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의 모두 문제인 ‘위안부’ 문제
‘위안부’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다. 그래서 누군가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한다’며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위안부’는 ‘돈을 받고 성을 판 사람들이다’는 망언을 하기도 한다.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요시미 문건과 고노담화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정부는 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는데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되었으므로 발표하기로 했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나아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 위안소가 설치되고, 많은 수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담당했는데, 이 경우에도 감언, 강압 등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또한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에서 처참한 것이었다.
또한 전장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한다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당시 조선반도가 우리나라의 통치하에 있으며,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강압에 의한 것으로, 총체적으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실시되었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본 건은 당시의 군 관여 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낸 문제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 새롭게 그 출신지 여하를 불문하고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무수한 고통을 경험하고 몸과 마음에 걸쳐서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진 모든 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우리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까라는 점에 관해서는 유식자(有識者)의 의견 등을 참고하면서 향후에도 신중히 검토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겠다. 우리들은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하여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동일한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표명한다.
덧붙여 본 문제에 관해서는 본국에서 소송이 제기되어 있으며, 또한 국제적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으며, 정부로서도 향후 민간의 연구를 포함하여 충분히 관심을 갖겠다.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위의 내용은 ‘고노담화’로 알려진 내용의 전문이다.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일본군이 성노예를 강요했다고 시인하고 사과했다. ‘고노담화’는 어떤 양심 있는 관료에 의해 갑자기 나온 게 아니다. 고노담화가 나온 배경엔 ‘요시미 문건’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시미 문건이란 무엇인가?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쥬오대中央大 교수가 일본 방위청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군위안부를 강제 동원하는데 직접 관여했다는 문건 6점을 발견했고 이 문건을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공개했다.
▲ 일본의 만행을 만천하에 드러낸 요시미 문건.
1980년에 요시미는 위안부 자료를 처음 발견했는데, 여기엔 중국 북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참모장 오카베 나오사부로가 중국민간인을 상대로 군인들의 강간 사건이 빈발해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으니, 조속한 위안소 설치를 지시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위안소 설립목적
1. 일본군인에 의한 점령지 여성 강간 방지
2. 성병만연 방지
3. 군인들에게 ‘위안’ 제공
4. 군의 기밀 유지와 간첩 행위 방지
또한 이 문건에는 일본군이 위안소 건물을 제공하고 운영방식과 요금을 결정했으며 여성 명부와 매상 등도 일일이 확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위안부’ 문제, 과연 일본만의 문제인가?
이렇게 명백한 증거들이 곳곳에 있음에도 일본의 우파 정치인들은 맹렬히 비판하고 나섰으며 일본 정부는 성노예인 ‘위안부’를 자영업자인 ‘매춘부’로 탈바꿈시키려 혈안이 되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2012년 8월 27일엔 노다 총리가 “강제 연행 사실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았고, 일본 측 증언도 없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덧붙여 “영토 문제는 영토 문제이고, 만약 대통령이 그런 이유로 독도에 상륙했다면 이상한 얘기”라고 말했다. 그건 곧 한일간 갈등을 과거의 역사까지 끌고 가지 않고 독도문제에만 국한시키겠다는 것이 일본의 전략임을 드러낸 것이었다.
▲ 일본의 역사 왜곡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몰고 가면 일본만의 문제인 것처럼 비춰질 여지가 있다. ‘위안부’ 문제, 더 나아가 일본 식민지하에서 조선인이 당한 모든 아픔들의 원인에는 대한제국의 무책임한 관료들의 탓도 있었다. 그건 대한민국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2011년 8월 30일엔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과 관련하여 구체적 해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임을 밝혔다. ‘위안부’ 피해자 64명은 헌법재판소에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해 외교적 보호권을 행사하지 않는 국가의 부작위로 헌법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받았다”며 헌법소원을 내자 재판관 6(위헌)대 3(각하)의 의견으로 “국가의 부작위는 위헌임을 확인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온 지 일 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나 해결의지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더욱이 2012년 광복절을 즈음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였다. 독도를 사실상 세계에 분쟁지역으로 인식시켜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위안부’ 문제는 완전히 묻어버리고 만 것이다. 일본이야 다른 나라이기에 무책임한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손 치더라도, 자국의 국민을 감싸 안아야할 한국이 무책임한 것을 넘어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엔 화가 치민다.
▲ 이날은 지금은 돌아가신 김복동 할머니만 참여했었다. 함께 한 친구들이 있어 이 자리는 더욱 빛이 났고 힘이 났다.
그렇기에 우린 똘똘 뭉쳐 소릴 외친다
이렇듯 양 정부의 무관심 속에 할머니들은 하나 둘 돌아가시고 계신다. 이젠 서서히 잊혀져가는 아픈 역사이고 일본 정부는 살아있는 증거물(?)이 완전히 없어지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런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에서 KBS 라디오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지랭이와 거노
그러나 아무리 집회를 끈질기게 계속 한다 할지라도, 일본 정부는 우리의 외침이 폴리스 라인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한국 정부 또한 ‘과거의 지난 일’이라고 치부하며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조용히 묻히길 바랄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과격한 방법으로 시위를 하여 할머니들의 억울함을, 우리의 간절함을 보여주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군참에 말하기를 “부드러운 것은 굳센 것을 능히 제어할 수 있으며, 약한 것은 강한 것을 능히 제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부드러운 것은 아름다운 덕이며, 굳센 것은 사람이나 사물을 해치는 악덕이다. 약한 자는 사람이 모두 이를 돕는 것이며, 강한 자는 사람이 모두 이를 공격하는 것이다. 부드러움도 쓸 곳이 있으며, 굳셈도 쓸 곳이 있으며, 약함도 쓸 곳이 있으며, 강함도 쓸 곳이 있다. 이 네 가지를 모두 겸하여 그 마땅한 곳에 알맞게 써야 한다.
軍讖曰. 柔能制剛, 弱能制强. 柔者, 德也; 剛者, 賊也. 弱者, 人之所助; 强者, 怨之所攻. 柔有所設, 剛有所施; 弱有所用, 强有所加. 兼此四者, 而制其宜. 『三略』 「上略 2」
‘부드러움이 굳센 것을 이기며,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했다. 굳셈이나 강함으로 시위를 한다면, 즉각적인 해결책은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방법이야말로 일본이 우리에게 남긴 원한을 되물림하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원한은 복수를 낳고 복수는 원한을 낳는 무한 비극의 순환. 일본에 상처를 받은 우리들이 시위를 한다면, 그런 악순환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조용하지만 1000회가 넘도록 진행될 수 있었던 수요 집회를 지지하는 것이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는 이 말이야말로 수요 집회의 힘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에 쓰여 있던 할머니들의 외침을 같이 읽는 것으로 후기를 마무리 짓겠다.
▲ 저녁으로 '무한리필 치킨'을 먹었다. 그나마 주원이는 제몫을 해줬지만 나머진 그러지 못해 돈이 아까웠다.
“한국여성들 정신 차리시오. 이 역사를 잊으면 또 당합니다.”
“이것은 꿈이라고 불리기엔 너무 거친 악몽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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