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덤으로 누리는 행복
텐트 안에 들어가니 아득하고 좋았다. 진규는 최근에 4년 동안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자동차를 렌트하여 강원도 방방곡곡을 2주 동안 여행했다. 오늘 우리가 자는 이 텐트도 그 여행 때 썼던 텐트다.
▲ 정말 오랜만에 텐트에서 잠을 잔다. 혼자 잤으면 못 잤을 텐데, 같이 자니 오히려 안심이 되고 좋았다.
한여름 밤에 추위에 벌벌 떨며 잔 사내들
진규는 나의 국토종단기를 보면서 “뭔 내용들이 다 자는 곳을 구하느라 걱정을 하는 내용이더만”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잠자리를 구하는 문제로 여행의 참맛을 느끼지 못할 바에야, 텐트를 사서 편하게 자면서 여행을 좀 더 즐기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막상 텐트에 들어가 보니 운치도 있고, 꽤 공간도 넓어 쾌적한 느낌이더라. 친구들과 텐트에서 자는 건 처음이었기에 신나기까지 했다. 그래도 세상 속에 우리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 곳에서 혼자 잔다고 생각하면, 아찔할 것만 같았다. 밀폐된 공간이라는 느낌이 한없이 나를 옥죌 것만 같았고, 언제든 저 문을 열고 누구든 들어올 수 있다는 생각에 설잠을 잘 것만 같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상황을 바꿔서 생각해보더라도, 텐트가 쳐져 있고 창문이 모두 닫혀 있는데 열어야만 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열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안에 어떤 존재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난 긴팔과 긴바지를 챙겨왔고, 진규는 긴바지만 챙겨왔으며, 주승이는 아예 챙겨 오질 않았다. 한여름 밤에 추위에 덜덜 떨며 자는 체험을 해볼 수 있었다. 긴팔과 긴바지를 입었지만 손과 발은 그대로 노출되다보니 손이 시려워, 발이 시려워 꽁♬ 새벽 공기 때문에~ 뒤척여야 했다. 하지만 바닥이 평평하고 푹신한 편이어서 추위만 막을 수 있으면 좋은 잠자리였을 것 더라.
▲ 진규가 영월에서 음악을 들려준 뮤지션에게 선물로 그려준 그림이란다. 눈물은 꽃이 된다. 이런 표현력이라니,,, 배우고 싶다.
광고기획자에게 듣는 기획이야기
주승이는 ‘광고 기획자’라고 하더라. 기획자라는 이름은 왠지 모르게 거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감독’이란 말처럼 전체를 이끌고 하나의 생각을 짜임새 있게 표현하는 직책이란 생각 때문이다. 주승이네 회사는 기획자가 있고 그 기획을 스토리로 구성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분업체제라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힘든 점이 있다고 한다. 기획자가 전체를 총괄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좋을 테지만 서로의 영역이 따로 있기 때문에 기획자가 의도한 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싸우게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승이는 ‘우린 싸우는 게 일’이라고 표현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 '오즈드림페어' 최근에 주승이가 만든 광고란다. 이렇게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싸우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한다.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 대략 광고 의뢰가 오고 얼마동안 시간을 주냐고 물어보니, 최대 한 달 정도 시간을 주는 곳도 있는데, 2주 정도 시간을 준다는 한다. 아무래도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그 시간동안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상당히 크지 않을까 싶었다. 그랬더니 주승이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줘도, 적은 시간을 줘도 나오는 건 별반 다르지 않아. 오히려 더 많이 고민하면 할수록 더 꼬이기도 하거든”이라고 말하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 보면, 『논어』의 구절과 함께, 무언가를 하려 맘먹은 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문자는 세 번 생각한 후에 행동하였다. 공자가 그 얘기를 듣고 “두 번만 생각한 후에 행동해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季文子三思而後行. 子聞之, 曰:“再, 斯可矣.” -『論語』 「公冶長」 19
흔히 심사숙고하는 것을 좋게 얘기한다. 그만큼 사람이 진중하고 무언가 책임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생각이 많다는 것에 대해 정자는 ‘나쁜 일을 하려는 사람은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생각하면 좋은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두 번 생각하면 이미 너무 살피게 되며, 세 번 생각하면 사사로운 뜻이 생겨서 도리어 미혹되게 된다(爲惡之人, 未嘗知有思, 有思則爲善矣. 然至於再則已審, 三則私意起而反惑矣,).’고 이야기하고 있다. 생각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상황을 왜곡하고 욕망이 앞설 수 있기 때문에 생각은 간단한 것이 좋은 것이다.
나에겐 글을 쓰는 일이 그와 비슷한 느낌이다. 주승이처럼 제한 시간이 있거나, 언제까지 써야 한다는 부담이 있거나, 결과를 평가받거나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쓰다가 써지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르익겠지’하는 생각으로 미루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경험하고 난 후의 감상들은 사라지고 난 후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쓸 수 없게 된다.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니다’라는 말이 나에겐 그렇게 다가왔다. 좀 괴롭더라도 쓰기로 맘먹은 때에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래서 들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직 못 쓰고 있는 글이 바로 ‘『송곳』 북콘서트 후기’이다.
계획되지 않은 旅行, 그래서 餘幸(덤으로 누리는 행복)
5시 일어나선 드디어 릴낚시를 할 수 있었다. 낚시란 미끼를 끼고 하는 것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릴낚시는 내가 알던 낚시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거였다. 낚시에 미끼를 끼지 않아도 된단다. 그 원리는 반짝 반짝 빛나는 작은 물고기 모양이 미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작은 물고기가 포식자 물고기를 피해 도망가는 물고기처럼 보이게 하여 포식자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원리란다. 그렇기 때문에 릴낚시를 하려면 줄을 너무 빨리 당겨서도 안 되며, 적당히 당겼다 멈췄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릴낚시는 포인트를 잘 잡아야 하고, 던진 후엔 적당한 속도로 당길 수 있는 스킬이 필요해 보였다. 나도 여러 번 던져봤지만 잡히진 않았다.
▲ 처음으로 낚시대를 잡아봤다.
어제 오늘 릴낚시를 하고 족대로 물고기를 잡다 보니, 이것 또한 숨고 낚아채는 순환임을 알겠더라. 물고기는 날렵하게 인간을 피해 바위 밑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고 인간은 그런 물고기의 습성을 알기 때문에 바위를 들추며, 작은 물고기처럼 보이게 하고(릴낚시), 떡밥을 제공하여 그들을 잡아낸다.
이렇게 잘 놀다가 8시쯤에 짐을 정리하고 차에 몸을 실었다. 어제 오늘 갑자기 약속이 잡히고 정처 없이 이곳에 와서 잘 머물다가 간다. 도보여행을 하면서도 느꼈지만, 여행은 여행餘幸(덤으로 누리는 행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덤은 게임으로 치자면 ‘서브 퀘스트’라고 할 수 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며 스토리를 진행하는데 그다지 영향이 없지만, 게임의 참맛을 느끼기 위해서는 웬만하면 해야 하는 것이다.
▲ 고기를 잡을 때의 손맛이 장난 아니라고 하더라. 언젠가 손맛을 볼 때도 있겠지.
이처럼 여행을 하는 이유는, ‘사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다. 현실에 치여 사느라 잃어버린 삶의 이유와 행복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하면서도 하나도 즐겁지 않다면, 그 여행은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건 여행이라 불리지만 ‘일상의 확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나에겐 정말 餘幸이었다. 가슴 뭉클하도록 신이 났던 그 순간들의 기록을 여기서 마무리 지으며, 당신도 지금 이 순간 餘幸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철교 밑에 붙어 있던 우렁이알이란다. 처음 본다. 난 왜 이리 처음하는 일들이 많은 거지??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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