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성에서 평사 백광홍의 「관서별곡」을 듣고
기성 문백평사별곡(箕城 聞白評事別曲)
최경창(崔慶昌)
錦繡煙花依舊色 綾羅芳草至今春
仙郞去後無消息 一曲關西淚滿巾 『孤竹遺稿』
해석
錦繡煙花依舊色 금수연화의구색 |
금수산 안개 속 꽃은 옛 빛깔 같지만 |
綾羅芳草至今春 능라방초지금춘 |
능라도의 향기론 풀은 지금까지도 봄이네. |
仙郞去後無消息 선랑거후무소식 |
신선 떠난 후로 소식이 없어 |
一曲關西淚滿巾 일곡관서루만건 |
한 곡조의 「관서별곡」, 눈물이 수건에 가득하네. 『孤竹遺稿』 |
해설
이는, 작고한 백광홍의 애기(愛妓)가 고인의 작인 ‘관서별곡’을 창하다가 눈물에 목이 메여 다 끝맺지 못하고 음(飮)하는 것을 보고, 그를 추모하며 그녀를 위로하여 지어 준 즉흥시라 전한다.
백광홍은 그의 아우 백광훈과 함께 시문에 뛰어났으나, 벼슬은 평안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국방의 일을 맡은 무관직에 그쳤다. 그가 지은 ‘관서별곡’은, 그 관내인 관서지방의 산수 경치와, 변방(邊防)의 실황(實況)을 노래한 가사로서, 이보다 25년 뒤에 나온 정철(鄭澈)의 ‘관동별곡’에도 영향을 끼친 대작으로, 이원(梨園)의 기녀들이 창으로 즐겨 불렀고, 그가 45세로 타계하자, 이 노래는 기녀들의 눈물풀이로 자주 불리어졌다고 한다.
‘錦繡烟花, 綾羅芳草’는 ‘관서별곡’의 한 대문인 ‘…연광정(練光亭) 돌아들어 부벽루 올라가니, 능라도 방초와 금수 연화는 봄빛을 자랑한다…’ 중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로써 고인의 구기(口氣)를 생생하게 되살리면서, 동시에 여러 곳에 이중 삼중의 중의법을 구사하여, 한정된 자구 안에 무한 시정을 압축했다. 곧, ‘금수(錦繡)’는 일반명사와 고유명사를 연계하여, ‘수놓은 비단같이 아름다운 금수산’의 뜻이요, ‘연화(烟花)’는 ‘연하와 꽃‘의 봄 경치인 동시에, ‘기녀’의 아칭(雅稱)으로, 그녀의 고운 자태를 넌지시 기렸다. ‘방초(芳草)’는 ‘지금춘(至今春)’ㆍ‘거후무소식(去後無消息)’ 등과 연관하여, ‘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 [王維]’의 연상 매체(聯想媒體)가 되어 있으며, ‘산랑(仙郞)’은 ‘평사’의 아침인 동시에, ‘신선되어 가버린 임’의 뜻을 함께 머금어 있다.
이러한 복합적ㆍ중의적 시어들을 입체적으로 옮겨 내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고죽(孤竹)은 청백리 집안의 전형적인 유가(儒家) 출신으로 굽힐 줄 모르는 청경(淸勁)한 성격의 소유자인 한편, 그러나 그 시대의 이념이었던 주자학의 규범에는 얽매이기를 거부하여, 매양 도타운 인정, 순수한 사랑에 충실하였으며, 시정(詩情) 또한 그 어름에서 성숙하였으니, 앞의 시도 그런 알뜰한 인정에서의 소산이려니와, 그가 북평사(北評事)로 재임중, 그곳 경성(鏡城)의 관기 홍랑(洪浪)과의 염정(艶情) 일화는, 참 사랑의 표본인 양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고죽이 과만(瓜滿)이 되어 서울로 돌아가게 되매, 영흥(永興)까지 배웅하여 온 홍랑은, 저무는 날 비 내리는 함관령(咸關嶺) 고갯마루에서, 멧버들 한가지를 곁드린 시조 한 수로 전별한다.
멤버들【멤버들: 산버들. 갯버들과 같이 위로 꼿꼿이 치서는 토실토실한 가지로, 겨울도 끝나기 전에, 흰 복슬 강아지 모양의 버들강아지로 봄을 선도하는, 꺾꽂이도 잘 되는 버들의 일종이다.】 가려 꺾어【가려 꺾어: 아름다운 됨됨이의 가지를 골라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대【손대: 에게 】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이 어찌 지순 지결(至純潔)한 연정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랴?
“따라갈 수 없는 몸, 혼이나마 버들가지에 부쳐 임 따라 보내옵니다. 다행히 도중에 버림받지 않고, 임의 침실 창 밖에 심어 주심을 입게 된다면, 하늘도 느끼사 밤비를 베풀어 주시는 보살핌 속에, 필시 연녹색 새눈이 돋을 것이옵니다. 그 새눈이야말로, 오매에 임 그리는 이 홍랑의 넋이요, 분신이오니, 어여삐 여겨 주소서.”
감히 침실 안을 운위할 수는 없는 몸, ‘그 창 밖 먼 발치에서나마임 가까이 모시고지라!’의 소박한 소원인 것이다.
작품으로도 천하 명품인 이 시조에 오죽이나 감탄 매료된 고죽이었으면, 한시 그릇에다 옮겨 담아 한 수의 장단구(長短句)를 또 환골(換骨)해 냈음일까?
折楊柳寄與千里人 爲我試向庭前種
一夜新生葉 惟憐愁眉是妾身
떼쳐 두고 가는 마음이 좀 아팠으면, 또 얼마나 안쓰럽고 가엾은 모습으로 비친 홍랑이었으면, 그 만지면 망그러질 듯 꼬깃꼬깃 꾸겨진 갓 돋아날 새잎을, ‘파리하게 여윈 몸의 시름에 겨워 찌푸린 눈썹’으로 비쳤던 것일까!
예로부터 미인의 눈썹을 ‘유미(柳眉)’라 한 데서, ‘시름’으로 일전(一轉)한 ‘수미(愁眉)’에다가, 연수(戀瘦)의 ‘초췌(憔悴)’를 관(冠)한, 이 천래(天來)의 기어(綺語) ‘초췌수미(憔悴愁眉)’에 어린, 그 가엾고도 애처로운 정감은, 전혀 고죽의 홍랑에로 기울이는 무한 애정에서 메아리진 감측지심(感惻之心)에서이니, 그러고 보면, 이는 앞 시조의 한역(漢譯)이 아니라, 그에 갚는 화답(和答)이며, 그녀의 속앓이를 대신 앓아 주는, 떠나는 이의 살뜰한 유별(留別)이라 함직도 하다.
모르긴 하나, 고죽 또한 머나 먼 서울 길에 이 버들가지 마세라, 흙으로 강보(襁褓)하여 수유하듯 수없이 축이며 정성을 다했으려니, 눈물 보이기를 삼가는 이 지성들의, 주고 받는 사랑이 이처럼 청순하고 고아함에 견주면, 오열로 시종하는 세간의 남녀 이별에 항용되는, 금비녀ㆍ옥가락지ㆍ구리거울 따위야, 그 얼마나 속되고도 몰풍정(沒風情)한 증물(贈物)이랴?
그 후, 고죽이 병석에 있다는 전언을 들은 홍랑이, 천리 길을 허위 단심 7일 만에 상경, 시양(侍養)한 이야기며, 고죽이 종성부사(鐘城府使)로 귀임 도중 경성 객관에서 객사하자, 반구(返柩)의 상행(喪行)을 좇아 상경, 3년 시묘(侍墓)하고 수절한 이야기며, 후에 홍랑이 죽자, 완고한 최씨 문중에서도 그녀의 정절에 감복, 고죽의 묘소 옆에 후장(厚葬)한 이야기는 다 그 후문들이다.
이 모두 순수한 사랑, 알뜰한 인정의 극치 아님이 없으니, 정히 그 사랑, 사생을 초월한 영원함일진저!
-손종섭, 『옛 시정을 더듬어』, 정신세계사, 1992년, 325~327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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