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계획이라는 계획에 대해
‘8월의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의문의 전화, 그리고 전화로 모든 게 시작되었다.’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런 멘트와 관련된 일이 최근에 일어났기에 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빡빡한 스케줄과 ‘낙오는 곧 죽음’이란 압박 속에서 살아야 21세기의 한국인들에겐 여행도 계획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휴가철이 정해져 있고, 그 날에 맞춰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하고 일정을 짠다. ‘모든 건 계획 하에’ 이게 바로 현대 한국인들의 모토인 셈인데, 나도 이러한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계획에 없던 일이 생기면, 긴장하고 초조해져서 거부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무계획이 곧 계획이야
‘지금 나의 삶이 내 계획 하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지며 살아온 것일까?’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계획에 따라 살아가려 발버둥을 치고 애써본 적은 있지만, 그럴수록 계획은 처참히 깨지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만 커져갔다. 누군가는 그걸 ‘운명’ 내지는 ‘신의 계획’이라 표현할 테지만, 난 그저 ‘삶’이라 부르고 싶다. 계획은 어디까지나 이상 속에서 만들어진 어떤 길일 수밖에 없고, 그건 현실이란 다양한 욕망이 뒤엉킨 공간에선 당연히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런 어긋남이 특별한 상황이라기보다 오히려 당연한 상황이라 보아야 맞다.
물론 그런 ‘당연함’을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난 왜 이 모양이야?’라는 자책을 무수히 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계획에 따를 때 얻게 되는 것보다 계획도 없이 무언가를 했을 때 얻게 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계획을 세우면 당연히 그 계획안에서만 활동을 하려 하니 행동이 제약될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완고함만 자리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계획이 없다면 모든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부딪치게 된다. 애초에 계획이 없었는데, 닥쳐오는 상황들에 무에 겁을 낼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사건과 얽히고설키며, 다양한 인연과 엮인다.
▲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방학을 지내고 있는데 진규에게 전화가 왔다.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하면 끝!
이 날 진규의 갑작스런 제안은 어찌 보면, 계획대로 살길 바라는 내 마음에 돌맹이 하나를 던진 것과 같았다.
“내일 뭐하냐?” / “특별한 일이 없어.” / “그럼 오늘은 뭐하는데?” / “굴러다니고 있는 중이야.” / “(전화를 마무리 짓는 뉘앙스로) 알았다.” / “뭐냐? 전화를 했으면 속히 용건을 밝혀라.” / “용건 없어. 그냥 심심해서 해본 거야.” / 몇 번의 보챔이 계속된 후 이실직고한다. “시간 되면 놀러갈려고…… 근데 부산 친구에게 아직 연락을 안 해봐서, 연락한 후에 정해지면 다시 연락 줄게.”
나처럼 무언가 확실히 정해지면 연락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친구처럼 계획은 없지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연락을 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이 만나면 티격태격 많이 싸우지만, 잘 산다’는 옛 이야기가 있다. 그게 단지 이성끼리의 얘기가 아닌 관계에 대한 얘기라고 한다면, 이런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닐까. 좀 있으니 다시 연락이 왔다.
“지금 친구는 일이 있어서 4시쯤 도착할 거 같대. 올 수 있으면 오고, 그렇지 않으면 안 와도 돼.” / “(내일 가는 줄만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4시 출발’이란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다듬은 후에 말하면 ‘끝!’) 어? 그~ 그래~~~ 그래서 어~ 어디로 가는데?” / “강원도 홍천 쪽?” / “잠은?” / “텐트?” / “뭐야 하나도 정하지 않은 거야?” / “그냥 가보는 거지.” / “준비물은?” / “그냥 옷만 챙겨서 와”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끝났다. 말인 즉은, ‘정해진 게 없지만 간다’였다. 애초부터 갑자기 여행 계획이 잡혔고, 정해진 게 하나도 없지만 떠날 마음이 있으면 가자는 것이다. 이처럼 8월의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친구의 전화로 이 여행은 시작되었다.
▲ 2009년에 했던 국토종단 때 걸어서 건넜던 용담대교를 차를 타고 건넌다. 추억이 있는 곳이라. 찰칵!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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