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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박준규란 책을 읽다 - 1. 교보문고의 5만 년된 나무 테이블 알아? 본문

연재/만남에 깃든 이야기

박준규란 책을 읽다 - 1. 교보문고의 5만 년된 나무 테이블 알아?

건방진방랑자 2019. 5. 25.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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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규쌤은 단재학교를 2013년에 떠나 지지학교를 열었다. 단재학교에 있을 때 영향을 많이 주었던 분이고, 여전히 여러 생각을 한 아름 안겨주는 분이기에 한 번씩 만나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젠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기에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올해가 시작되며 맘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 준규쌤의 말을 듣고 어떤 단서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최근에 준규쌤은 지지학교 연말 발표회를 함으로 7명의 학생들을 떠나보내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계획이 있는지도 듣고도 싶었다.

 

 

 지지학교 발표회의 하이라이트, 난타공연. 지민이는 최고의 공연이었다고 했다. 

 

 

 

알아, 교보문고의 탁자?

 

5시에 교보문고에서 만나니, “여기에 5만 년이 된 나무 탁자가 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봤는데, 이곳까지 왔으니 한번 봐야지요라며 직원에게 탁자가 있는 위치를 묻는다. 그 모습이야말로 영락없이 준규쌤 다운 모습이다. 알고 있는 게 많다 보니 어딜 가든 그곳에 대해 사람들에게 충분히 설명해 줄 정도이며, 이처럼 궁금하거나 알고 싶거나, 보고 싶은 게 있으면 한달음에 달려가니 말이다. 그건 적극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추진력이라 할 수도 있는데, 단재학교에 있을 때 가장 많이 보고 배운 부분이다. 그 모습을 지금도 여전히 볼 수 있으니, ‘준규쌤은 여전하시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직원이 알려준 위치로 걸어가니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아도 서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 있더라. 도서관이라면 어색하진 않겠지만, 서점에서의 그런 광경은 무척이나 이상했다. 공간을 엄청나게 차지하는 나무 탁자가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거기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책을 읽고 있으니 말이다.

이 나무는 늪에 묻혀 공기와 닿지 않아 부패하지 않았고 발견된 후엔 이탈리아로 옮겨 가공하여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길이는 100명이 동시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인데,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기술이 없기에 반절로 나누어 옮겨왔다고 한다.

서점이란 책을 읽는 공간이기보다 사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탁자를 마련하여 책읽기에 편하도록 만드는 것은 꺼려지는 일일 것이다. 또한 이 탁자처럼 비효율적으로 세로 길이(1.5m)가 길 경우, 공간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될 수밖에 없다. 서점의 공간은 빈공간이 아니라, 책을 얼마나 더 비치할 수 있느냐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 ‘공간=이 되는 구조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 공간을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 만들기보다 공간=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으로 만들었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단기적인 이익에 함몰된 장사치의 얄팍함을 보여주는 게 아닌, 장기적인 안목(장기적인 안목이야말로 교육을 교육답게 만드는 힘이다)으로 문화를 만드는 진정성이라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박대통령이 말하는 창조경제를 제대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얄팍하지 않은 진정성을 볼 수 있던 광경이다. 여긴 도서관이 아니라 서점이다.

 

   

숨겨진 이야기는 사물을 달리 보이게 만든다

 

이미 그곳엔 사람들이 빈틈없이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모르긴 해도 서점이 문을 열면 사람들이 이 탁자부터 차곡차곡 앉아 책을 읽을 것이다. 얼핏 보기엔 선술집에 있는 잘 가공된 나무탁자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나무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보면 뭔가 영험해 보이고, 신비로워 보이며, 그곳에 앉아 책을 읽으면 5만 년의 지혜가 그대로 내 안에 스며들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안다는 건 때론 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다른 느낌이나 감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게 착각을 만들기도, 어떤 진정한 힘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도 한 적이 있다. 그가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문집에 서문을 쓰면서 관우의 소상小像에 대한 이야기를 썼던 적이 있다.

 

 

우사단 아래 도저동에 푸른 기와를 얹은 사당에는 얼굴이 윤나고 붉고 수염이 달린 의젓한 관우 운장의 소상이 있다.

士女가 학질을 앓아 그 평상 아래에 들어가면 정신이 나가고 넋이 빼앗겨 한기를 몰아내는 빌미가 되곤 한다. 그렇지만 꼬맹이들은 무서워하지 않고 위엄스러운 소상을 모독하는데, 눈동자를 후벼 파도 껌뻑거리지 않고, 콧구멍을 쑤셔대도 재채기 하지 않으니, 한 덩어리의 진흙으로 빚은 소상일 뿐이다.

雩祀壇之下, 桃渚之衕, 靑甍而廟, 貌之渥丹而鬚, 儼然關公也.

士女患瘧, 納其床下, 𢥠神褫魄, 遁寒祟也. 孺子不嚴, 瀆冒威尊, 爬瞳不瞬, 觸鼻不啑, 塊然泥塑也. -嬰處稿序

 

 

조선시대만 해도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전국 곳곳에 있었으며 한양엔 4곳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헐리고 동묘東廟 한 군데만 남았다.

관우는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을 통해 민중에게 무술이 뛰어난 불세출의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관우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에게 관우의 소상은 가까이만 가도 살아나서 청룡언월도를 빼들고 호통을 칠 것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학질이나 감기와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은 관우의 소상 앞에 가서 벌벌 떨며 예를 갖추면 몸에 붙은 악귀들이 관우의 위엄에 놀라 떠날 것이라 믿은 것이다. 현실의 관우도 아니고 그저 모양을 본뜬 것에 불과하지만, 관우에 대한 관념은 모형을 살아있는 관우로 환생시켰다. 우리가 교회에서 십자가를 보며 기도하거나, 절에서 불상을 보며 절을 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관우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아이들이 사당에 들어가 관우상을 본다. 우락부락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그건 흙인형일 뿐이다. 그러니 올라타서 눈을 건들거나 코를 쑤시기도 하며 신나게 놀기에 바쁘다. 그 모습을 어른이 본다면 대번에 혼을 낼 테지만, 그때 아이들은 아마도 인형 좀 가지고 논다는데, 거참 너무하시네라는 말을 속으로 하며 어이없어 할 것이다.

안다고 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생각을 넓히기도 하지만, 때론 한없이 협소하게 만들기도 한다. 교보문고의 탁자를 보다 보니, 쌩뚱맞게도 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탁자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탁자는 어떤 의미였을까?

 

 

동묘의 관우운장상. 알고 보면 무시무시 하지만, 모르고 보면 인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무가 던진 메시지, ‘너 혼자 잘났니?’

 

준규쌤이 무언가에 홀린 듯 이 탁자를 찾았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이유는 페이스북에 쓴 그 세월, 그 여정.... 메타포에 취하다라는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의 늪지대에 묻혀 있던 탁자는 건져 올려져 이탈리아로 건너가 탁자로 가공되었다. 나무를 인간의 쓰임새에 맞게 다듬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 후 부산항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고 차로 운반되어져 서울의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준규쌤은 거기서 어떤 메타포를 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는 단서는 없지만,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5만 년이란 시간, 뉴질랜드에서 이탈리아로,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옮겨온 여행 경로가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도 이 나무를 보며 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인간이 이룩한 문화는 어마어마하다. ‘온난화’, ‘황사’, ‘벌레퇴치와 같은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며 문명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만이 신의 대리인이라고 자임하는 것도 당연하고, ‘모든 동물을 다스릴 권한이 있다고 거만을 떠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의 역사를 12시간으로 환산할 때 겨우 115959초에 등장한 존재일 뿐이다. 이에 대해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에서 지구의 나이를 하루로 치면 인간 아니 생명체 자체가 존재한 기간은 한 순간의 타오름에 불과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한 순간에 활활 타던 불꽃은 오래도록 지속될 수가 없다. 뜨거워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를 테지만, 그만큼 순식간에 식어버리니 말이다. 아마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날고 긴다 하는 모든 것들이 내가 한 번 물로 쓸어버리면 무너져 내릴 건데하며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이 나무도 우리보다는 더 많은 세월을 견뎌내며 자연의 위대함을 그대로 간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탁자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연 앞에 선 헐벗은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며 겸손해져야 하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난 탁자 앞에서 그와 같은 감상을 느끼며 준규쌤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준규쌤을 만난 덕에 나무 탁자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탁자는 나에게 여러 이야기를 건네 줬다. 

 

 

인용

목차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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