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산수(山水)의 미학(美學), 산수시(山水詩)
1. 가어옹(假漁翁)과 뻐꾸기 은사
天翁尙不貰漁翁 | 천옹(天翁)은 어옹(漁翁)을 받지 않으려는지 |
故遣江湖少順風 | 일부러 강호에 순풍 적게 보내네. |
人世險巇君莫笑 | 인간 세상 험하다 그대여 웃지 마오 |
自家還在急流中 | 그대 외려 급류의 한가운데 있는 것을. |
고려 김극기(金克己)의 「어옹(漁翁)」이다. 어옹(漁翁)은 순풍을 기대하고 강호에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 강호에서조차 순풍은 좀체 불 생각을 않는다. 순풍을 잔뜩 기대하고 강호를 찾은 어옹(漁翁)은 강호행(江湖行) 이전 순풍은커녕 역풍에 온갖 고초와 신산(辛酸)을 겪었음에 틀림없다. 현실의 거센 풍파를 피해 강호의 순풍 속에 안기려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강호에서 조차 순풍은 잘 불어주질 않는다.
3ㆍ4구에서 시상은 한 번 비약한다. 웃고 있는 것은 어옹이고 웃지 말라고 하는 것은 시인이다. 앞서 천옹(天翁)과 어옹(漁翁)의 대립이 시인과 어옹(漁翁) 간의 그것으로 전이되었다. 어옹은 강호에 순풍이 적은 지도 모르고, 배 위에서 인간 세상의 험난을 비웃고 있다. 반면 시인은 순풍 적은 강호에 배를 띄워 놓고 유유연하는 어옹에 대해 일종 연민의 감정을 지닌다. 그 자신 급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으면서도 인간세상을 향해 띄우는 어옹의 조소를 시인은 조소한다. 그래서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이 시를 두고 “시인들이 어부(漁父)를 읊음은 의례 그 한가한 맛을 취할 따름인데, 이 시는 그 위험을 말하였으니 반안법(反案法)이다[詩人之詠漁父, 例多取其閑味而已, 此則言其危險, 乃飜案法也].”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고려 말 당시 어지러운 현실을 고개 돌려 외면하고 강호에 묻혀 사는 것으로 고고함을 뽐내던 사이비 어옹(漁翁), 즉 속류 은사(隱士)들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당시 목은(牧隱)ㆍ도은(陶隱)ㆍ야은(冶隱)ㆍ포은(圃隱)ㆍ둔촌(遁村) 이집(李集) 등 명류들의 호에서도 알 수 있듯 고려 말의 상황은 격동하는 현실의 격랑 앞에 은둔(隱遁)의 풍조가 만연하였다. 그러나 정작 뜻 있는 이들이 다 자신의 명철보신(明哲保身)만을 위해 강호로 들어가 버리고 나면 정작 현실의 질곡은 누가 감당해낸단 말인가.
말로만 되뇌는 ‘나 돌아갈래’
송대(宋代) 곽희(郭熙)는 유명한 『임천고치(林泉高致)』 가운데 「산수훈(山水訓)」에서 이렇게 말한다.
군자가 산수(山水)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구원(丘園)에서 바탕을 기름은 항상 머무는 바이고, 천석(泉石)에서 휘파람 불며 노님은 늘 즐기는 바이며, 고기 잡고 나무하며 숨어 지냄은 늘 즐거워하는 바이고 원숭이나 학이 울고 나는 것은 항상 친하게 지내는 바이다. 티끌세상의 시끄러움과 굴레에 속박됨은 인정(人情)이 항상 싫어하는 바이나, 연하(烟霞) 자옥한 가운데 사는 신선은 인정(人情)이 늘 추구하면서도 볼 수는 없는 바이다.
그러나 사람이 저 혼자 즐겁자고 사회적 책임을 다 버려두고 이세절속(離世絶俗)하는 삶을 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임천연하(林泉烟霞)를 향한 사람들의 선망은 언제나 마음속에만 자리 잡고 있을 뿐 눈앞에 펼쳐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다못해 산수화(山水畵)를 그려 벽에 붙여 놓고 집을 나서지 않고 방에 앉아 시내와 골짝을 바라보고 원숭이 울음과 새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산광수색(山光水色)에 시선을 주며 임천(林泉)을 향한 열망을 달랜다는 것이다. 산수화(山水畵)가 흥성하게 된 원인에 대한 화가 곽희(郭熙)의 그럴듯한 진단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더럽게 보아 강호로 숨으려는 귀거래(歸去來)에 대한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구두선(口頭禪)이다. 오죽하면 옛 시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실천 없는 귀거래(歸去來)에 대한 열망을 비꼬았겠는가.
귀거래(歸去來) 귀거래(歸去來)한들 물러간 이 긔 누구며
공명(功名)이 부운(浮雲)인 줄 사람마다 알것마는
세상(世上)에 꿈 깬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지금의 은둔자들은 뻐꾸기 은자
그런가 하면 다른 꿍꿍이속을 가지고 강호에 들어와서는 귀거래(歸去來)를 실천한 양 스스로를 떠벌리는 뻐꾸기 은사(隱士)들로 적지 않았다. ‘뻐꾸기 은사’란 조선 중기의 학자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 나오는 말이다.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할 때 술래가 자기 숨은 곳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으면, 숨은 아이는 공연히 ‘뻐꾹 뻐꾹’하며 자신이 숨은 곳을 알려준다는 것인데, 이 하는 꼴이 꼭 가짜 은사(隱士)들이 방편 상 강호에 숨어 자기가 여기 숨었으니 알아 달라고 현실을 기웃기웃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꼬집은 데서 나온 말이다.
당나라 때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고 학행(學行)에만 몰두하는 불구문달(不求聞達)의 선비를 찾아 유일(遺逸)로 천거하는 제도가 있었다. 하루는 한 서생(書生)이 종종걸음으로 서울로 들어오므로 길 가던 사람이 무슨 일로 그리 바삐 가느냐고 물었더니, 서생(書生)이 “장차 불구문달과(不求聞達科)에 응거(應擧)하려 합니다.”고 했다는 우스개이야기가 있다. 『인설록(因話錄)』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 또한 명예를 향한 인간의 허망한 집착을 안쓰럽게 전해준다.
▲ 이명욱(李明郁), 「어옹한유도(漁翁閑遊圖)」, 17세기, 14.5X21cm.
대숲 우거진 물가에 배를 댄다. 지나고 보니 참 험한 세월이었다. 이 조찰한 물가에서 내 잠시 몸을 뉘었다 가리라.
인용
1. 가어옹과 뻐꾸기 은사
2. 청산에 살으리랏다
3. 요산요수의 변
4. 들 늙은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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