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요산요수(樂山樂水)의 변(辨)
공자(孔子)가 『논어(論語)』 「옹야(雍也)」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고 말한 이래로, 산수간(山水間)의 노님은 자못 철학적 의미를 담게 되었다. 주자(朱子)는 공자(孔子)의 말에 대해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두루 통하고 막힘이 없는 것이 물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의리에 편안하여 중후하여 옮기지 않는 것이 산과 같은 점이 있는 까닭에 산을 좋아한다는 것[知者達於事理而周流無滯, 有似於水, 故樂水; 仁者安於義理而厚重不遷, 有似於山, 故樂山].”이라고 풀이하였다.
자공(子貢)이 물었다.
“선생님! 군자가 큰 강물을 보면 반드시 바라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孔子觀於東流之水. 子貢問於孔子曰君子之所以見大水必觀焉者, 是何?
공자(孔子)가 말하였다.
“대저 물을 군자는 덕(德)에 비유한다. 두루 베풀어 사사로움이 없으니 덕(德)과 같고, 물이 닿으면 살아나니 인(仁)과 같다. 그 낮은 데로 흘러가고 굽이치는 것이 모두 순리에 따르니 의(義)와 같고, 얕은 것은 흘러가고 깊은 것은 헤아릴 수 없으니 지(智)와 같다. 백길이나 되는 계곡에 다달아도 의심치 아니하니 용(勇)과 같고, 가늘게 흘러 보이지 않게 다다르니 살핌과 같으며, 더러운 것을 받아도 사양치 아니하니 포용함과 같다. 혼탁한 것을 받아들여 깨끗하게 하여 내보내니 사람을 착하게 변화시킴과 같다. 그릇에 부으면 반드시 평평하니 정(正)과 같고, 넘쳐도 깎기를 기다리지 않으니 법도와 같고, 만 갈래로 구비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꺾이니 의지와 같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큰물을 보면 반드시 바라보는 것일 뿐이니라.”
孔子曰夫水, 大徧與諸生而無爲也, 似德. 其流也埤下, 裾拘必循其理, 似義. 其洸洸乎不淈盡, 似道. 若有決行之, 其應佚若聲響, 其赴百仞之谷不懼, 似勇. 主量必平, 似法. 盈不求槪, 似正. 淖約微達, 似察. 以出以入, 以就鮮絜, 似善化. 其萬折也必東, 似志. 是故君子見大水必觀焉,
한(漢) 나라 때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의 한 대목이다. 원래 『순자(荀子)』 「유좌(宥坐)」에 실려 있던 것을 유향(劉向)이 부연한 것인데, 물의 여러 속성을 들어 인간이 지녀야 할 삶의 덕목과 견주었다. 일찍이 노자(老子)도 『도덕경(道德經)』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으뜸가는 선(善)을 물에 견준 일이 있다. 물은 언제나 낮고 더러운 곳에 처하면서 만물을 이롭게 하므로, 노자는 물에서 ‘유약겸하(柔弱謙下)’의 교훈을 읽은 것이다. 또 유향(劉向)은 계속해서 지자요수(智者樂水)와 인자요산(仁者樂山)의 이유에 대해 부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인자요산(仁者樂山)의 변은 다음과 같다.
대저 산은 높으면서도 면면히 이어져 만민이 우러러 보는 바이다. 초목이 그 위에서 생장하고, 온갖 생물이 그 위에 서 있으며, 나는 새가 거기로 모여들고, 들짐승이 그곳에 깃들이며, 온갖 보배로운 것이 그곳에서 자라나고, 기이한 선비가 거기에 산다. 온갖 만물을 기르면서도 싫증내지 아니하고 사방에서 모두 취하여도 한정하지 않는다. 구름과 바람을 내어 천지 사이의 기운을 소통시켜 나라를 이룬다. 이것이 어진 사람이 산을 좋아하는 까닭이다.
동중서(董重舒)의 『춘추번로(春秋繁露)』에도 이와 비슷한 언급이 보인다. 이렇듯 한대(漢代) 이전 산수(山水)에 대한 해석은 다분히 유가(儒家)의 이념에 물들어 있었고, 사람들은 산수(山水) 간의 노님 속에서 철학적 의미를 읽으려고 노력하였다.
산이 나오고 물이 나온다고 해서 다 산수시가 아니다. 산수와 인간이 만나 나누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 내 편으로 산수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수(山水) 쪽으로 향하여 가서 어느덧 물(物)과 아(我)가 경계를 잊고 하나가 되는 동화가 있어야 한다.
滿庭月色無烟燭 | 뜨락 가득 달빛은 연기 없는 등불 |
入坐山光不速賓 | 둘러앉은 산빛은 뜻밖의 손님. |
更有松弦彈譜外 | 솔바람 악보 없는 가락 울리니 |
只堪珍重未傳人 | 소중히 지닐 뿐 전할 수 없네. |
고려 때 최충(崔沖)의 「절구(絶句)」이다. 달빛을 등불 삼아 자리를 벌리자, 청하지도 않은 손님 청산이 슬그머니 차지하고 들어와 앉는다. 손님이 왔으니 풍악이 없을 쏘냐. 솔바람은 악보로 옮길 수 없는 미묘한 곡조를 연주한다. 맑고 상쾌한 경지다. 이 거나하고 해맑은 운치를 어찌 말로 다하랴. ‘소이부답(笑而不答)’할 뿐이다.
茅齋連竹逕 秋日艶晴暉 | 띠집은 대숲 길로 이어져 있고 가을 날 햇살은 곱기도 하다. |
果熟擎枝重 瓜寒著蔓稀 | 열매가 익어서 축 쳐진 가지 참외도 달리잖은 끝물의 덩쿨. |
遊蜂飛不定 閒鴨睡相依 | 나는 벌은 쉴 새 없이 잉잉거리고 오리는 한가로이 기대어 조네. |
頗識身心靜 棲遲願不違 | 몸과 맘 너무나 고요하구나 물러나 살자던 꿈 이루어졌네. |
서거정(徐居正)의 「추일(秋日)」이다. 초가집이 한 채 있고, 그 뒤 대숲 사이로 소로길이 나있다. 가을 햇살은 지붕 위에 고운 깁을 펼쳐 얹었다. 빨갛게 익은 열매가 무겁다고 가지들은 어깨를 축 늘이고, 여름내 입맛을 돋우던 참외는 가을 서리 김에 이제는 끝물이다. 벌들은 그래도 미련이 남아 참외 덩쿨 근처에서 하루 종일 부산스럽다. 그들도 이제 겨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옆 연못에선 오리가 태평스레 목을 감고 졸고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인의 내면에 어느새 기쁨이 물오른다. 몸과 마음이 가뜬하다. 물러나 쉬자던 소원은 이제야 이루어진 것이다.
萬物變遷無定態 | 만물이 변천함은 일정함이 없나니 |
一身閒適自隨時 | 한가로이 자적하며 때를 따라 사노라. |
年來漸省經營力 | 근년 들어 사는 일은 돌보질 않고 |
長對靑山不賦詩 | 청산을 마주 보며 시도 짓질 않는다. |
이언적(李彦迪)의 「무위(無爲)」란 작품이다. 소동파(蘇東坡)는 「적벽부(赤壁賦)」에서 “대개 장차 그 변하는 것으로부터 본다면 천지는 일찍이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그 변치 않는 것으로부터 본다면 물(物)과 아(我)가 모두 다함이 없다[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能以一瞬,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고 했던가. 젊은 날 성취를 향한 집착과 작위하고 경영하던 마음을 훌훌 던져 버리고 자연의 변화에 몸을 맡겨 다만 일신(一身)의 한적(閒適)을 추구할 뿐이다. 청산은 말이 없으니 그를 보며 묵언(默言)의 마음을 배운다. 도학자의 구김 없는 마음자리가 잘 펼쳐져 있다. 낙천지명(樂天知命)의 높은 경계다.
윤선도(尹善道)의 시조 「만흥(漫興)」에 다음과 같은 작품이 있다.
잔 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옴이 이리하랴
말씀도 우움도 아녀도 몬내 됴하하노라.
술잔을 들다가 문득 먼 산이 새삼스럽게 시선에 잡힌다. 말없이 다가서는 그 품새는 마음속에 그리던 님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서 있는 듯 반갑다. 위 이언적의 시와 마찬가지로 활연(豁然)한 탈속(脫俗)의 경계를 맛보게 한다.
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 천 석 들이 저 큰 종을 보게나 크게 치지 않으면 두드려도 소리 없네. |
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 | 만고에 우뚝한 천왕봉 하늘이 울려도 울리질 않네. |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천왕봉(天王峰)」이다. 큰 종은 거기에 맞는 공이가 있어야 한다. 젓가락으로 두드려 범종의 소리를 어찌 들을까. 큰 시루를 엎어 놓은 듯, 엄청난 종을 구름 위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천왕봉은 오늘도 만고상청(萬古常靑)의 자태로 언제나 거기 서 있다. 누가 저 종을 소리 나게 울릴 수 있으랴. 하늘이 천둥 번개로 공이 삼아 꽝꽝 울려 대도 산은 요지부동(搖之不動), 끄떡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산기슭 정자에 앉아 산을 보며 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 산을 닮아간다. 산을 종으로 유비(類比)하여 바라본 발상도 재치 있거니와, 선비의 의연한 마음가짐이 범접할 수 없는 기상으로 압도해 온다.
百里無人響 山深但鳥啼 | 백리에 사람 소리 들리지 않고 산 깊어 들리느니 새 울음소리. |
逢僧問前路 僧去路還迷 | 중 만나 앞길을 물어 보고는 중 가자 다시금 길을 잃었소. |
강백년(姜栢年)의 「금강도중(金剛途中)」이다. ‘백리(百里)’라 했으니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진 길이 있겠고, 앞 쪽에는 나그네를 압도하며 금강의 봉우리들이 솟아 있겠다. 하루 종일 걸어도 아무도 만나지 못한 나그네는 자신의 걸음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반가운 중을 만나 갈 길을 거듭 확인했지만, 중이 가고 나자 길은 어느 새 사람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위 시로 그림을 그리려 할 때, 화면 속에는 시인만 그려야 옳을까, 아니면 지팡이를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는 중과 그곳을 바라보는 나를 그려야 좋을까. 또 새 울음소리는 어떻게 그려 넣을까.
▲ 정선, 「대좌관폭(對座觀瀑)」, 18세기, 58X24cm, 고려대박물관.
여보게! 저 폭포 좀 보아. 겁도 없이 제 몸을 던지네그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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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산에 살으리랏다
3. 요산요수의 변
4. 들 늙은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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