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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카자흐스탄 여행기 목차 여는 글 카자흐스탄 여행과 공감능력 1주차(알마티 한국어교육원) 13.06.14(금) 경계를 넘어서다비행기를 타고 알마티로알마티의 한국어 교육원 13.06.15(토) 정신승리란?도로 인프라와 서구중심주의긴장의 미학 13.06.16(일) 카자흐스탄의 택시고려인, 존경받는 민족이 되다카자흐스탄의 음식 13.06.17(월) 6월에 함박눈을 맞다알마티의 콕토베맛있는 걸 왜 먹질 못하니 13.06.18(화) 수수하게 밋밋하게전통과의 연결점인 유르타알마티 시내 돌아보기 13.06.19(수) - 아스타나로의 기차여행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21시간을 달리는 기차 13.06.20(목) - 아스타나 둘러보기 새 수도에 그린 꿈바이테렉과 카자흐스탄의 꿈자본의 중심지로 우뚝 서다한국문화원을 둘러보다이슬람..
68. 잃을 때, 얻는다 이런 식으로 전개될 것을 안다면, 교환이 아닌 증여의 경제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 설거지는 증여에 포함된다. 더 많은 양의 설거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좋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노동주체’를 되찾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당당한 주제’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증여로서의 설거지 설거지를 하면 내 마음에도 뿌듯한 마음이 생기며, 다른 사람에게도 따뜻한 기운을 퍼뜨린다. 그게 바로 증여 경제의 핵심이다. 증여는 ‘얼마의 가치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내가 유형ㆍ무형으로 준 것들은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좋은 기운을 주면 좋은 기운이 돌아오고, 나쁜 기운을 주면 나쁜 기운이 돌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증여로서의 설거지는 나 자신이 쌓은 선업善業인 것이..
59.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下 할머니의 성함은 지순옥으로 연세는 92세라고 했다. 1937년에 원동遠東(머나먼 동쪽)의 쁘리모르스키끄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에 살고 계셨단다. 남자들은 강제이주 전에 이미 잡혀갔기 때문에, 이 당시엔 엄마와 같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으로 가라는 교사의 지시가 있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엄마와 기차를 탔다고 한다. ▲ 카자흐스탄에 오기 전까지는 고려인에 대한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이곳에서 직접 만나고 나선 그 무지에 깜짝 놀랐다. 설국열차를 방불케하는 생존의 현장 기차는 화물칸으로 120명가량의 사람이 탔는데, 자신의 엄마는 열흘 정도 먹을 것을 가지고 탄 반면, 아무 것도 없이 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58. 고려인, 지순옥 할머니 上 오후에는 고려인 초기 정착자 중에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이 있다고 해서 찾아뵈었다.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뵐 때마다 느껴지던 감정이 지순옥 할머니를 뵈었을 때에도 느껴졌다. 가슴이 아려왔다. 위안부 문제도 그렇지만, 고려인의 이야기도 우리의 아픈 과거임과 동시에 현재 진행형인 역사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더라. ▲ 1000회가 넘게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는 수요집회(출처- 경향신문) 너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 하지만 나와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팩트fact라기보다 픽션fiction이며, 현재의 이야기이기보다 ‘과거에 그랬더라’라는 옛날이야기에 가까웠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제 초기 정착지 근처의 무덤을 둘러보며, 누군..
57. 기독교인에게 배운 진정성 관계를 맺고 끊으며, 어떤 일에 열정적으로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일련의 일들이 삶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 관계를 맺고 끊을 것인지, 어떤 일에 열정적으로 하며 어떤 일에 대충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떤 경우’와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판단 기준이 있으려면, 진정성 있게 삶을 대하고 있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 재미교포 친구들의 발표회를 보러 온 아이들. 기독교는 고려인에게 힘을 주다 여긴 감리교 연합회 소속의 교회다. 종교가 때론 사람에게 힘이 될 수 있다. 더욱이 고려인들은 이국의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온갖 핍박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필요한 건, 위로였다. 그래서 ..
55. 너의 불행이 나에겐 안도감이 아니길 그 다음으로 간 곳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내린 역인 우슈토베역이었다. 역주변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1937년 당시엔 허허벌판에 가까웠다고 했다. 우슈토베역, 너의 아픔이 나의 안도가 아니길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역이, 고려인들이 당시에 보았던 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역사적인 현장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막막함과 서글픔이 밀려오더라.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이냐?’라는 울분 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들의 참상은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에서 이야기를 듣듯, 남의 일처럼 들렸을 지도 모른다. ‘용산참사’가 났을 때,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는 ‘남의 일’처럼 들렸고 ‘그들의 일’처럼 들려 ‘안 됐다..
54. 강제 이주와 고려인 고려인들은 러시아 연해주沿海州지방에 있는 항만도시인 블라디보스톡에 모여 살았다. 그런데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강제이주 시킨 것이다. 왜 고려인을 강제이주 시켰는지에 대해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고 한다. ▲ 바슈토베의 초기 정착지. 이곳에 남은 치열한 흔적들. 스탈린이 고려인을 강제 이주한 까닭 그 하나의 카자흐스탄 민족은 유목민으로 양을 키우며 양고기나 먹고 살던 때라, 정착민인 고려인을 보내 불모지를 초원으로 개간하기 위해 보냈다는 것이다. 이 의견이 성립되려면 소련 사람에게 ‘고려인은 농경에 능한 민족’이란 관념이 있어야 하고, 선진 농법을 전파하고 싶었다면 최소한의 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보냈어야 한다. 그런데 죽던 말던 상관없다는 듯이 그냥 보내버리기에만 급급했던 ..
53. 난 조선인이요, 난 고려인이다 밥을 먹고 본격적으로 고려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떠났다. ▲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지에 가는 길. 고려인은 배신자? 아스타나에서 알마티로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같이 갔던 교육원 선생님에게 전혀 뜻밖의 말을 들었다. 한 분은 기르기스스탄에서 태어났고, 다른 한 분은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다. 고려인이 한국에 들어가 공부를 하려 하거나, 취업을 하려 하면 한국의 나이 드신 분들이 “배신자!”라며 공격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수난을 함께 겪어낸 동포이며 동변상련을 함께 해온 동지로 생각하여 반길 거라 짐작했는데, 반기긴 커녕 욕을 한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걸 보고 있으니, 임난 당시 인조가 병자호란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내빼고 항복한 후에 조선 땅에..
52. 총각김치와 노자 탈디쿠르간에서 1시간여를 달려 우슈토베ushtobe에 도착했다. 버스에 타고 이동할 때만 해도 우슈토베에 있는 고려인이 운영하는 여관에 아이들과 함께 머물며 우슈토베에서 고려인 발자취를 따라가며 카자흐스탄의 마지막 1주일을 보내는 줄만 알고 있었다. ▲ 우슈토베엔 고려인의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다른 장소, 새로운 인연 그런데 그곳은 단순한 숙박시설이 아니라, 종교시설이었다. 감리회 소속 선교사님이 세운 교회로 우리가 도착했을 땐 재미교포 학생들이 여름성경학교에 와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교회에 마련된 숙소가 아닌,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별채에서 자야 한단다. 별채는 민가를 개조한 곳이어서 아늑한 느낌이 났다. 이런 건물을 러시아식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9. 고려인, 카자흐스탄에서 존경받는 민족이 되다 박물관은 어마어마했다. 이 도시의 상징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곳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규모에 비해 볼만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카자흐스탄 전체 지도와 상징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거기서 사진을 찍으려면 200텡게를 내야 한단다. ▲ 바로 이곳이 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메인홀이다. 알마티 국립박물관 지하실엔 선사유적지, 1층엔 기획전시실, 3층엔 대통령 업적실, 다민족(터키인, 카작인, 고려인 등) 소개실, 오일대국 소개실 등이 있었다. 특히 고려인들을 소개하는 부스가 다른 민족을 소개하는 부스보다 넓으며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어서 놀랐다. 그건 그만큼 이곳에서 고려인들의 위상이 높다는 이야기이리라. ▲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