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사와 학교를 의심하라
거의 24년 동안 교육의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다. 감히 교육과 인간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통해 배우고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통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배운다.
그런 배움의 절정은 학교라는 기관에서, 누구나 ‘학생’이란 신분으로 배우게 되는 시기일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육체의 성장뿐 아니라 정신의 성숙(가치 정립)까지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라는 것이 한 개인에게 있어, 또는 그 개인이 소속된 사회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나의 경우 17년이란 시간동안 학교 교육을 받아오면서 지식을 넓혀간다는 생각으로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에 대단히 순종적이었다. 애국가를 외우라고하면 당연히 외웠고, 무언가 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벌을 받을 게 두려워 고분고분 행동했으며, 친구들은 부모님이 차로 태워서 편하게 학교에 오는데 나만 힘들게 걸어 다니더라도 그 친구나 국가를 원망하기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만을 했었다.
그 당시의 나에게 선생이란 존재는 ‘이끌어주는 존재’였기에 믿고 따르는 게 당연했으며, 학교란 공간은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이었기에 열심히 다니는 게 당연했다.
▲ 학교 과제로 읽기 시작했지만 읽고 나선 혼란에 빠졌다.
가르침에 묶인 자
그런데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이란 책을 읽으며 나 또한 주입식 교육을 통해 비판적인 사고나, 전복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은 공간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고,
여름철 벌레에게 얼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은 시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며,
견식이 좁은 사람에게 道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은 가르침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대는 벼랑 끝에서 나와 큰 바다를 보니, 비로소 그대의 추함을 알게 되었으니 장차 그대와 더불어 큰 이치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추수」
北海若曰: “井䵷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 夏蟲不可以語於氷者, 篤於時也 ; 曲士不可以語於道者, 束於敎也. 今爾出於崖涘, 觀於大海. 乃知爾醜, 爾將可與語大理矣. -『莊子』「秋水」 1
우리가 흔히 쓰는 ‘우물 안 개구리’의 출전은 『장자』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공간에 있지 말고 좀 더 넓은 공간으로 나가 너의 꿈을 펼쳐라’라는 용례처럼, ‘한정된 공간’을 얘기하고 싶을 때 주로 쓴다. 그런데 위에 쓰여 있는 원문을 읽다 보면, ‘우물 안 개구리’란 결코 공간에만 구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가 놓인 공간을 최고로 여겨 공간특이성을 망각하거나, 자신이 지내온 시간만을 맹신하여 먼 과거의 이야기를 ‘원시시대 이야기’라며 폄하하거나, 어떤 특정한 가르침(종교)을 도그마로 여겨 다른 가르침을 이단으로 모는 사람들도 ‘우물 안 개구리’이긴 매한가지이니 말이다.
결국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간적인 구속, 시간적인 집착, 특정 가르침의 얽매임에서 뛰쳐나와야만 가능하다. 나는 이 중에서 가르침에 얽매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정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여 다른 가르침들을 매도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내 자신이 ‘견식이 좁은 사람曲士’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건 곧 ‘뜻 있는 사람志士(『논어』「위령공 8」)’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우물 속은 안락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시야도 관점도 갇히게 된다.
가르침에서 놓인 자, 그 사람이 교사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의 어떤 부분이 나를 견식이 좁은 사람으로 자각하게 만들었는지, 그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에 따르면 교사를 ‘귀족주의적 사회의식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며 귀족주의적 요소를 각종 과목을 통해 자연스레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존재’라고 정의내리며, 학교 또한 ‘귀족주의를 묵인하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복종과 순종을 강요하도록 만드는 공간’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이쯤 되어 내가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받았던 교육을 되짚어 보니, 촘스키 선생의 정의가 합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예만 보더라도 애국가의 암기는 국가에 대한 충성의 강요이며, 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회질서에 대한 순종의 강요이며, 잘 사는 아이에 대한 묵인은 ‘열심히만 공부해. 그러면 너도 저 아이 부럽지 않게 부유해질 수 있어.’라는 계층적 차별을 은폐한 것일 뿐이니 말이다.
나를 가르쳤던 교사 중 위의 정의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하며 교단에 선 교사는 몇이나 될까? 자신이 하는 교육활동이 어떤 부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교사는 몇이나 될까?
요즘은 범행 의도가 있었느냐에 따라 형량이 정해진다. 즉 의도가 없다면 아무리 심한 범죄를 저질러도 정상참작을 해준다는 말이다. 그처럼 교사도 교육의 부정적인 측면을 모르고 가르쳤다면, 의도가 없다하여 넘어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사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이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교사가 되었다면,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고민해보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그래서 항간에는 ‘오락영화의 대표격인 『트랜스포머Transformers』마저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가렸을지는 몰라도, 그 안엔 ‘미국우월주의’, ‘자본주의 찬양’, ‘반공주의’, ‘양육강식의 논리’, ‘인간중심주의’ 등이 숨어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도 흐리멍덩하게 흐름에 따라 표류하듯 살 것(그래봐야 귀족주의자가 만들어놓은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만 될 뿐이다)이 아니라, 자신만의 정치적인 색깔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적어도 학생들에게 무의식중에 비교육적인 가르침을 주는 경우가 없어질 테니 말이다.
▲ 보기엔 오락영화고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영화지만 그 안엔 정치색이 짙게 들어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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