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적인 자질에 의해 글을 짓게 된다거나 여러 상황에 휩쓸리며 짓게 된다는 논의 중에 나는 당연히 전자보다는 후자의 관점에 매력을 느낀다. 모든 사람에겐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며 그건 어떤 상황과 마주쳐 공명할 때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협화음 속에 문학은 생기를 얻고, 철학은 생명을 얻는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을 보더라도 정조(1776∼1800)가 집권하던 시기엔 동분서주하며 관리로서의 임무에만 충실했다. 규장각 일원으로 책을 교정보거나 수원화성의 실질적인 설계자로 공사를 총지휘하며 바쁘게 지냈다. 아마 그렇게 관리로서 승승장구했다면 현재 우리가 ‘다산학’이라는 칭호까지 붙이며 기리는 다산은 없었을 것이다. 삶이 엇나가 신유박해辛酉迫害(1801)로 일가친척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다산은 유배를 가게 됐을 때가 작품을 만들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왕을 보좌하는 자리에서 죄인의 자리로, 명문가에서 멸문가로 180° 바뀐 상황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테지만, 다산은 삶이 어긋난 자리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그들과 함께 18년간의 유배기간에 500여권의 책을 집필한다. 다산하면 떠오르는 많은 작품들이 이때에 탄생했다.
▲ 다산학의 탄생은 그에게 닥친 비극과 관련이 있다.
힘든 상황을 겪어본 사람이 좋은 작품을 만든다
다산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극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전 사람들은 ‘곤궁한 상황에 내몰려야만 시구를 지을 수 있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과연 어떤 논리에 의해 이와 같은 결론을 맺게 된 것인지, 아래의 글을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세상에서 시인으로 출세한 사람은 적고 곤궁한 사람은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 그렇기만 할까?
대개 세상에 전해지는 시들은 옛날에 곤궁했던 사람들의 말에서 나온 것이 많다. 선비인데도 자기가 지닌 재능을 세상에 펼쳐보지 못한 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산마루와 물가 먼 데로 나가기를 좋아한다. 그때 벌레와 물고기, 풀과 나무, 바람과 구름, 새와 짐승 따위를 보며 이따금씩 기괴한 것을 찾아 안으로 근심과 분함이 가득 쌓여 그것을 원망과 풍자로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때서야 유배된 신하와 과부의 탄식을 표현하여 인정의 곡진한 부분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에 곤궁할수록 시가 좋아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가 시인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의 ‘곤궁한 상황에 내몰린 후에야 시가 좋아진다’고 보는 게 맞다. -구양수, 『거사집』 「매성유시집서」
予聞‘世謂詩人少達而多窮’, 夫豈然哉. 蓋世所傳詩者, 多出於古窮人之辭也. 凡士之蘊其所有而不得示於世者, 多喜自放於山巓水涯之外. 見蟲魚草木, 風雲鳥獸之狀類, 往往探其奇怪, 內有憂思感憤之鬱積, 其興於怨刺, 以道羈臣寡婦之所歎, 而寫人情之雅言, 蓋愈窮則愈工. 然則非詩之能窮人, 殆窮者而後工也. - 歐陽修, 『居士集』 「梅聖兪詩集序」
옛 사람도 시를 잘 쓰는 사람은 가난했던 모양이다. ‘유명한 시인=가난한 사람’이라는 공식이 여러 사례를 통해 증명되다 보니, 이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고 싶었나 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라는 문학 장르의 특성상 인간의 가장 은밀한 감정과 맞닿아 있기에 ‘시는 시인을 궁핍하게 만든다詩能窮人’라고 생각했다. 시가 잘못된 인연처럼 사람에게 들러붙어 궁핍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시를 생각했다면, 모 음료 CF의 광고처럼 “가! 가란 말야! 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라고 소리치며 떼어내려 악다구니를 쓸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생각 속에서 ‘시마詩魔’라는 단어까지 만들어졌다. 시마란 ‘시라는 악마’라는 뜻으로 ‘마귀의 예수 유혹 1(마태오 4:3~11)’처럼 순간적으로 사람에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지만, 순간이 지나면 불행해지게 만든다는 뜻이다. 히어로들의 화려한 능력 뒤엔 불행한 일상이 숨어있듯, 시마 또한 문학적인 창작욕을 주되, 일상의 불행을 담보로 잡고 있는 것이다.
▲ 시마가 달라 붙으면 문학적인 영감을 준다. 하지만 평생 곤궁하게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시마에게 어떻게 할까? 정우성처럼 떼어내려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지 않을까?
이런 논리가 ‘시’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면, ‘곤궁한 상황에 내몰린 후에야 시가 좋아진다窮者而後工’라는 것은 ‘상황’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가난한 사람’이 많은 이유는 시를 짓게 되면서 궁핍한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 아니라, 궁핍했던 상황 자체가 좋은 시를 짓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양수(1007~72)는 궁핍한 상황에 내몰리면 내몰릴수록 안에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쌓이게 되고, 그게 결국은 인정을 울리는 진정성 있는 언어로 표현된다고 보았다. 그러니 그런 시를 본 사람은 감동할 수밖에 없고, 작가는 그만큼 유명해지는 것이다. 구양수의 생각처럼 하나의 문학 장르가 악마일리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여러 환경적인 어그러짐이 결국 응집되고 그게 표현되어 작품들이 나오게 된 걸테니 말이다.
연암의 작품을 살펴보기에 앞서 이런 식의 문학 탄생론을 살펴본 이유는 연암의 작품이 그런 식의 갈등과 불협화음 속에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환경과의 불협화음으로 자칫 잘못하면 무겁고 사변적인 내용의 작품이 될 수도 있었지만, 연암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그의 작품은 유머와 인간미가 가득한 작품이 되었다. ‘무겁되 가볍게, 진지하되 유머러스하게’와 같은 역설적인 표현이 연암의 작품에 들어맞는 평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다음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연암이 살았던 시대상황을 살펴보고 어떠한 불협화음 속에서 살았는지, 그게 작품에 어떻게 묻어났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 이제 본격적으로 연암의 글을 보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인용
- 3절: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 4절: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5절: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 6절: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 7절: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 8절: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 9절: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하였다. / 10절: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 11절: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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