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三年竄逐病相仍 | 세 해의 귀양살이 병마저 들어 |
一室生涯轉似僧 | 한칸 집의 살림이 중인 양 호젓해라. |
雪滿四山人不到 | 눈 덮힌 깊은 산엔 찾는 이 없고 |
海濤聲裏坐挑燈 | 파도 소리 속에 앉아 등불 돋운다. |
고려 때 시인 최해(崔瀣)의 「현재설야(縣齋雪夜)」이다. 호방불매(豪放不羈)의 기상과 재주를 지녀 오만했던 그는 그 재주로 인하여 당시 장사감무(長沙監務)라는 한직으로 쫓겨나 있었다. 장사(長沙)는 전라도 무장(茂長)의 옛 이름이다. 궁벽한 산 속에서 지낸 세 해 동안의 삶은 젊은 날의 자부와 기개 때문에도 말할 수 없이 괴로웠을 것이다. 세상에서 완전히 버려진 느낌, 더 이상 아무 쓸모없이 잊혀져버린 듯한 생각에 그는 잠 못 이루고 있다. 육신의 병이야 약으로 고친다지만 마음의 병은 그렇지가 못하다. 2구에서는 심뇌하느라 고행하는 중처럼 비쩍 마른 모습을 처량 맞게 읊고 있다. 폭설까지 내려 사방 산이 온통 눈으로 뒤덮인 겨울에 누가 자신을 찾아올 것인가. 외부로 향한 조그만 기대마저 철저히 차단된 절대고독의 상황이 3구이다. 사람이 찾지 않는 것을 사방 산에 눈이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위안하는 시인의 기다림은 자못 안쓰럽다. 그런 중에서도 매서운 겨울바람은 집채 만한 파도소리로 모든 것을 다 날려 버릴 기세다. 시인은 결국 잠을 못 이루고 애꿎은 등불 심지만 자꾸 돋운다. 돋우지 않으면 꺼지고 말 심지, 끝만 남은 심지는 마치 형편없이 허물어져 버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투영이다. 그래서 굳이 곧추 앉아서 꺼지지 않도록 심지를 돋운다. 잠 못 이루는 것은 온 산 가득 내린 눈 때문이 아니다. 바람 소리 때문이 아니다. 온 산을 뒤덮을 만큼의 무게로 두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근심, 잊혀짐에의 절망 때문이다. 가물거리는 등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함은 혹 누군가 이 밤에라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 때문은 아니었을까. 필자는 이 시를 읽으면 언제나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로 시작되는 ‘산장의 여인’이란 노랫말이 까닭 없이 떠오르곤 한다.
서거정(徐居正)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이 시를 읽어보면 곤돈(困頓)의 기상을 볼 수 있다[讀其詩可見困頓氣象].”고 하였다. 어딘가 위축되고 초라하고 곧 허물어지고 말 것 같은 허망감이 시 전체를 감싸고 있다. 사람의 기상이 이렇듯 언어에 그대로 떠오르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결국 그는 일생 동안 이렇듯 곤궁 속에서 불우를 곰씹다가 세상을 떴다.
반면에 이런 시는 어떠한가.
帆急山如走 舟行岸自移 | 바람 머금은 돛에 산이 내달리는 듯 배가 달리니 언덕 절로 움직이네. |
異鄕頻問俗 佳處强題詩 | 낯선 고장이라 자주 풍습을 묻고 좋은 곳 만나면 굳이 시를 남기네. |
吳楚千年地 江湖五月時 | 오초(吳楚)라 천년의 예로운 땅에 강호(江湖)라 5월의 번성한 시절. |
莫嫌無一物 風月也相隨 | 빈털털이 신세라고 구박치 마오 바람과 달 동무하며 나를 쫓나니. |
고려 말 김구용(金九容)의 「범급(帆急)」이란 작품이다. 바람을 잔뜩 머금은 돛이 쏜살같이 수면 위로 미끄러지니, 배 안에서 보기는 배가 가는 것이 아니라, 양 옆의 산이 달려가고 언덕이 뒤로 밀리는 형국이다. 3구에서는 낯선 풍물을 마주하여 끊임없이 샘솟는 호기심을, 4구에서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국(異國) 땅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빼어난 경관에의 찬탄을 담았다. 5구에서 오초(吳楚)의 천년 예로운 땅을 환기시킨 것은 7.8구의 의경(意境)을 끌어들이기 위함이다. 송(宋)의 문종(文宗) 소동파(蘇東坡)도 이곳에 와서 「적벽부(赤壁賦)」를 노래하였었다. 당시 그는 이곳에 좌천되어 쫓겨와 있던 처지였다. 「적벽부(赤壁賦)」에서 소동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하늘과 땅의 사이에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나니,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터럭 하나도 취하지 말 것이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이를 얻어 소리가 되고, 눈은 이를 보아 빛깔을 이루나니, 이를 취함이 금함이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다. 이는 조물주의 다함없는 곳집이다.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寓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
바야흐로 때는 5월, 강물은 넘실댄다. 과거 영웅들의 체취 어린 산과 언덕을 지나는 감개야 남다를 수밖에 없다. 빈털털이의 처지에도 풍월(風月)을 끌어들이는 여유가 자못 거나하다.
김구용(金九容)는 고려 말의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다. 당시 친명(親明)과 친원(親元)의 갈림길에서 그는 친명(親明) 노선을 지지했고, 이로 인해 원(元)에 잡혀가 귀양 가는 도중 세상을 떴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그가 외교문서에 말 오십필이라고 쓸 것을 잘못 오천필이라고 써서, 원(元) 황제가 고려에 양마(良馬) 오천필을 바치라 했는데 바치지 못하므로 그를 운남(雲南) 대리(大理)로 귀양보냈다고 하였다. 귀양 가는 도중 악양(岳陽) 땅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위 시가 귀양길에서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쾌한 절주와 낙관적 인생관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앞서 최해(崔瀣) 최해의 작품이 보여주던 곤돈(困頓)한 기상에 견주면 얼마나 멋과 여유가 넘쳐 나고 있는가.
인용
1. 이런 맛을 아는가?
2. 시로 쓴 자기 소개서
4. 강아지만 반기고
5.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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