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상을 벗어나 어린이로 돌아가다
3시 30분쯤 친구 집에 도착하니, 짐이 한 가득이더라. 이미 고기와 밑반찬, 텐트, 낚시대 등을 모두 챙긴 후였다. 나에겐 ‘옷만 챙겨와’라고 해놓고선 자기가 모든 짐을 다 챙긴 것이다.
장소, 그 까이꺼 대충
주승이가 오자마자 짐을 차에 싣고 출발하니, 4시 30분이 넘었다. 계획도 없이 갑작스레 추진된 여행, 그것도 아침도 아닌 저녁이 가까워서야 출발하는 여행은 난생 처음이다.
이런 상황이니 목적지라고 제대로 조사해봤을 리가 없다. 진규는 ‘양평 회현리 쪽에 낚시하기 좋은 곳이 있다’는 단서만을 듣고 ‘흑천’을 검색하여 찾아갔으나 이게 웬 걸 ‘상수원 보호구역’이란 팻말이 가드레일 곳곳에 떡하니 설치되어 있더라. 물도 맑고 낚시하기에 좋은 곳이었기에 한참 주위를 찾아다녔지만 팻말이 붙어있지 않은 곳을 찾기는 힘들었다.
주승이는 운전을 하기에 이런 상황이 못마땅하여 장난치듯 화를 냈지만, 나는 솔직히 이런 상황에 신이 났다. 그만큼 현장에서 수많은 상황에 부딪치며 만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국토종단을 할 때도 정해진 계획은 없이 현장에서 만들어 갔었는데, 오랜만에 그 때의 감흥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더욱이 도보여행 때에 비하면 잠자리를 구해야 한다던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가 하는 등의 문제로 불안할 이유도 없으니, 맘껏 옥신각신하는 이 상황을 즐기면 됐다.
▲ 이 근처를 해맸다. 그런데 상수원보호구역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총각들의 저녁식사
도착하고 보니 이미 시간은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고 서서히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짐을 내리고 텐트를 쳤으며, 주변의 돌들을 모아 화덕을 만든 후에, 땔감으로 쓸 나무들을 찾아다녔다.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용문역 근처이고 흑천의 좀 더 상류지역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엔 ‘뮤지엄교’라는 다리 밑에 자리를 잡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물의 깊이가 얕고 주변에 쓰레기들도 많고 해서 철교 밑에 자리를 잡았다. 기차와 전철, 화물열차가 수시로 왔다 갔다 하여 철교의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시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기차소리 자체가 정겹기 때문인지 참을 만 했다.
번개탄은 없이 장작들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숯을 놓았다. 이런 식으로 불을 붙이는 것은 처음이라 어떨지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불이 쉽게 붙지 않더라. 나무에 불이 붙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고, 화력 조절이 되지 않으니 고기가 순식간에 타기도 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2근의 고기(목살과 삼겹살이 각각 1근씩)를 아예 불판에 다 올리고 한 번에 구워야만 했다. 한꺼번에 철망에 올려 고기를 구우니, 뒤집기도 힘들었고 자칫 잘못하면 철망을 고정하려 놓은 돌에 고기가 닿기도 했다. 그 때문에 모래범벅인 고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우여곡절 끝에 고기를 다 구웠고 5ℓ짜리 맥주와 함께 먹었다. 주승이가 ‘점보캔’을 먹어보고 싶었는데, 혼자 먹기엔 엄두가 나지 않아 때를 기다렸다가 오늘 가져왔다고 말을 하더라. 처음 보는 물건이라 되게 신기했다. 이미 사위엔 어둠이 짙게 깔렸기 때문에 맥주와 함께 고기를 먹는 건 지상 최대의 만찬이었다. 그런데 모두 다 처음으로 점보캔을 사용하기 때문에, 설명서가 붙어 있어도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저찌 맥주를 따르는데, 뭔가가 잘못되었는지 거품만 한가득 나오더라. 그땐 ‘원래 이게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다음날 확인해보니, 레버를 ‘딸깍’소리가 날 때까지 돌려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카더라.
3명이서 고기를 2근 가까이 먹었다. 그것으로도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라면을 끓이기까지 했다. 역시 사람은 밖에만 나오면 갑자기 식성이 좋아지는 것 같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니 말이다. 불이 약하기 때문에 익힌다기보다는 거의 불린다는 표현이 맞았다. 오랜만에 군대에서나 맛보던 뽀글이의 정겨운 맛을 보았다고나 할까. 세 명이서 몇 번 젓가락이 오고 가니 순식간에 동이 났고 국물도 얼큰하니 좋았다.
▲ 마트에서 4만원 정도에 샀다는 텐트다. 나름 안락한 보금자리다. 석양이 드리우며 어둠이 짙어오고 있다.
족대질을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해본 사내
저녁을 먹은 후엔 친구가 물고기를 잡겠다고 나섰다. 이미 주승이에겐 ‘매기를 맨 손으로 잡았다’고 너스레를 떨은 후라 주승이는 “어여 매기 좀 잡아와 라면에 넣어서 함께 끓이게”라고 놀려줬다.
이미 근처 테니스장의 불까지 완벽하게 소등이 되어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지만 진규는 “어두워지면 다슬기들이 물 위로 올라와.”라는 말을 남기며 물가를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친구 덕에 처음으로 족대질을 해봤다. 아니 처음으로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는 것이 아닌 물고기를 잡는 경험을 해봤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처음으로 해보는 것이니 당연히 어설플 수밖에 없지만, 친구가 자세히 알려줘서 차근차근 해볼 수 있었고 물고기도 여러 마리 잡을 수 있었다. 족대를 물살이 센 지역에 설치하고 한껏 몰아온 후, 족대를 들어 꿈틀꿈틀 대는 물고기가 있을 때의 쾌감은 가히 최고였다.
이때 놀라웠던 것은 피라미를 잡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는 사실이다. ‘성질이 급하면 일찍 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어도 지금까지는 피상적인 말로만 다가왔었는데, 이땐 그 말이 실존의 언어로 다가왔다.
앎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
진규는 여기저기 훑고 다니며 고기 잡는 것 자체를 하나의 놀이로 즐기고 있었다.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아니, 이미 어둠은 짙게 깔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천리안을 지닌 사람처럼 개울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돌을 들춰서 물고기가 움직이나 살펴보고 돌을 훑으며 다슬기를 건져냈다.
하지만 난 즐기지 못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은 낯설다는 느낌을 넘어 두렵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개울가는 미지의 생물들이 사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흡사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처럼 부해라는 미지의 세계에 곤충이 득실거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것이 어느 때고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이걸 보면서 몇 년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학과 선배와 완주의 고산을 찾아갈 때, 선배는 아카시아를 따먹고, 산딸기를 따먹었다. 그 중 나에게도 먹어보라고 하나를 줬는데, 난 차마 먹지 못했다. 그건 씻지 않아 위생적이지 않다는 관념 때문이 아니라, 낯선 과일에 대한 트라우마(예전에 과수원에서 직접 딴 복숭아를 먹다가 안에서 애벌레가 나온 일) 때문이었다. 낯선 것,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예측되지 않으니 피하게 된다.
이런 마음상태를 보면서 이번 ‘메르스 사태’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메르스’는 미지의 영역이다. 알지 못하기에 ‘만에 하나’ 내가 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낳게 한다. 그러니 벌벌 떨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엔 당연히 ‘아는 게 힘’일 수밖에 없다. 메르스란 질병에 대해 알았다면, 근대화 이후 국가의 질병관리 역사에 대해 알았다면, 바이러스에 대해 알았다면, 그처럼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지식이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상황에서 놓여나게 만든다. 나 또한 진규처럼 개울에서 놀았던 추억이 있고, 그런 지식이 있었다면 그처럼 불안해하거나 노는 둥 마는 둥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고 나니, ‘교육이란 앎과 삶이 일치된 것’이란 말이 절실히 다가오더라. 난 아직까지도 삶과 괴리된 ‘허영만 가득 찬 지식껍데기’만을 긁어모아 부둥켜안은 채 살고 있다. 이런 내가 교육자의 역할을 한다고 하니,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좀 더 앎과 삶을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어떤 상황에서건 그 상황에 푹 빠져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앎이 나를 자유케 할 때까지, 미지의 세계를 맘껏 즐길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 오랜만에 원없이 불장난을 했다. 진규에게 장난치며 "불이 타는 건가? 마음이 타는 건가?"라고 말했다가 눈빛 레이저를 맞아야 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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