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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연암 박지원을 만나다 - 1. 수단으로서의 글 읽기와 본질로서의 글 읽기 본문

연재/만남에 깃든 이야기

연암 박지원을 만나다 - 1. 수단으로서의 글 읽기와 본질로서의 글 읽기

건방진방랑자 2025. 4. 2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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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단으로서의 글 읽기와 본질로서의 글 읽기

 

 

글이란 한 사람이 지닌 문사철(文史哲)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정제된 양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읽으면 지은이가 살았던 사회상을 엿볼 수 있고,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을 맛볼 수 있으며, 현실을 살아내며 구성된 그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글을 읽는다는 게 단순히 글자를 읽어나가는 행위가 아닌 지은이의 생각과 철학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에, 조선시대 학자들은 자세를 바로 잡고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워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글을 읽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글 읽기

 

하지만 인쇄문화가 발달하여 무수히 많은 책이 쏟아지게 되면서 글을 대하는 진중한 자세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글이나 책에 대해 신성시하여 교조적이며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을 좋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가볍게 보게 되면서 성심성의껏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이 사라졌다는 점에선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젠 하나의 글을 여러 번 보고 깨달음에 이르러 손이 절로 춤추고 발이 절로 리듬을 밟는 흥분[手之舞之足之蹈之]을 느끼긴 쉽지 않다. 현대인에게 글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져 있었고, 책은 시험을 보기 위해서 당연히 봐야만 하는 것으로 가치와 의미가 급격하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단어는 당연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그에 대해 고민해볼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어진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기에만 급급할 뿐, 새롭게 정의를 내리거나 깨달음에 이를 수 없게 된다. ,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書自書 我自我] 갈기갈기 찢어지고 나뉘어져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됐다. 그러니 공부는 했고 책은 읽었지만, 실질적으로 나의 존재는 작아지고 인식의 지평은 협소해지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글 읽기의 한계라 할 수 있다.

 

 

 민들레 단행본 모임에 간헐적으로 참여했지만 이 모임이 재밌는 이유는 책과 마주친 사람들과 만난다는 점이다.

 

 

맛난 마주침을 위한 본질로서 글 읽기

 

이런 식으로 한계에 이르렀을 때가 어찌 보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금껏 고수해왔던 것들이 더 이상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집하던 것을 내려놓게 되고, 그렇게 텅텅 비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것이 채워질 수 있게 된다. 뉴턴이 사과나무를 보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우치던 순간이 바로 이러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고집하려는 마음과 안다는 허영이 허물어져 근본이 흔들리는 순간에야 지금껏 보아왔지만 지나쳤던 것들이 새삼스레 느껴지니 말이다.

 

이처럼 하나의 관념이 무너진 순간에 마음의 여유가 생기며, 마음이 텅텅 비니 마음 한 자락 부여잡고자 글을 읽게 되고, 글을 읽으니 저자의 이야기가 쏙쏙 들어와 마음밭에 아로새겨진다. 글은 채우기 위해서 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독했다는 위안은 얻을지언정, 글을 통한 만남이 빚어낸 깊은 여운은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한계와 직면하기 위해 읽어야 하며, 나를 비우기 위해 보아야 한다. 글을 통해 저자가 펼쳐낸 거대한 인식의 흐름에 동참하여 나의 연약함을 깨달아 겸손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흐름에 동참하는) 본질로서 글 읽기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우치다, 하루키, 칸트. 반복을 통해 창의성을 길렀다. 반복과 창의의 아이러니, 바로 그 속에 본질로서의 독서가 있다.

 

 

잘 안다고 착각했다

 

지금껏 길게 말했던 본질로서 글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 바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다.

 

웃긴 것은 이때까지 연암의 글을 여러 번 읽어왔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땐 시험을 보기 위해 뜻을 해석하기에 바쁘다고 생각한 나머지 막상 속뜻을 알려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호질(虎叱)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여지없이 비판하는 내용이었을 뿐이었고, 허생전(許生傳)은 조선 경제의 빈약함을 드러내는 내용이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정해진 정답만을 찾아가는 식으로 글을 읽었으니, 연암과 마주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지나 다시금 글로 만난 연암은 상상을 초월하는 깊이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정도전, 송시열)이 내세우는 문이재도(文以載道)글이란 자질구레한 것을 적는 용도가 아닌, 옳은 도리만을 적는 용도여야 한다적인 글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문이재도론, 조선시대의 미디어법

 

아래의 글은 문이재도적인 글이 어떤 글인지 조선의 실제 건국자인 정도전(鄭道傳, 1342~98)이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참고하여 보도록 하자.

 

 

해와 달과 별은 하늘의 무늬이고, 산과 천과 풀과 나무는 땅의 무늬이며, 시서와 예악은 사람의 무늬이다. 그러나 하늘은 기로 드러나며 땅은 형체로 드러나며 사람은 도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글이란 도를 싣는 그릇이다라고 한 것이다.

사람의 무늬가 올바른 도를 얻으면 시서와 예악의 가르침이 천하에 밝아져서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이 순조로워지고 만물이 골고루 다스려진다.

日月星辰天之文也; 山川草木地之文也; 詩書禮樂人之文也. 然天以氣; 地以形; 而人則以道. 故曰: ‘文者, 載道之器.’

言人文也, 得其道, 詩書禮樂之敎, 明於天下, 順三光之行, 理萬物之宜. -鄭道傳, 陶隱文集序

 

 

이 글에서 인간의 무늬는 글이란 양식을 통해 표현되며 그 글이 제대로 표현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천지자연의 흐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단순히 황당한 논리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글이 지닌 힘을 자각하고 있다고 보아야 맞다. 조선의 학자들은 자연과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늘 연결 지어 사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문이재도적인 글은 나름 글에 대한 하나의 관념을 체계화한 문장론이라 할 수 있다. , 하나의 문장론으로 보자면 손색이 없을 정도로 괜찮은 문장론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조선이 임란(1592~98)호란(1636~37)을 겪은 후에 소중화(小中華)를 중시하는 왜곡된 성리학이 문학의 모범으로 자리 잡으며 문이재도적인 글만 써야하고 나머지 방식의 글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 문제다. 한 가지 형식의 글이 특권적인 위치에 오르자 다른 양식의 글들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낙인찍혔을 뿐 아니라 현실적인 불이익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글의 생기발랄함은 사라져 갔고, 하나 같이 대의만을 드러낸 글만이 자리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글들은 논술 답안지처럼 정형화되어 누가 썼는지 분간이 힘들 정도로 엇비슷한 내용만을 담게 되었던 것이다.

 

 

 정도전이 문이재도론을 말했던 의도와는 달리 조선중기엔 모든 문장론을 옥죄는 기준점이 되었다.  

 

 

 

연암의 글 속엔 연암이 살아 있다

 

이런 식의 글만이 유행하던 조선 후기에 연암은 문이재도적인 글을 쓰지 않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부터 인간의 다양한 정감까지 자유롭게 써나가자는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로 글을 썼다. 물론 그의 글은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매우 유학자처럼 천리(天理)를 운운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열하일기같이 파격으로 점철되어 그의 친한 친구들까지도 받아들일 수 없어 원고를 태워버리려 했던 글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이니 연암은 정조를 비롯한 양반들에게 미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암의 글엔 연암만의 문사철이 살아 숨 쉬며 그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살아 있었다. 글이 생기 가득하여 읽는 순간 가슴이 뛰고, 유머 가득하여 절로 웃음이 나며, 삶의 절박함을 절실히 표현하여 가슴 졸이며 읽게 된다. 이쯤 되면 연암이 피력한 아프게 하지도 않고 가렵게 하지도 않고 구절마다 호황되며 우유부단하다면, 그런 글을 어디에 쓸 수 있겠는가?[不痛不癢, 句節汗漫, 優游不斷, 將焉用哉 -過庭錄4]’라는 문장관이 결코 빈말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니 연암의 글에선 연암의 뜨거운 가슴과 쿵쾅쿵쾅 뛰는 심장소리가 느껴져서 희열을 느끼며 그의 글을 탐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어찌 보면 연암의 글을 읽으며 느낀 감정을 공유하자는 취지로 쓰게 되었다. 다음 편부터는 문학의 발생조건, 그리고 그런 이론들을 토대로 연암의 글이 지닌 특징과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런 과정을 함께 하며 우린 연암 선생님을 통해 한문공부의 재미를 물씬 느끼게 될 것이다.

 

 

 열하일기는 당시의 문제작일 뿐만 아니라 절친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한 과격한 작품이었다.  

 

 

인용

만남 / 지도

1. 수단으로서의 글 읽기와 본질로서의 글 읽기

2. 작품 탄생에 관한 두 가지 관점

3. 사이에서 웃어재끼다

4. 좋은 글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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