 위에 걸려있다. 그 자신을 인류의 영적 지도자로서 확신했고 또 그의 의도대로 인류역사의 물길을 틔울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인했던 거인이 아직도 그 수레 위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 인간의 승리였고 하늘나라의 지배였다.”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368~9).

 

예수는 동키호테였을까? 자신의 최면에 희생당한 미치광이였을까? 여기 나 도올은 존 레논의 노랫말 한 구절만 적고 싶다: “그대들은 내가 꿈꾸는 사람이라 말하겠지, 그러나 이 꿈은 나 혼자 꾸는 것이 아니지. 언젠가 그대들도 내가 꾸는 꿈을 같이 꾸게 될 거야. 그러면 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one.”

 

슈바이처는 그가 발견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신학자로서의 명성을 뒤로 하고 의과대학에 학부학생으로 진학한다. 그리고 의사면허를 획득한 후, 간호사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났다.

 

 

 인류 최초의 기독교 수행자 폴. 빵 반쪽을 물고 오는 까마귀와 무덤을 판 사자 두마리가 인상적이다.

안토니가 폴을 찾아갔을 때 까마귀가 온전한 빵 한 개를 물고 온 이야기는 제52편에 실린 성화로 설명되었다. 두 사람이 빵을 다 먹고 났을 때, 폴이 말하였다. “이제 죽음의 때가 온 것 같소. 주님께서 나의 이 빈약한 몸뚱아리를 흙으로 덮으라고 당신을 보내신 것 같소. 당신의 수행처로 돌아가 아타나시우스가 당신에게 준 겉옷을 가져와서 나의 몸뚱아리를 감아주었으면 하오.” 안토니는 침묵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폴의 눈과 손에 작별의 키스를 하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 폴은 무릎꿇고 기도하는 모습 그대로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AD 343, 향년 113, 몸을 아타나시우스의 겉옷으로 싼 후 묻으려 했으나 삽이 없어 시신을 묻을 수 있는 구덩이를 팔 길이 없었다. 이때 사막으로부터 두 사자가 나타나 발톱으로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정도의 구덩이를 파놓고 사라졌다. 안토니는 폴의 시신을 곱게 묻었다. 나 도올이 지금 경의를 표하고 있는 사람은 폴 수도원의 원장이다. 영어가 안 통해 대화를 나눌 길은 없었지만 위대한 인격이었다. 나를 안내한 폴 수도원의 신부 이름이 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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