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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올선생 중용강의, 28장 - 8. 중용은 전국초기의 문헌인가 진나라 이후의 문헌인가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28장 - 8. 중용은 전국초기의 문헌인가 진나라 이후의 문헌인가

건방진방랑자 2021. 9. 2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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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 중용은 전국초기의 문헌인가 진나라 이후의 문헌인가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
오늘날의 천하는, ()의 궤()가 같고, ()하는데 같은 문()을 사용하고, ()하는데 륜()이 같다
 
, 子思自謂當時也. , 轍迹之度. , 次序之體. 三者皆同, 言天下一統也.
()은 자사가 스스로 일컬은 당시를 말한다. ()는 수레바퀴 궤적의 치수다. ()은 차례의 례(). 세 가지가 모두 같으니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에서는 궤()를 같게 하고, ()하는 데는 문()을 같게 하고 행()하는 데는 륜()을 같게 했다는 것인데, 언뜻 의미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글자 하나하나의 구체적 의미를 파악하고서 이 문장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먼저 거()에서는 궤()를 같게 했다는 말에서, 이 궤()는 옛날 수레에서 두 바퀴 사이의 거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갑골문에서 거()는 본래 수레 모양 그대로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더 수레 같죠? 글자의 좌우에 있는 선이 바퀴인데 궤()라는 것은 이 양쪽 바퀴 사이의 폭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참고로 몇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옛날 갑골문이라는 것은, 최교수님이 말씀하셨던 (

, ) 자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글자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 때 지금과 같이 횡으로 연결시킨 것만 쓰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장을 쓸 때는 종서를 썼지만 글자의 모양이나 방향은 마음대로였지요. 예를 들면 ()’ 자는 (

)의 형태였던 것이 지금과 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른쪽에 꼬리가 있는데, 짜식이 누우니까 이제 좀 돼지같이 보이죠? 옛날 글자들은 여러분이 지금 접하고 있는 것과 조합 방식이나 방향이 다른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특히 동물을 나타낸 글자들은 돼지 시()의 경우와 같이 일어선 예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거동궤(車同軌)’라는 것은 수레의 양쪽 바퀴의 사이의 길이를 결정했다는 말이 되는 거죠. 옛날에는 수레바퀴의 두께가 좁았기 때문에 죽 달리면 자국이 깊게 남는데, 바퀴사이의 사이즈가 다 다르면 그 수레들이 도저히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일로드 같이 생기는 수레바퀴 자국을 같게 했다는 것입니다.

 

()는 문()을 같게 했다는 말에서 서()는 쓰는 것, 영어로 하면 라이팅(writing)’입니다. 이 서()갑골문에서 보면 (

)와 같은 형태인데, 손으로 붓을 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 서동문(書同文)’이라는 것은, 쓰는데 문()을 같게 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이라는 것도 해석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문()은 바로 앞에서 설명했던 예((()에서의 문()과도 다르고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장, 즉 쎈텐(Sentence) 개념과도 또 다르거든요. 여기 이 맥락에서 문()이라는 것은 고어에서 사용되는 어법으로서, 즉 자형상의 가장 심플한 단위를 가리킵니다. 예를 든다면 옛날에는, ()자의 경우 여()와 자()를 각각 하나의 문()이라고 하였고, () 전체는 자()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文字)’라는 단어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다시 말해 여기서 ()’은 글자에서 형태학적 최소 단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동문(書同文)’이라는 것은 모든 글자를 쓸 때 사용하는 형태론적인 자형의 기본 단위를 통일시켰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사실 이 글자라는 것이 제멋대로 였습니다. 갑골문의 경우도 점복관이 뼉다귀에다가 글자를 파는데 파는 놈마다 글자가 모두 달랐거든요. 여러분들이 한문 시험을 볼 때, 답안지를 채점하는 사람은 여러분이 쓴 글자가 한 획만 잘못 되도 틀린 것으로 하는데 이것은 웃기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갑골문은 쓰는 놈마다 전부 달랐던 것이고, 한자라는 것이 원래는 그렇게 제멋대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역사적으로 변해가는 것도 더 말할 나위 없이 다양합니다. 갑골문 사전이라는 것이 뭔지 아세요? 갑골문 사전이라는 것은 한 의미에 대해서 그 당시 사용되었던 다양한 글자들을 모두 모아 놓은 것입니다. 갑골문의 재미라는 것이 이런 다양성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동륜(行同倫)! 행동하는 것은 륜()을 같게 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원래 륜()이라는 것은 동아리 륜()자입니다. 무언가 그루핑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차서(次序, 차례) ()이요 질서 륜()입니다. 동아리에는 항상 위아래가 있고, 선배 후배가 있고 아무튼 질서가 있게 마련이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윤리(倫理)라는 것은 륜()의 이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륜()이라는 것은 차서인데, 행동륜(行同倫)이라는 것은 행동하는 데 있어서 차서를 지키는 것을 다 동일하게 했다는 의미입이다. 이 동네나 저 동네나 이 차서는 다 같아야 합니다. 이 동네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이렇고, 또 저 동네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저렇고, 동네마다 다 다르면 안 된다, 즉 륜()이 같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용(中庸)은 진시황 이후에 성립한 문헌

 

그런데 주자(朱子) ()를 보면 ()은 자사(子思) 당시이며, 3(車同軌, 書同文, 行同倫)가 모두 같은 것은 천하가 하나로 통일된 것을 말한 것이다[今子思自謂當時也 三者皆同言天下一統也].”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자(朱子)는 중용(中庸)을 자사(子思)작으로 보아야 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자사(子思)의 당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사(子思)의 당시는 전국 초기에 해당되는데 어떻게 거동궤(車同軌서동문(書同文행동륜(行同倫)이 가능했겠습니까? 이것은 진시황 통일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이예요. 사기(史記)에 유명한 이사(李斯)의 말이 나오는데, 이 중용(中庸)의 문장이 바로 그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인용된 이사(李斯)의 말과 내용이 같습니다. 그렇다면 中庸子思 당시가 아니라 진시황 통일 이후에 성립한 문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이 자사(子思)작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주자(朱子) 당대에 주자(朱子) 제자 중에서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때 학문 수준이 어땠을 것 같아요? 중국의 학문 수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에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음에 대한 주자의 답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사서혹문(四書或問)이라는 책이 있어요. 이 책은 주자(朱子)가 사서(四書)에 대해 강의한 것 중 의문 나는 사항에 대해 제자가 질문한 것을 주자(朱子)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혹문(或問)을 보면 우리가 이상하다고 느낄만한 것들에 대해서 제자들이 이미 다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한 제자가 선생님, 거동궤(車同軌), 서동문(書同文), 행동륜(行同倫), 이 사건은 진시황 이후에 있었던 일인데 이런 말이 사용되는 중용(中庸)은 진시황 이후에 쓰여진 것이 아닙니까?”하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朱子)는 이 물음에 대해 명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혹문(或問)2군데 나오는데 복잡한 것은 생략하고 핵심만 말한다면, 주자(朱子)는 여러 가지 것을 인용하면서 대답하기를 흔히 거동궤(車同軌), 서동문(書同文), 행동륜(行同倫)이라고 하는 것은 진시황 이후의 사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만 하더라도 주()황실의 정통성은 아직 살아있었고, 지켜지지 않았을 따름이지 이러한 것에 대안이나 복안은 이미 주()나라 주실(周室)에 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사(子思)는 이 말을 통해서, 전국(戰國)시대의 형식을 말한 것이 아니라 주대(周代) 봉건제의 아이디얼한 이상을 말한 것이다하고 명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을 뿐이지 이것은 이미 주대(周代)에 이상으로 다 있었던 것이고 진시황 통일 이후에 이사(李斯)가 그것을 실현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천하일통(天下一統)이라는 문제에서 일통(一統)은 다 되어 있었다, 다만 어지럽혀져 있었던 것이다라고 주자(朱子)는 말했던 것입니다.

 

과연 주자(朱子)? 주자(朱子)는 그렇게 간단한 학자가 아닙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김용옥은 주자(朱子)의 설을 인정치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들을 종합해 볼 때 주자(朱子)의 말은 상상력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자(朱子)의 말도 역시 일리는 있기 때문에 주자(朱子)의 설도 존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결국 이 문장이 하고자 하는 말은 금천하(今天下)의 이러한 것들은 과거에 나누어져 있던 여러 가지 것들이 동일화 된 것이고 이것이 바로 바로 앞 문장에서 말한 예()ㆍ도()ㆍ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문장과 연결 짓는다면, 중용(中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천하를 관통하는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은 천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모든 천자(天子)는 다 예악(禮樂), 즉 문명의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는가? 다음의 유명한 말에서 그 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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