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 없는 설움에서 집 있는 기쁨으로
2015년 12월 12일은 두 번째 이사를 한 날이다. 집을 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는 데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감회를 말하려면 2011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집 없는 설움
그 땐 취업 준비가 한창이었다. 임용을 준비하다 그만 둔 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바닥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정면돌파하던 그 때, 출판사 편집자란 직업에 끌려 그걸 준비했다. 그러려면 글쓰기부터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수유+너머’에서 진행하는 이만교 교수의 글쓰기 특강을 들으러 서울로 왔다. 4일간(토요일과 일요일에 하며 2주간) 진행되기에 잠자리를 구해야 했는데, 그다지 걱정하진 않았다. 서울에 이미 정착한 경일 선배와 세훈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 안 되려 할 땐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할지라도 좌절되게 마련이다. 다들 일이 있다며 이번엔 힘들다고 하는 통에, 그냥 현장에서 부딪혀 보기로 하고 강의에 참석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딪힐 생각을 했던 이유는 ‘수유+너머’란 곳이 집의 독점적 소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닌 곳(고미숙 저,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이란 인식이 있었고, 2009년 당시의 도보여행 때 신세를 져본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고 뒷풀이 자리에 참석하여 말할 기회를 엿보았다. 다들 사는 이야기, 공통의 관심사는 있되 친하지 않기에 겉도는 이야기만 하느라 바빴다. 한참 얘기하다가 조금 말이 적어지려는 낌새가 보여 기어코 “재워줄 수 있는 분이 있나요?”라고 외치고 말았다. 그 말은 상식을 뛰어넘는 말이고, 이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말이기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어떤 반응이 있었을까? 잠시의 침묵 끝에 한 사람이 “아직도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계신 분이 있네요.”라며 정식적인 답변을 해주기보다 비아냥에 가까운 말을 했으며, 심지어 이만교쌤은 “전주라잖아”라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그렇지 않아도 도시문화, 시골문화의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시골문화를 까고 있던 상황이라 나의 태도는 졸지에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한 시대착오적인 발언’ 정도로 밖에 취급되지 않았다. 그런 반응을 대하고나니 얼굴이 후끈거렸고,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서울역 근처의 찜질방에 가서 자야 했다(그 당시의 기록보기).
그 때 느낀 것은 ‘집 없는 설움’이었다. 도보여행 당시에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감당하려 자초한 것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그래도 무언가 남다른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라 통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던 터라, 실망이 컸다.
▲ 2011년 '수유+너머'의 경험은 이래저래 충격이었다. 글쓰기에 대한 충격과 함께 집에 대한 충격까지 말이다.
집 있는 기쁨
이처럼 서울은 ‘집 없는 설움’을 온 몸 가득 느끼게 만든 곳이었다. 그 후 운 좋게 역곡단재학교에 취직하게 되면서 서울로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10월 3일 그 날에 난 처음으로 전주가 아닌 타지에 나의 둥지를 튼 날이다.
고시원이란 곳에서 처음으로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곳은 나름 ‘프리미엄’을 표방하는 곳이었다. 그 당시 고시원은 돈은 없지만, 집이 필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인식이 강했고, 화재가 나서 죽은 사람들도 있기에 열악한 환경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내가 살게 된 고시원은 그렇게 열악한 환경만은 아니었다. 한 명이 몸을 누일 공간만 있어 비좁은 편이긴 한데, 작은 창문이 있어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었고, 샤워시설과 인터넷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 나름의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런 것보다 ‘드디어 타지에도 내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미 7월에 그런 설움을 느꼈던 터라, 겨우 3개월이 지나 서울에 몸 뉘일 곳이 생겼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았다.
그렇게 단재학교에 적응해 가고, 서울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직업은 아직도 불투명했다. 원랜 역곡에 새로운 단재학교를 만들기로 하면서 거기 교사로 채용된 것인데, 생각만큼 학생 모집이 쉽지 않아 역곡단재는 출범도 하기 전에 좌초되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다시 짐을 싸들고 내려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준규쌤은 나를 좋게 봐줘서 단재학교에 정식으로 채용될 수 있었다. 채용이 되었다는 건, 신분이 보장되었다는 것과 함께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고시원을 옮겨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한 달 보름 정도를 살았던 곳이다. 처음으로 타지에 몸 뉘일 곳이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월세 원룸, 내 집 마련의 기쁨
30년간 어머니와 함께 살며 집에 대한 걱정이 없었으며, 서울로 막상 올라왔을 때도 욱쌤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고시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나의 힘으로 내가 살 집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은 기뻤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점은 두려웠다.
11월 22일에 정식으로 채용된 후 집을 알아봐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번거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인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12월 10일에 선배와 함께 부동산을 찾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가진 돈은 하나도 없었다. 돈 한 푼 없이 서울에 올라왔고, 모을 여유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보증금이 최대한 싼 집을 알아보니, 강동구청역 근처에 바로 있더라. 그래서 그 집을 둘러보니, 3층이라는 점, 그리고 강동구청역과 가깝다는 점, 혼자 살기에 무난하다는 점이 맘에 들어 바로 계약하게 되었다. 500만원이란 보증금은 형에게 빌렸다.
걱정은 되었지만 일이 일사천리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로 인해 드디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고시원은 ‘안정된 공간’이라는 느낌보다 ‘언제든 나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 당연히 세간을 최대한 늘리지 않으려 한다. 고시원에 있던 내 물건이라 봐야 노트북 하나, 옷가지 몇 벌, 책 몇 권이 전부였을 정도였다. 그러니 12월 16일에 이사할 때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준규쌤이 차까지 빌려주어 한 번에 나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원룸은 ‘안정된 나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 서서히 세간이 늘어가고 나의 흔적이 스민 공간으로 탈바꿈해간 것이다.
사람과 공간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 공간에 사람이 살면, 어떤 식으로든 그 공간은 그 사람의 자취가 스미고 생각이 투영된 공간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공간이라도 어떤 사람이 사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분위기, 배치, 환경 그 모든 게 달라진다. 이렇기에 누군가는 부엌을 ‘인간의 확장된 외부기억’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부엌의 온갖 배치는 나만이 알기 쉽게 되어 있다. 그러니 나는 부엌에서 음식을 할 때 전혀 힘들이지 않고 내가 찾고자 하는 물건을 찾아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집에 가면 모든 활동은 제약받을 수밖에 없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뿐더러, 요리를 하기 위한 동선마저 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의 공간’이란 어찌 보면 ‘확장된 외부기억’이라 할 수 있다.
▲ 올해 4월 4일에 찍은 사진. 4년 간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공간이다. 이곳에서의 4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2. 전셋집 찾기, 버팀목 전세대출 받기
성내동 월셋집에서 나의 꿈을 하나하나 만들어갔다. 단재학교에서 적응한 것은 물론, 나의 입지를 굳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돈 한 푼 없던 상황에서 어느 정도 돈을 모으게 된 것이다. 12월이면 4년이 차는 해이기에, 이쯤에서 집을 한 번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전세로 옮길 수 있다면, 그건 두 말할 나위 없이 좀 더 숨통이 트이는 일이다.
전세로 이사하기 1 - 전세 원룸으로 이사 가기로 맘먹다
집주인은 내가 여전히 이곳에서 더 살 것으로 알고 있었나 보더라. 그러다 나간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며(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월세를 또박또박 내는 게 집주인 입장에선 최고로 감사한 일이라 한다) 월세를 조금 낮춰줄 의사를 제안했고(5만원 절약), 나갈 의사를 분명히 하자 그럼 2월까지만 살아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내 입장에선 ‘나갈 바에야 뭉그적대기보다 제 때 나가는 게 서로에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아끼는 게(월세로 나가는 돈이 아깝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사 가기 전(12월 6일)에 찍은 방의 모습. 4년 간 지지고 볶던 공간과 이렇게 작별 인사를 나눈다.
전세로 이사하기 2 - 윌리 찾기만큼 힘든 전세 찾기
2011년 당시에도 내 상황은 여의치 못했지만, 그 땐 월세 자체가 조금 높아도 상관없었기에 방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물량도 많지 않은 전세를 찾는 것뿐만 아니라, 전세자금 대출까지 받아야 하니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생각하기론 5000만원 정도의 전세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동산을 찾아가 얘기를 해봤지만, 모두 안색이 굳은 채로 ‘어렵겠다’고 얘기하더라. 그래서 6000만원~6500만원 정도의 전세로 조건을 상향하였고, 그도 여의치 않을 경우 보증금은 높더라도 월세가 20만원 정도의 집이 있으면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찾아다니는 데도, 생각보다 더 쉽지 않더라. 7000만원짜리 전셋집이 있다는 것을 듣긴 했지만 전세자금대출은 어렵다는 반응이 돌아왔고, 월세는 대부분은 30만원 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살고 있는 성내동 일대를 벗어나 경기권이나, 서울 외곽으로 가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근처에서만 찾다 보니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한 달이 넘는 시간이 남았기에 그렇게 서두르진 않았다.
▲ 전세비가 집값의 80%에 육박하게 되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반전세 또는 월세로 돌리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집 없는 설움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전세로 이사하기 3 - 조급함은 넣어둬 넣어둬
이사 가겠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주인은 원룸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그러자 부동산 아주머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집 주인이 오늘 부동산에 원룸을 내놓았으니, 언제든 손님이 오면 보여줄 수 있도록 해놔야 합니다”라고 알려주더라. 이제 원룸도 나만의 공간이 아닌, ‘언제든 떠나도록 준비해야 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당연한 변화지만 약간의 섭섭한 감정이 어렸다.
그 때 부동산 아주머니는 “지금 집을 구하지 않으셨으면 저희가 알아볼게요”라는 말씀을 하시더라. 부동산을 여러 군데 돌아다닌 터라 별 기대를 하지 않고 ‘6천~6천5백의 전셋집, 전세자금대출을 받아야함’이라고 말을 했더니, 놀랍게도 “거기에 딱 맞는 전셋집이 있어요”라고 말씀하시더라.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다른 곳에선 없다던데, 어떻게 여기는 있다는 것일까?
그래서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확인해 보았다. 신축 건물이 아닌 주택에 있는 방 하나이기에 좀 어설퍼 보였지만, 지금 원룸보다 공간도 넓고 부엌과 방이 나누어져 있는 점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너무 급작스럽게 풀리는 상황에 경계심이 생겨 바로 계약하진 않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고 다시 알아봐야 하는 건 번거롭기에 그 다음날 바로 계약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운이 지지리도 좋았다~
▲ 방만 해도 기존 원룸보다 커서 맘에 들었고, 공간들이 나누어져 있어서 좋았다. 전셋집이 순식간에 마련되었다. 운이 좋다.
전세자금대출 1 - 서류 준비
가장 구하기 어렵다던 전셋집을 어떻게든 구했다. 하지만 그건 이사의 시작일 뿐이다. 월세로 옮길 땐 500만원을 마련하는 게 힘든 부분이었는데, 이번엔 은행권 대출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힘든 부분이었다. 은행권 대출은 받아본 적도 없으며, ‘그저 잘 될 테지’라는 케세라세라의 마음가짐으로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실패할 경우, 계약금만 날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정부에선 ‘버팀목 전세대출’이란 것을 시행하고 있었다. 저렴한 이자율과 중도 상환 수수료를 없앰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꿀 수 있게 해주는 거라 한다. 준비해야할 서류들은 일반적으로 나의 신분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것(결혼 여부, 세대주인지 여부), 안정적인 수입원이 있는지, 투기목적으로 집을 구입하려는 것은 아닌지를 증명하기 위한 서류들이다.
우선 해당 은행 상담원과 통화하여 어떤 서류들이 필요한지 알아보고 난 후에, 하나하나 준비해 갔다. 다행히도 모든 서류는 인터넷으로 쉽게 발급 받을 수 있었다. 동사무소나 기관에서 발급받으면 이동시간도 상당히 들어갈 뿐만 아니라 수수료까지도 발생하는데, 인터넷 발급은 수수료도 들지 않고(건물 등기부등본만 천원의 수수료 발생) 이동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다. 이로써 순조롭게 모든 서류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은행에 가서 어떤 절차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경험해 보기만 하면 된다.
▲ 준비해야 할 서류들은 투기목적이 아닌, 본인이 살려 한다는 것을, 그리고 신용도 보증할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서류라고 할 수 있다.
전세자금대출 2 - 도전 ①, 집 근처 영업점으로 가세요
아무래도 학교에 출근을 하여 일처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 근처의 석촌역 지점을 방문했다. 내 차례가 와서 “전세자금대출을 받으러 왔습니다”라고 말을 하니, 뭔지 모르지만 좀 싫은 듯한 반응이 보인다. 아마도 전세자금대출은 은행에 이익이 되는 상품이 아닐뿐더러, 일만 번거롭기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게 아닐까 싶었다.
잠시 서류를 검토하더니, “왜 집 근처 은행도 있는데, 이 먼 곳까지 왔냐?”고 묻기에, 직장이 이 근처에 있다고 말을 했다. 한참 보더니, 건물대장엔 2층이 나누어져 있지 않은데, 계약서상엔 ‘1층 201호 한 칸 전부’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알려주더라. 건물대장과 계약서가 다른 경우가 흔히 있는데, 이럴 때는 현장을 방문하여 확인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집 근처의 지점을 방문하시면 이런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라고 정리해줬다. 이로써 첫 번째 도전은 실패했다.
전세자금대출 3 - 도전 ②, 정해진 서류는 모두 빠짐없이 있어야 한다
가까운 지점에 가면 집의 등기부 등본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하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하나가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소득금액증명’에 대한 내용 때문이다. 홈텍스에 들어가 ‘소득금액증명’을 출력하면 2010년 당시에 전주대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던 당시의 급여만 뜨기 때문이다. 단재학교에서 받은 급여가 있는데, 왜 홈텍스에선 조회가 안 되는지 모르겠더라. 급여 부분이 명확하게 서류로 증빙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걱정이 됐다. 하지만 급여 거래를 하고 있는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가는 것이니, ‘통장내역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며 두 번째 도전을 감행했다.
역시나 소득금액증명이 되지 않는다며 난처해하시더라. 그래서 “급여 통장으로 이 은행 통장을 쓰고 있으니, 그걸로 증명 가능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더니, 여기저기 알아보고 나서, “정식 서류가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잘라 말하더라. 아무래도 은행 자체의 대출이 아닌, 국민주택기금의 업무를 대리하여 처리하는 것이다 보니, FM대로 할 수밖에 없나 보더라. 거기서 두 가지 서류를 다시 준비해서 가져와야 한다고 알려줬다. ‘급여명세표’나 ‘임금대장’이 1년치가 필요하며, 결혼 여부를 확실히 하기 위해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세자금대출 4 - 도전 ③, 3번의 도전 만에 드디어 성공
다시 학교에 돌아와 초이쌤에게 ‘급여명세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랬더니 초이쌤이 뚝딱 만들어줬고, ‘가족관계증명서’는 인터넷으로 바로 인쇄할 수 있었다.
갖춰야 한다는 서류를 모두 갖추긴 했지만, 두 번의 실패로 불안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예 안 된다는 반응은 없었기에 나름 희망적이긴 했다. 서류를 챙겨 다시 가서 상담을 받아 보니, 이번엔 술술 진행된다. 어떤 부분에서도 ‘안 된다’는 말이 일절 나오지 않았다. 꼭 엄청난 검사를 받듯, 그 앞에서 마음을 쓸어내리며 그 시간을 보냈다. 서류에 문제가 없었는지, 여러 장의 서류를 내밀더라. 그래서 신나는 마음에 일필휘지하며 서류를 썼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나니, 상담원은 “확정일자 받은 서류가 필요하니 동사무소에 가서 받아 오셔야 하고, 이사 후엔 전입신고를 하여 ‘이사를 했다는 사실’이 반영된 등본을 떼어 팩스로 보내주면 된다고 하더라. 은행권 대출을 받는 것이기에 가장 많이 긴장했는데, 3번의 도전 만에 결국 성공하게 되었다. 이제 정말로 이사 가는 일만 남았다.
전세자금대출 5 - 자격과 준비물
| 내용 | |
| 자격 | ① 세대주를 포함한 전원이 무주택자 ② 배우자 포함 연소득 5.000만원 이하(신혼가구, 혁신도시 이전 대상자, 재개발 구역내 세입자 경우 6.000만원 이하) |
| 주택 | ① 임차보증금 5% 이상 지불한 임대차계약체결한 주택 ② 임차보증금 2억원 이하 ③ 전용면적 85㎡ 이하(수도권 이외 지역은 100㎡이하) ④ 오피스텔의 경우 전입신고가 되어 있어야 함 |
| 대출내용 | ① 전(월)세 계약상 임차보증금의 70% 이내 ② 수도권 - 최대 1억(다자녀가구 1.2억) / 비수도권 - 최대 8천(다자녀가구 1억), 다자녀가구: 만 19세 미만 자녀 3인 이상을 말함 |
| 준비물 | ① 신분증 ② 주민등록등본 ③ 확정일자 받은 임대차계약서 원본 ④ 임차보증금 5% 이상 납부한 지급 영수증 또는 무통장입금증 ⑤ 임차주택 건물 등기부등본(대법원 인터넷등기소 발급) ⑥ 건강보험 자격득실확인서(국민건강보험공단 발급) ⑦ 전년도 소득금액 증명원(홈텍스 발급) OR 급여명세표나 임금대장 1년치 ⑧ 가족관계증명서 |
▲ 나의 경우 보증금은 연2.8%에 해당한단다. 연소득과 전셋값에 따라 최저 2.5%~3.1%까지 세분화되어 있다.
3. 특별했던 이사, 액땜했던 이사
전셋집도 구했고, 버팀목 전세대출도 확정되었다. 이사를 가기 위한 중요한 과정은 모두 끝난 것이다.
이사하기 1 - 늘어난 세간을 위한 자구책
고시원에서 옮길 땐 짐이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짐이 제법 많아졌다. 나의 모토는 ‘도보여행을 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최대한 짐을 줄이자’는 것이었지만, 막상 살림을 하며 살다보니 조금씩 짐이 불어났다. 주방기구들 뿐만 아니라, 책들도 꽤 늘어나 혼자선 결코 옮길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처음엔 이삿날 선배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단 둘이 이사하기엔 너무 짐이 많다는 게 걸렸다. 그래서 자구책을 만들어야 했다. 계약서를 작성하던 날에 집주인 아저씨에게 “이사하기 전에 한 번 짐을 날랐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라고 넌지시 물어보니, 아저씨도 별 고민 없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러자 부동산 아주머니도 “짐 옮길 때 연락을 주면, 저희가 문 열어 드리고, 짐을 모두 옮긴 후엔 잠글게요”라고 정리해주시더라. 그 때까지만 해도 이사하기 일주일 전에 나 혼자 짐을 날라야겠다고 생각했다.
▲ 살다 보니 짐이 많이 늘었다.
이사하기 2 - 톰소여의 페인트칠과 단재영화팀의 이삿짐 나르기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단재학교 영화팀 아이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단재학교에서 4년을 근무하며 민석이와는 4년을, 현세와는 3년을, 지훈이와는 1년(그 중 1주일은 함께 생활했음)을 함께 하며 어떤 끈끈함 같은 게 생겼기 때문이다. 영화팀 특성 상 장기간 여행(도보여행, 자전거 여행, 지리산 여행)을 자주 떠나는데, 그 때문인지 편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한 번 운은 떼어보기로 작정했다.
강요나, 어떤 강압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게 “이번 주 수요일에 이삿짐을 미리 한바탕 나를 건데, 도와줄 수 있냐?”고 물으니, 민석이는 건호 말투로 너스레를 떨며 예의하던 제스처대로 집게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그래 어디 한 번 날라줄게~”라고 말했다. 지훈인 “그 날 저 피부과에 가야 해요”라며 없던 약속을 급조하여 말하더라.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기 때문에, 그런 경우 ‘하겠다’는 의사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현세는 대범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행님!”이라 말하더라. 영화팀 아이들 모두 공동의 놀이거리가 생긴 마냥 흔쾌히 승낙했고, ‘그게 뭐 대수냐?’는 식으로 편하게 받아들여줬다(영화팀 소개글 보기).
▲ 친구처럼 편해진 단재영화팀. 승빈이도 영화팀의 대선배로 어디든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경험하니 ‘톰소여의 페인트칠’이 생각났다. 벌칙으로 받은 페인트칠이 하기 싫었던 톰소여는 ‘대가’를 운운하며 떠넘기려 하지만, 그럴수록 ‘이 일은 고생스러운 일, 귀찮은 일’이란 인상만 더 커져 기피하게 될 뿐이었다. 그렇게 실패의 고배를 마신 톰소여는 결국 전혀 새로운 방법을 고안한다. 바로 페인트칠하는 게 ‘가장 재밌는 활동, 뜻 깊은 활동’이라는 인상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아래의 대화 내용을 보면 이런 변화가 잘 나타나 있다. 톰소여가 재밌게 페인트칠을 하며,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페인트칠에 열중하자, 친구들이 호기심에 몰려온다.
친구: “톰, 나도 잠깐만 해볼게.”
톰: “안 돼. 이 울타리는 우리 이모가 무척 신경을 쓰시거든 이걸 멋지게 칠할 사람은 1000명이나 2000명 중에 한 사람 밖에 없을 거라고 이모가 그러셨어.”
친구: “정말? 그럼 한번만 해볼게. 부탁이야 이 사과 한 입 줄게.”
톰: “그래? 음...아니, 역시 안 되겠어.”
친구: “통째로 다 줄게.”
솔직히 내 입장에서 보면 톰의 행동은 ‘잔꾀’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고생스러운 일’이란 관념은 그대로인데, 잔꾀를 부려 속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아예 ‘페인트칠은 재밌는 일’이라고 톰의 생각자체가 바뀌어 진정성 있는 대화를 했다면, 이 장면은 진정한 명장면이 되지 않았을까?
이삿짐 나르는 것을 이야기하다가 톰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톰의 입장이 아닌, 친구들의 입장이 단재영화팀 입장과 같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페인트칠은 ‘재밌는 일’이었던 것처럼, 단재영화팀에게 이삿짐 나르는 게 ‘함께 즐길만한 놀이거리’였으니 말이다. 물론 힘이 드는 일이긴 하지만, 함께 하면 신나는 일이 되고 함께 끝마쳤을 때 느껴지는 기쁨은 배가 된다.
▲ 톰은 잔꾀를 부린 것이고, 이게 창의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친구들에겐 좋은 영향을 끼쳤다.
이사하기 3 -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을 만나다
짐을 함께 나를 사람들도 모였겠다, 이젠 부동산에 전화하여 문만 열어달라고 하면 되었다. 그래서 부동산에 전화하여 알렸다. 뭐 저번에 집주인 아저씨가 이미 OK!를 외친 사안이라 별 다른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부동산에서 다시 전화가 걸려오더라. 내용인 즉은, ‘아저씨는 OK!했지만, 아줌마가 NO!라고 외쳤다는 것’, ‘만약 짐을 들여놨는데 일이 틀어질 경우, 어떻게 책임질 거냐? 그럴 경우 부동산에서 책임지라는 것’, ‘그래서 뭔가 확실히 해야만 짐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이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아저씨보다 아줌마가 더 파워가 세다는 것이고, 아줌마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걱정이 많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이삿날이 아니고서야 미리 짐을 옮기는 건 안 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승낙을 받았고 짐을 미리 옮겨 놓는다고 해서 서로 손해될 일은 없는데도, 그렇게 극구 반대를 하니 황당하긴 했다.
짐을 옮긴다는 건 ‘이사할 의지가 분명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짐을 옮겼는데, 만약 잔금을 치르지 못해 이사가 지연될 경우 그에 대한 손해는 나만 보게 되어 있다. 왜냐 하면, 짐이 모두 방 안에 있기에, 그걸 사용하지 못하는 나만 갑갑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덧붙여 선배는 아예 “그래도 이미 (적지 않은) 계약금을 걸고 계약을 한 것이기에 10%의 권리는 충분히 있는데, 너무 야박한 거 아니냐?”고 딱 잘라 말했다. 그 말이 이번 사태를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말이라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부동산에 충분히 계약이 파기될 일은 없다는 점을 어필하였고, 부동산에서 잘 얘기하여 짐을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이사하기 4 - 단재영화팀과 이삿짐 나르기
민석이, 지훈이, 현세에겐 이삿짐을 나르자고 말해 놓은 상황이었지만, 승빈이에겐 말하지 않았다. 고3이 되기에 어떤 부담이 될 수 있을까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나올 때, 민석이가 승빈이에게 말하기 시작하더라. ‘이삿짐을 나르면 통닭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말로 꾄 것이다. 승빈이도 그 날만큼은 바쁘지 않은지 함께 따라 나섰다.
▲ 학교가 끝나고 쉬고 싶고 물고기방에 가고 싶은데도, 친히 행차하신 의리남들. 오자마자 찬장을 뒤져 부식을 먹어치운다.
미리 짐을 싸뒀기에 아이들과 나르기만 하면 됐다. 5시 40분쯤 강동구청역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돌린 다음(아이들은 미친 듯이 오예스를 먹어댔다ㅡㅡ;;)에 본격적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월셋집에서 전셋집까지는 5분 거리이고 중간에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그게 나름 시간을 잡아먹는 요소이긴 했다. 처음에 민석이와 현세가 길을 헤매는 바람에 잠시 시간이 지연됐지만, 그 다음부턴 술술 나를 수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밤거리를 4명의 장정이 짐 하나씩을 들고 몇 번이고 왔다갔다하는 광경을 멀찍이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났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광경이니 말이다. 아이들도 자진해서 온 것이기에 불퉁대지 않고 잘 나르더라. 5번을 옮기니 싸놓은 짐들은 모두 나를 수 있었다. 거의 7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 여러 번 왔다갔다 했지만, 나를 만 했다. 왠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기쁨이 몰려오던 순간.
아이들과 짐을 나르고 있으니, 여러모로 감회가 새롭다. 이 원룸에서 산 4년이란 시간은 단재학교에서 이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우정을 쌓아온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은 이렇게 짐도 함께 옮길 수 있게 되었으니, 4년은 알짜배기 시간이었다.
원래는 통닭이나 족발, 또는 중화요리를 시켜서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민석이가 직접 매장에 가서 먹자고 하여 근처에 있는 통닭집으로 찾아갔다. 처음엔 4마리 정도 시키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우선 먹어보고 부족하면 시키자고 하여 3마리만 시키게 되었다. 음식이 부족할 땐 ‘누가 하나라도 더 먹나?’, ‘누가 닭다리만 먹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경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음식이 넉넉하니 승빈이가 “나 닭다리 하나 더 먹어도 돼?”라고 묻자, 누구 할 것 없이 “여기선 눈치 보지 말고 맘껏 먹어”라고 말할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기분 좋은 만찬이다.
▲ 일을 마친 뿌듯함으로 행복하게 저녁을 먹는 시간. 많이 먹는다고 싸우지 않아도 되니 절로 화기애애해진다.
이사하기 5 - 이삿날 액땜한 사연
12월 12일은 대망의 이삿날이다. 아침 9시 30분에 가스 검침하러 온다고 했기에 그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이사를 할 작정이었다. 검침을 하여 가스비를 냈고, 전기계량기 숫자를 한전에 알려주어 나머지 전기세를 결제했다. 이로써 남아있던 공과금은 모두 처리했다.
수요일에 대부분의 짐을 날랐음에도 무거운 짐들이 꽤 있어서 자전거를 이용하여 날랐다. 모니터 같은 무거운 짐은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자잘한 것들은 배낭을 이용해 날랐다. 짐을 모두 나르고 나니 12시더라.
전셋집은 전에 쓰던 사람이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고 함부로 살았으며, 그 사람이 이사 간 후 15일 정도 방치되어 있다 보니, 먼지가 한 가득 쌓여 있었다. 내 짐들은 먼지 더미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 먼지 더미에 올려놓은 짐. 이거 언제 다 정리하지?? 막막함에 한숨만 절로 난다.
짐은 옮겼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면적이 좁은 주방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12시에 시작해서 주방 정리를 끝내고 나니 2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방은 치울 것도 많은데, 서서히 마음이 급해지더라. 이날은 광진청소년수련관에서 영화팀이 만든 영화 2편의 상영회가 4시에 시작하기에, 나도 3시 20분엔 나가야 했다. 1시간 정도 시간이 있기에 짐을 정리하는 것까진 무리고, 방의 먼지만 제거하기로 했다. 그래서 슈퍼에 가서 물티슈를 사고 문을 열려고 번호를 누르는데, 경보음만 울리지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오전에 비밀번호를 변경한 것이 무언가 잘못되었나 보더라. 그래서 밖에서 30분 동안을 그렇게 낑낑거리며 여러 경우의 수를 모두 동원해서 눌러봤음에도 도어락은 크게 울어댈 뿐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열쇠집에 전화하여 해결해야 했다. 이런 경우 번호키를 부수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보통은 30분 정도면 열린다던데, 이중잠금이 걸려 있다며 1시간이 넘도록 고군분투하시더라. 드디어 도어락은 완전 파괴되었고 문이 열렸다. 어둠 속에 한줄기 빛이 보이듯, 문이 열리니 한 줄기 빛이라도 찾은 양 엄청 행복했다. 이삿날 액땜 제대로 했다. 시간은 이미 5시가 넘었기에 영화팀 아이들에겐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화로 알렸다.
▲ 일요일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정리하여, 드디어 정리가 모두 끝났다. 이제 진짜 사람 사는 집 같다.
이사하기 6 -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이번 이사는 여러모로 스펙터클했다. 단재 영화팀의 저력과 우정을 맛보기도 했고, 이삿날 문이 잠겨 오들오들 떨기도 했으니 말이다.
단재학교가 이전했을 때에도 썼다시피, 공간을 옮기는 건 단순히 생각하면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옮긴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 ‘장소가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가 될 수도 있다. 월셋집에서 보낸 4년은 어느 시간과도 비할 수 없이 하나하나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거기서 조금 더 나를 다듬을 수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갈무리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월셋집에서의 4년처럼 이곳에서도 그런 시간들을 보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 집보다 훨씬 좋은 여건의 집인 만큼 이곳에서 건빵의 새로운 역사는 시작된다. 기대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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