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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 1. 벼슬하며 승승장구하다 본문

산문놀이터/묘지명 & 애제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 1. 벼슬하며 승승장구하다

건방진방랑자 2020. 9. 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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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벼슬하며 승승장구하다

 

정약용(丁若鏞)

 

 

정약용 기본정보

是唯洌水丁鏞之墓也. 本名曰: “若鏞.” 字曰: “美庸.” 號曰: “俟菴.”

父諱載遠, 蔭仕至晉州牧使. 母淑人海南尹氏.

 

어려서부터 벼슬생활할 때까지

英宗壬午六月十六日, 于洌水之上馬峴之里. 幼而穎悟, 長而好學. 二十二以經義爲進士, 專治儷文, 二十八中甲科第二人.

大臣選啓, 奎章閣月課文臣, 旋入翰林, 爲藝文館檢閱, 升爲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弘文館修撰校理成均館直講備邊司郞官, 出而爲京畿暗行御史.

乙卯春. 以景慕宮上號都監郞官, 由司諫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 由右副至左副承旨, 爲兵曹參議

嘉慶丁巳, 出爲谷山都護使, 多惠政,

己未復入爲承旨刑曹參議, 理冤獄.

庚申六月, 蒙賜漢書選, 是月正宗大王薨, 於是乎禍作矣.

十五娶豐山, 武承旨和輔女也. 旣娶游京師, 則聞星湖李先生瀷學行醇篤, 李家煥李承薰等得見其遺書, 自此留心經籍. 旣上庠, 李檗, 聞西敎見西書.

丁未以後四五年, 頗傾心焉,

辛亥以來, 邦禁嚴遂絶意.

乙卯夏蘇州人周文謨. 邦內洶洶. 出補金井察訪, 受旨誘戢.

 

 

 

 

 

 

해석

 

정약용 기본정보

 

是唯洌水丁鏞之墓也.

이는 열수 정용(丁鏞)의 묘다.

 

本名曰: “若鏞.” 字曰: “美庸.” 號曰: “俟菴.”

본래의 이름은 약용(若鏞)이고 자를 미용(美庸)이며 호를 사암(俟菴)이다.

 

父諱載遠, 蔭仕至晉州牧使.

아버지인 휘 재원(載遠)은 음직(蔭職)으로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母淑人海南尹氏.

어머니 숙인은 해남 윤씨다.

 

 

 

어려서부터 벼슬생활할 때까지

 

英宗壬午六月十六日, 于洌水之上馬峴之里.

영종(英宗) 임오(1762)616일에 나는 열수 가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幼而穎悟, 長而好學.

어려서 영특하고 총명했으며 장성해선 배우길 좋아했다.

 

二十二以經義爲進士,

22(1783)년에 경의(經義)경의(經義): 과문(科文) 육체(六體)의 중의 하나다로 진사가 되었고

 

專治儷文, 二十八中甲科第二人.

변려문려문(儷文): 변려문(騈儷文)의 약칭. 수사(修辭)하는 데 4자와 6자의 대구(對句)를 많이 쓰고 음조(音調)를 맞추며 고사를 많이 쓰는 한문체(漢文體)의 한 가지. 과문(科文)에 주로 이 문체를 썼다.을 전공하여 28세 때 갑과(甲科) 2등으로 급제했다.

 

大臣選啓, 奎章閣月課文臣,

대신의 선계선계(選啓): 정조의 부사(副使)를 정하는 계()를 말한다.로 규장각(奎章閣) 월과문신(月課文臣)에 배속되었고

 

旋入翰林, 爲藝文館檢閱,

갑자기 한림(翰林)에 들어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으며

 

升爲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弘文館修撰校理成均館直講備邊司郞官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과 교리(校理)ㆍ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ㆍ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로 승진했고

 

出而爲京畿暗行御史.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使)가 되었다.

 

乙卯春. 以景慕宮上號都監郞官,

을묘(1795)년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景慕宮上號都監郞官)景慕宮上號都監郞官: 경모궁(景慕宮)은 정조(正祖)의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 즉 장조(莊祖)의 궁호(宮號). 정조 19(1795)에 장조의 궁호(宮號)를 내려주고,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였다.으로

 

由司諫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

사간(司諫)으로 말미암아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由右副至左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고

 

爲兵曹參議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嘉慶丁巳, 出爲谷山都護使, 多惠政,

가경 정사(1797)년에 외직으로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가 되어 많은 정책을 펼쳤고

 

己未復入爲承旨刑曹參議, 理冤獄.

기미(1799)년에 다시 내직으로 승지(承旨)와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어 원통한 옥사를 다스렸다.

 

庚申六月, 蒙賜漢書選,

경신(1800)6월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함을 입었다.

 

是月正宗大王薨, 於是乎禍作矣.

그 달에 정종대왕(正宗大王)이 돌아가시니 이에 재앙이 일어났다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함으로써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된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는 정조 때 눌려지내던 벽파(僻派)와 손을 잡고 시파(時派)를 숙청하였는데, 시파로서 천주교와 관련되어 다산(茶山) 형제와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등이 유배 또는 사형되었다..

 

十五娶豐山, 武承旨和輔女也.

15살에 풍산 홍씨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旣娶游京師,

이미 장가들고 서울에 유람할 때

 

則聞星湖李先生瀷學行醇篤

성호 이익 선생의 학문과 언행이 순정하고 넉넉함을 듣고

 

李家煥李承薰等得見其遺書,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 등을 따라서 남겨놓은 책을 얻어보고

 

自此留心經籍.

이로부터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에 마음을 두었다.

 

旣上庠, 李檗,

이윽고 성균관상상(上庠): 태학(太學)을 말하는 것으로 곧 성균관(成均館)이다. 다산은 여기에 들어와 공부할 때 이벽을 만났다.에서 이벽(李檗)을 따라 유람할 적에

 

聞西敎見西書.

천주학을 듣고 서양의 책을 보았다.

 

丁未以後四五年, 頗傾心焉,

정미(1787)4~5년 동안 매우 마음이 쓰였지만

 

辛亥以來, 邦禁嚴遂絶意.

신해년 이후로 나라가 엄금하여 마침내 뜻을 끊어버렸다.

 

乙卯夏蘇州人周文謨. 邦內洶洶.

을묘년 여름에 소주 사람 주문모주문모(周文謨): () 나라의 신부(神父)로 북경 주교(北京主敎)의 명을 받고 정조 18년에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잠입하여 선교하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하였다.가 오니 나라가 흉흉하였다.

 

出補金井察訪, 受旨誘戢.

외직으로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에 보임되어 교지를 받아 서학의 유혹을 그치게 했다.

 

 

인용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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