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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 21. 산수의 미학, 산수시 - 4. 들 늙은이의 말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1. 산수의 미학, 산수시 - 4. 들 늙은이의 말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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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들 늙은이의 말

 

 

봄날이 무르익어 숲으로 들어가면 꼬불꼬불 숲속으로 산길이 통해 있고, 소나무 대나무 서로를 비추이고 들꽃은 향기 가득 산새들은 지저귄다. 이러할 때 거문고 안고 바위 위에 올라앉아 두세 곡 연주하면 이 몸은 아득히 동중선(洞中仙) 화중인(畵中人)일세.

春序將闌, 步入林巒, 曲逕通幽, 松竹交映, 野花生香, 山禽哢舌. 時抱焦桐, 坐石上, 撫二三雅調, 幻身卽是洞中仙畫中人也.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다. 시내는 흘러가고 돌은 서 있다. 꽃은 나를 맞이하고 새는 노래 부른다. 골짜기는 메아리로 대답하고 나무꾼은 노래한다. 사방이 온통 적막해지니 내 마음 절로 한가해지네.

雲白山靑, 川行石立. 花迎鳥歌, 谷答樵謳. 萬境俱寂, 人心自閑.

 

꽃이 너무 화려한 것은 향기가 좋지 않고, 꽃에 향기 짙은 것은 빛깔이 곱지 않다. 군자는 백세(百世)토록 향기로울지언정 한때의 꽃다움은 구치 않나니.

花太麗者馨不足, 花多馨者色不麗. 故侈富貴之容者少淸芬之氣, 抗幽芳之姿者多莫落之色, 君子寧馨百世, 不求一時之艶.

 

차 익어 향기 맑을 제 길손이 찾아오니 이 아니 기쁠쏘냐. 새 울고 꽃이 질 땐 아무도 없다 해도 마음 절로 유유하다. 진원(眞源)은 맛이 없고, 진수(眞水)는 향이 없네.

茶熟香淸, 有客到門可喜. 鳥啼花落, 無人亦自悠然. 眞源無味, 眞水無香.

 

손님이 가고 나서 사립을 닫아거니 바람은 산들산들 해는 뉘엿뉘엿. 술 항아리 잠깐 열어 시()를 새로 지었을 때, 이때가 산인(山人)의 득의처(得意處)로다.

客散門扄, 風微日落. 酒甕乍開, 詩句初成, 便是山人得意處.

 

초여름 원림(園林)에서 이끼 낀 바위 앉았자니, 대 그늘엔 해도 어느새 뉘엿하고, 오동나무 그림자 사이 구름이 돌더니만, 산 구름 건듯 일어 보슬비 서늘킬래, 평상에서 낮잠 청하니 꿈속 또한 상쾌해라.

初夏園林, 隨意拂苔蘚坐石上, 竹陰漏日, 桐影扶雲, 俄而山雲乍起, 微雨生涼, 就榻午眠. 夢亦得趣.

 

마음에 맞는 벗과 산꼭대기 걸터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 지치면 바위 가에 하늘을 보고 누워 푸른 하늘 흰 구름이 반공(半空)에 떠도는 모습 보며 흔연히 유유자적.

同會心友登山, 趺坐, 浪談, 談倦仰臥巖際, 見靑天白雲飛繞半空中, 便欣然自適.

 

대나무 책상 창가에 놓고 부들자리 깔고 앉으니, 높은 뫼엔 구름 들고 그 아래론 맑은 시내. 울타리엔 국화 심고 집 뒤엘랑 원추리를. 언덕 가득 꽃이 피어 지나는 길을 막고, 버들은 대문 앞을 버티고 서있구나. 굽은 길엔 자옥한 안개 주막으로 이어지고, 맑은 강에 해가 지니 어촌(漁村)에는 고깃배라.

竹几當窓, 蒲團坐地, 高峯入雲, 淸流見底, 籬邊種菊, 堂後生萱. 花妨過塢, 柳礙移門, 曲逕煙深, 路接靑帘, 澄江日落, 船泊漁村.

 

서리 내려 낙엽 질 때 성근 숲에 들어가 나무뿌리 위에 앉으니, 나부끼는 단풍잎은 옷소매를 점찍누나. 들새는 나무 가지 사이로 사람을 구경하니, 황량하던 땅이 맑고 드넓어지네.

霜降木落時, 入疏林中, 坐樹根上, 飄飄黃葉點衣袖. 野鳥從樹梢飛來窺人, 荒涼之地, 乃反淸曠.

 

서리 진 뒤 시내 바위 물 위로 드러나고 못물은 맑고도 고요히 잔잔한데, 깎아지른 바위 절벽 고목엔 덩쿨 지고, 물에 비친 그림자를 지팡이 짚고 서서보니, 내 마음 어느새 해맑아지네.

霜降石出, 潭水澄定, 懸岩峭壁, 古木垂蘿, 皆倒影水中, 策杖臨之, 心境俱淸.

 

산에 삶이 비록 좋아도 얽매이는 마음 있으면 시장이나 진배없고, 서화(書畵)를 즐김이 우아한 일이지만 탐내는 마음 있게 되면 장사치나 다름없다. 술 마셔 취함이 즐거운 일이지만 남 하는 대로 하면 감옥이나 한 가지요, 친구와 노님이 유쾌한 일이라도 속류(俗流)와 사귄다면 고해(苦海)가 따로 없다.

山棲是勝事, 稍有繫戀則亦市朝, 書畫是雅事, 稍一貪念則亦商賈. 杯酒是樂事, 稍一徇人則亦狴牢, 好客是達事, 稍涉俗流則亦苦海.

 

오직 독서만이 이롭고 해가 없다. 계산(溪山)을 사랑함이 이롭고 해가 없다. 꽃과 대나무, 바람과 달을 감상함이 이롭고 해가 없다. 단정히 앉아 고요히 침묵함이 이롭고 해가 없다.

惟讀書, 有利而無害, 愛溪山, 有利而無害. 玩花竹風月, 有利而無害, 端坐靜默, 有利而無害.

 

문 닫아 걸고 마음에 맞는 책 뒤적이기, 문 열고 마음에 맞는 벗 맞이하기, 문을 나서 마음에 맞는 경치 찾아가기, 이것이 인간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閉門閱會心書, 開門迎會心客, 出門尋會心境, 此乃人間三樂.

 

좋은 밤 편히 쉬며 등불 밝혀 차 끓이니, 만번(萬幡)은 적막한데 시냇물은 노래한다. 이불을 덮지 않고 책장을 뒤적임, 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비바람 길에 가득, 문을 닫아 쓸어내고, 도사(圖史) 잔뜩 펼쳐 놓고 흥을 따라 꺼내 본다. 사람의 왕래 끊어 주위도 그윽하고 방도 적막함, 이 두 번째 즐거움이라. 텅 빈 산 세밑이라 눈발이 흩날리고 마른 가지 바람에 떨고 추운 새 들에 울제, 화로를 끼고 앉아 향기론 차에 술이 익어감, 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

良宵宴坐, 篝燈煮茗, 萬籟俱寂, 溪水自韻. 衾枕不御, 簡編乍親, 一樂也; 風雨載途, 掩關却掃 圖史滿前, 隨興抽檢, 絶人往還, 境幽室寂, 二樂也; 空山歲晏, 密雪微霰, 枯條振風, 寒禽號野, 一室擁爐, 茗香酒熟, 三樂也.

 

깊은 산 높은 집엔 화로 향()이 필요하지. 물러난 지 오래되면 좋은 것 다 떨어져. 늙은 송백(松栢) 뿌리와 잎, 그 열매를 짓찧어서 단풍나무 기름과 섞어 한 알 씩 태워주면 또한 청고(淸苦)함에 보탬이 있으리라.

深山高居, 爐香不可缺, 退休旣久. 佳品乏絶, 取老松柏根枝葉實擣之, 斫楓肪和之, 每焚一丸, 亦足助淸苦.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야인(野人)으로 묻혀 지낼 때, 옛 선인들의 글 가운데 마음에 와 닿는 글귀를 메모해 둔 것이 있는데, 이름하여 야언(野言)’이라 하였다. 위 인용은 이 어록 가운데 몇 개를 추려 본 것이다. 산수(山水) 속에 묻혀 사는 야인(野人)의 삶이 담백하면서도 청정하게 그려져 있다. 토막토막의 말이 행간으로 이어져 세상을 사는 지혜를 일깨워준다.

 

 

이와 비슷하게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산에 사는 즐거움을 노래한 산거집구(山居集句)연작을 무려 100수나 남겼다. 집구(集句)란 이 사람 저 사람의 시에서 한 구절 씩 따와서 새로 조립하되 운자도 맞아야 하니, 순수한 창작은 아니라도 그 노고는 창작 이상의 품이 든다. 매월당 자신도 다음과 같이 쓰게 된 이유를 이야기 했다.

 

 

성화(成化) 무자년(戊子年, 세조 13, 1468) 겨울 금오산에 있을 때, 눈 오는 밤 화로를 안고 앉았자니, 고요하여 사람의 발소리는 없었지만 바람과 대가 우수수 소리를 내어 나의 흥취를 일으켰다. 인하여 산동(山童)과 함께 재를 헤쳐가며 글자를 써서 고인(古人)의 시구를 집구하니 산거(山居)의 취미에 합당함이 있었다.

成化戊子冬, 居金鼇山, 雪夜擁爐, 寂無跫音, 風竹蕭騷, 有起予之趣. 因與山童, 撥灰書字, 集古人句有當於山居之味. 摘成一律, 仍集百詠, 與好事者共之, 丙申夏, 碧山淸隱志. -梅月堂詩集卷之七

 

 

그 가운데 두어 수를 감상해 보자.

 

亂山擾擾水籣籣 凍月觀 우뚝우뚝 솟은 산물은 휘돌고
臥對寒松手自栽 皇甫檦 손수 심은 찬 솔을 누워서 보네.
老我十年枯淡過 氷 崖 십년을 더 늙어도 담백히 지내리니
可人携手話敲推 正 齋 벗의 손을 잡고서 시를 퇴고 하리라.

 

뒤의 작은 글자가 원작자이다. 한 구절 한 구절을 짜깁기 했는데도 한 수의 의경을 자연스레 이루었다. 깊은 산속 시냇물은 계곡의 험준을 못 이겨 콸콸 쏟아져 내리며 휘감아 도는데, 그 바쁜 모습 아랑곳 않고 누워 들창 밖의 찬 솔을 바라본다. 손수 심은 소나무가 낙락장송이 되었으니, 이곳에서 보낸 세월이 만만치 않다. 그런데 시인은 여기에 다시 십년 세월을 더 보태더라도 고담(枯淡)’한 지금의 삶을 지켜가겠노라고 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이따금 마음에 맞는 벗과 더불어 시()를 퇴고하겠다 한다.

 

書卷紛紛雜藥囊 陸 游 어지러이 놓인 책에 약 주머니 뒤섞인 곳
倚床自炷水沈香 虞伯生 침상에 기대 앉아 수침향(水沈香)을 사르네.
柴扉草屋無人問 顧 萱 사립문의 초가집 찾는 이 없고
密雨斜侵薜荔牆 柳柳州 담쟁이 덩쿨 울 안으로 자옥한 비 빗겨 드네.

 

방안에는 여기저기 책들이 쌓여 있고, 천정에는 산에서 캐온 약초가 주머니 주머니 매달려 있다. 하루 종일 이책 저책 뒤적이던 주인은 피곤을 느낀다. 침상에 기대 앉아 향을 사른다. 가만히 피어오르는 향연(香烟) 속에서 그는 문득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담쟁이 덩쿨은 어느덧 자라 흙담을 덮고, 빗발이 굵어진 빗줄기만이 그가 있는 방안을 기웃거리고 있다. 적막하면서도 고즈넉한 광경이다. 정신을 맑게 씻어준다.

 

山堂靜夜坐無言 川 老 고요한 밤 산집에 말없이 앉았는데
腰脊纔酸又要眠 千 巖 등허리 시큰하니 잠을 자야 하겠구나.
正伊麽時誰會得 張九成 이때의 이 마음을 그 누가 알리
一林黃葉送秋蟬 鄭 谷 온 숲 시든 잎은 가을 매미 전송하네.

 

적막한 밤 산집에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 곧추 세워 앉은 등과 허리가 뻐근해 오기 시작하니 밤도 이슥해진 모양이다. 시름이나 분노가 있어 잠 못 이루는 것이 아니니 그저 피곤하면 자고, 깨어나면 고요히 사물을 바라볼 뿐이다. 가만히 사물을 응시하다가 제 자리로 돌아선다. 이제 눈을 좀 붙여볼까. 이렇게 중얼거리던 시인은 마음속에 무언가 와 닿는 깊고 그윽한 느낌을 가졌다. 숲은 누런 잎을 떨구고 여름내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이제는 없다.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 지여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정지용의 인동차(忍冬茶)이다. 매월당의 위 시 다음에 얹어 읽으면 좋을 법하다.

 

 

 

 

인용

목차

1. 가어옹과 뻐꾸기 은사

2. 청산에 살으리랏다

3. 요산요수의 변

4. 들 늙은이의 말

5. 가을 구름이 내 정수리를 어루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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