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강아지만 반기고
득의(得意)와 실의(失意)를 담은 시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보면 중국 사람이 지었다는 「득의시(得意詩)」란 것이 있다.
久旱逢甘雨 他鄕遇故知 |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났을 때 타향에서 옛 친구를 만났을 때. |
洞房花燭夜 金榜掛名時 | 동방(洞房)에 화촉을 밝힌 첫날 밤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걸렸을 때. |
땅이 쩍쩍 갈라지는 긴 가뭄 끝에 한 줄기 시원한 소나기가 내려 거북 등 같은 논바닥을 적실 때, 모든 것이 어리둥절한 낯선 타관 땅에서 옛 친구와 약속도 없이 만났을 때, 그 기쁨이야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수줍기만 한 신부(新婦)와의 첫날 밤, 과거 급제의 방(榜)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였을 때의 설레임은 어떨까. 인간 세상의 유쾌한 득의사(得意事)를 노래한 것이다.
그러자 어떤 장난스런 사람이 여기에 잇대어 「실의시(失意詩)」 한 수를 지었다.
寡婦携兒泣 將軍被敵擒 | 과부가 아이를 데리고 우는 모습 장군이 적에게 사로 잡혔을 때. |
失恩宮女面 下第擧人心 | 은혜 잃은 궁녀의 표정 과거에 낙방한 선비의 심정. |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치는 겨울 골목에서 아이를 등에 업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과부의 모습, 위풍당당하던 기상은 간 데 없이 초라하게 적 앞에 무릎을 꿇은 늙은 장군의 처참한 심정, 임금의 발걸음이 완전히 끊긴 궁녀의 허탈한 표정, 전심전력을 다하였으나 금년에도 합격자의 명단에 끼지 못한 만년 낙방 선비의 무너지는 마음. 그 마음을 그 누가 알랴. 장난시이면서도 인생의 단면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낙제한 나를 반겨주는 유일한 존재
과거 급제가 예전 선비들에게는 초미(焦眉)의 관심사이다 보니 이를 제재로 한 시가 옛 시화(詩話) 중에 심심찮게 보인다. 청나라 원매(袁枚)는 『수원시화(隨園詩話)』에서 당청신(唐靑臣)이란 이의 「낙제시(落第詩)」를 소개하고 있다.
不第遠歸來 妻子色不喜 | 급제하지 못하고 먼 길을 돌아오니 처자의 낯빛이 반기는 기색 없네. |
黃犬恰有情 當門臥搖尾 | 누렁이만 흡사 반갑다는 듯 문 앞에서 드러누워 꼬리 흔드네. |
남편의 과거 급제만 바라보고 그간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또 낙방을 하고 터덜터덜 돌아오는 남편이 곱게 뵐 리 없다. 아내의 구박이 서운은 하지만 또 어찌하랴. 다만 충직한 황구(黃狗)만이 제 주인을 알아보고 문 앞까지 나와 꼬리를 흔들며 반갑다 한다. 찬밥 신세이기로는 저나 나나 같으니,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연민은 아니었을까. 뒤로 벌렁 누워 오랜만에 보는 주인이 반갑다고 꼬리를 흔드는 황구(黃狗)의 모습이, 이를 바라보는 주인의 씁쓸한 표정과 함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하다.
꼴도 보기 싫던 그때와 꼴조차 안 보여주려던 오늘
낙제하고 보니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내의 냉대이다. 당나라 때 두고(杜羔)가 과거에 낙방하고 집에 돌아가려 하자, 그 아내가 시를 지어 보냈다.
良人的的有奇才 | 낭군께선 우뚝한 재주를 지니시곤 |
何事年年被放廻 | 무슨 일로 해마다 낙제하고 오십니까? |
如今妾面羞君面 | 이제는 님의 낯을 뵙기 부끄러우니 |
君到來時近夜來 | 오시려든 밤중에나 돌아오시소. |
이건 숫제 협박이나 진배없다. 누구는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졌느냔 말이다. 한낮에 말고 밤중에 들어오라니, 사실 자기가 남편 얼굴 보기 민망한 것이 아니라 이웃들 볼 면목이 없다는 타령이다. 대장부가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제 집을 도둑고양이 들 듯할 수야 있으랴.
이에 발분하여 용맹정진을 거듭한 두고(杜羔)는 마침내 이듬해 과거에서 급제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엔 두고(杜羔)가 집에 들어오질 않고 밖으로만 돌았다. 이에 그 아내가 다시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良人得意正年少 | 낭군께서 뜻을 얻고 나이 한창 젊으신데 |
今夜醉眠何處樓 | 오늘 밤 어느 곳 술집에서 취해 주무시나요. |
일껏 공부 열심히 하라고 구박했더니, 보답치고는 참으로 고약하기 그지없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나온다.
상황이 바뀌면 기상도 바뀐다
궁상스럽기로 이름 난 맹교(孟郊)도 진사시(進士試)에 응거하였으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는 다시 한 해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지만 이듬해에도 역시 낙방하고 말았다. 그 답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썼다.
一夕九起嗟 夢短不到家 | 하룻밤에 아홉 번을 일어나 탄식하니 꿈길도 토막토막 집에 닿지 못하네. |
거푸 낙제를 하고 보니, 가슴에 불덩이가 든듯 하여 잠이 오질 않는다. 억지로 잠을 청해 누워보아도 울컥울컥 치미는 탄식은 또 어찌해 볼 수가 없다. 나약해진 마음에 고향 생각이 굴뚝같지만 무슨 낯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그래서 꿈에라도 가볼까 하여 잠을 청해 보아도 그나마 자주 깨는 통에 꿈길이 토막 나 집에 이르지도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던 그가 세 번째 응시에서 마침내 급제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때의 득의(得意)를 또 한 편의 시로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昔日齷齪不足誇 | 지난 날 고생을 뽐낼 것 없네 |
今朝放蕩思無涯 | 오늘 아침 툭 터진 듯 후련한 생각. |
春風得意馬蹄疾 | 봄바람에 뜻을 얻어 말발굽도 내달리니 |
一日看盡長安花 | 오늘 하루 장안 꽃을 죄다 보리라. |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더니 막상 급제 하고 보니, 종전의 고향 생각은 간 데 없고, 장안의 미희(美姬)를 끼고 놀 생각부터 급하다. 지난해의 시와 비교해 볼 때 시의 기상이 판연하여 마치 다른 사람의 시처럼 보인다.
▲ 장승업(張承業),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 19세기, 123.4X31cm, 선문대박물관.
저 개야, 짖지 마라. 달빛 환한 밤마다 동네 개들이 다 짖는다. 넓은 오동잎에 가린 달빛에 온 동네가 시끄럽다. 옛 그림의 친숙한 소재 가운데 하나다.
인용
1. 이런 맛을 아는가?
2. 시로 쓴 자기 소개서
4. 강아지만 반기고
5.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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