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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박지원 - 족형도위공주갑수서族兄都尉公周甲壽序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박지원 - 족형도위공주갑수서族兄都尉公周甲壽序

건방진방랑자 2019. 11. 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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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兄都尉公周甲壽序[각주:1]

 

上之九年乙巳十月二十一日朝 傳曰 錦城都尉 卽先朝儀賓[각주:2] 而最承先王鍾愛之恩 予亦致意敬禮 今日乃其回甲也 戶曹輸送衣食之物 史官存問以來 公出迎叩頭曰 賤臣感激殊恩 不知所對 日未午 上遣司謁[각주:3] 加賜錦紬貂帽 他珍錯不可勝數 日將晡 司謁又臨 宣御札及御製七言詩一章 所以褒嘉慰寵之典 雖曠世不可一得 而公乃於一日之中 自朝至晡 凡三遇焉 親戚賓客 競奔走來賀公 公輒涕泣 一一道聖恩 夜不敢寐 曉奉箋 導以細仗鼓吹 謝恩而退 於是國中莫不榮公之周甲 而慶其所遇

지금 임금 9년 을사년(1785) 1021일 아침에 임금께서 전교하시기를,

 

금성도위(錦城都尉)는 곧 선왕(先王 영조 )의 의빈(儀賓)으로서 선왕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았으므로 나 또한 마음을 다해 공경하고 예우해 왔다. 오늘은 바로 그의 환갑이니, 호조는 의복과 음식을 실어 보내고, 사관(史官)은 문안하고 오라.”

 

하셨다. 이에 공이 마중을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천신(賤臣)이 전하의 각별한 은혜에 감격하여 무어라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낮이 채 못 되어, 임금께서 사알(司謁)을 보내시어 비단과 초모(貂帽)를 더 내리시고, 그 밖에 산해진미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내리셨다. 날이 저물어 갈 때 사알이 또다시 와서 임금의 편지와 임금이 지은 칠언시(七言詩) 한 수[각주:4]를 선사했다. 그 칭찬하고 위로하는 은전이 여러 대를 두고도 한 번 얻기 어려운데, 공은 하루 동안에 아침부터 저물 때까지 무릇 세 번이나 이런 예우를 입었다. 친척과 손님들이 다투어 분주히 달려와서 공에게 하례하니, 공이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일일이 임금의 은혜를 뇌었고, 밤새 감히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날이 새자마자 전문(箋文)[각주:5]을 받들고 간소하게 풍악을 잡히고 궐내에 들어가 사은하고 돌아왔다. 이에 온 장안이 공의 환갑을 영화로이 여기고 그가 받은 예우를 경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噫 古所稱達尊者三 而乃備于公之一身矣 豈不盛歟 趾源竊甞聽士大夫之談公者曰

! 옛날에 일컬은 세 가지 달존(達尊)이 마침내 공의 한 몸에 갖추어졌다 하겠으니 어찌 훌륭하다 아니 하랴.

지원(趾源)은 사대부들이 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일찍이 들은 바 있다.

 

 

出入禁闥五十年 口不涉朝議 足不及廷紳也 自年十四 卽貴以富 未聞聲色之娛 裘馬之飾也 平生坐臥一室 而席外不設他座曰 自容其膝足矣 背後一素屛 眼前一古硯 窓下書數帙 枕邊酒半壺 及日于其中 幽閒如閨門也

대궐에 드나든 지 오십 년에 조정의 의론이라곤 입에 올린 적이 없고, 조정 벼슬아치 집에는 발 들인 적이 없으며, 열네 살부터 부귀의 몸이 되었으나 풍류나 미색을 좋아한다거나 옷치레나 말치장을 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소. 평소에 방 하나에서 기거하면서 자기 앉을 자리 외에는 다른 자리를 만들지 않고[각주:6] 방이란 제 무릎을 들일 만하면 족하다.’ 하였지요. 등 뒤에는 민병풍이 하나, 눈앞에는 묵은 벼루 하나, 창 아래는 책 두어 질, 베개맡엔 술 반 병으로, 그 속에서 나날을 보내니 고요하고 한적하기가 규방과 같습디다.”

 

 

或曰 是何足賢哉 公之從子判書迭長兩銓十餘年 公一不以私事相干 家庭之內 肅若朝廷 判書亦能敬承公志 恬約自持 終身無訿讁於世者 寔公家法之嚴也

이거야 무엇이 족히 어질다 하겠는가. 공의 조카[각주:7] 판서로서 10여 년 동안이나 번갈아 이조와 병조의 우두머리로 있었으되 공은 한 번도 사사로운 일로 청탁한 일이 없었으며, 집안이 엄숙하기가 조정과 같으니 판서 역시도 공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몸가짐이 담박하고 검약하여 끝내 세상에 비난받는 일이 없었소. 이는 실로 공의 가법이 엄하였기 때문이오.”

 

 

或曰 公之不乘命車 有以哉 位高而非具瞻之職 祿厚而無素餐之責 其心豈不曰吾駙馬也 烏得與宰相並驅 以疑國人乎 故行不呵辟 路不由中 不令國人知有己也

공이 명거(命車 임금이 하사한 수레 )를 타지 않는 데에는 까닭이 있었구려! 지위는 높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재상의 직분이 아니고, 녹봉은 후하되 소찬(素餐)[각주:8]한다는 책망이 없으니, 그 마음에 나는 한낱 부마이다. 어찌 재상과 나란히 말을 달려 국민들을 현혹하게 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행차에 벽제(辟除)도 않고, 길을 걸어도 한복판으로 가는 일이 없어서,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모르게 하였다오.”

 

 

或曰 是何足多也 先王晩節 久在違豫 公所共日趨起居之列者 何如也 地比跡班 親踈俱難 而利害係於眉睫 恩讐藏於談笑 公能遠之於聯膝之地 超然於側目之場 苟非智足自衛 禍福兩忘 能若是乎

이거야 무엇이 족히 칭찬할 만하겠는가. 선왕께서 늙마에 오래도록 병석에 계실 적에 공이 날마다 달려가 측근의 신하들과 함께 병환을 보살핀 것이 어떠하였는가? 지체가 비슷하고 같은 반열(班列)이니 가까이하기도 멀리하기도 똑같이 어려운 데다가, 눈길 한번 돌리는 사이에 이해가 갈리고 웃고 이야기하는 가운데 은혜나 원수를 감추는 법인데, 공은 무릎을 마주하고 앉은 자리에서도 소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고[각주:9], 곁눈질로 눈치를 살펴야 하는 마당에서도 초연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 진실로 그 슬기가 족히 제 몸을 지킬 만하고 화나 복을 둘 다 잊어버리지 않고서야 이럴 수 있었겠는가.”

 

 

或曰 世亦有侮公者矣 僕隷之屹然大唾者去之 視高而步濶者去之 眦濃而眵 瞿瞿褎褎 涕長連鬚者留與衣食 故市井之相訾謔軟弱 必稱某房稤奴

세상엔 또한 공을 업신여기는 자도 있었다네. 종놈들 중에 젠체하고 크게 침을 내뱉는 놈은 내쫓고, 눈을 치뜨고 활갯짓하는 놈도 쫓아내고, 눈가가 짓무르고 눈곱이 끼어 있는 놈, 쭈삣거리며 히죽히죽 웃는 놈, 콧물이 수염까지 질질 흘러내리는 놈만 남겨 두어 옷이며 밥을 주었으므로, 시정배들이 연약한 자를 서로 욕하거나 놀려 댈 때면 으레 아무 궁방(宮房)의 종놈 같다고 일컫는다지.”

 

 

或曰 世亦有怨公者矣 公甞三奉使 雖在異域萬里之遠 夙夜憧憧如在上前 則諸象譯竊相怨曰 公胡不少安于厥躳 以曁我乎 我輩之從公原隰屢矣 使事旣畢 則恒拒我輩之及門何也 使還 不以絲毫自隨 孰敢匿禁物爲機利乎

세상엔 공을 원망하는 이도 있다네. 공이 일찍이 세 번이나 왕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나갔는데, 비록 몸이 이역만리 머나먼 곳에 있으면서도 새벽이고 밤이고 조심조심하여 마치 임금님 앞에 있는 듯 조마거리니, 여러 역관(譯官)들이 서로 원망하기를 젠장, 공께선 왜 당신 몸 좀 편안케 쉬지 않으신담? 그래야 우리도 좀 쉬련만. 우리네가 공을 모시고 고생스러운 사신 길을 나선 지도 여러 번일세만, 사신 일만 끝나면 우리들이 공의 집 대문에 얼씬도 못 하게 거절하실 건 또 뭐람? 사신 일 마치고 돌아오실 때에도 실 한오라기도 몸에 지니고 오질 않으시니, 누가 감히 밀수품을 숨겨 가지고 와서 돈벌이를 하겠는가.’ 했다지.”

 

 

凡若是者 固若卓絶難行 而在公則不過得之於家傳也 吾先祖文貞公爲穆陵儀賓 昭儉以嗇福 敦禮以裕後 守拙爲全身之符 避權爲保家之經 則公之風流文章 雖不及先人 若其貴不離士 富不忘本 志亢而謙克 氣降而恥勝 則乃能追先而有餘 故向之稱公者 固不越乎三朝恩遇之境 然由公自處而視之 則不饑不寒一老儒耳

대개 이런 일들은 진실로 세상없이 훌륭하여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기지만, 공에게는 집안의 내림으로 몸에 밴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우리 선조 문정공(文貞公)[각주:10]이 목릉(穆陵 선조(宣祖) )의 부마가 되었는데, 검약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복을 아끼고, ()를 돈독히 함으로써 자손들이 번창하게 하고, 어리숙하게 행동하는 것으로써 몸을 온전히 하는 방도로 삼고, 권력을 멀리하는 것으로써 집안을 보전하는 법으로 삼았다. 공의 풍류와 문장이 비록 그러한 선조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신분이 고귀해져서도 선비의 바탕을 잃지 않고 살림이 부유해져서도 본분을 잊지 아니하며, 뜻은 높이 가지되 겸손하고 억제할 줄 알며 기세를 낮추고 남을 이기려는 마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점에서는 선조에 능히 미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예전에 공을 칭송한 사람들은 당연히 세 조정으로부터 받은 예우[각주:11]에 대해 언급하는 데에 그쳤지만, 공이 스스로 처신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보자면, 공은 그저 굶지 않고 추위로 떨지 않는 한 늙은 유자(儒者)일 뿐이다.

 

 

噫 世之嗤儒而賤士者 久矣 公之心以爲儒則吾何敢焉 我求尙志而未能也 故未甞徵諸色而顯於辭 然處尊居寵而不見其泰 宿望令聞而不易其介 雖曲謹細廉人所易忽 而公則慥慥焉六十年如一日 葢公操履端方 自然近道 精思默踐 暗合於古爾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焉者 庶幾其公之謂歟 此非趾源之私于公 誦其國人之言而爲公周甲之壽

! 세상 사람들이 유자를 비웃고 선비를 천하게 여긴 지도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공은 마음속으로, ‘남들이 나를 유자라 하면 어찌 감히 당키나 하겠는가. 나는 뜻을 고상하게 가지려고[각주:12] 애써도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도 그런 티를 안색에 나타내거나 말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은총 속에 살면서도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많은 기대와 아름다운 명성 속에서도 그 지조를 변치 않으며, 비록 자질구레한 일에 신중하고 결백한 것이 남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바일지라도 공은 착실하게 지키면서 60년을 하루같이 지내 왔다. 이는 대개 공의 지조와 행동이 단정하여 저절로 법도에 가까워진 것이요, 곰곰이 생각하고 묵묵히 실천하는 것이 저절로 옛 법도에 합치된 것일 뿐이니,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리라.” 한 것[각주:13]이 아마도 공을 두고 한 말일진저.

 

이상은 지원이 공을 두남두어 하는 말이 아니라 국민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되읊은 것이니 이로써 공의 회갑에 축수하는 말로 삼는 바이다.

 

 

議論無非叙實 字句皆有秤量 非及聞某公之風者 亦不能深識此作之爲佳

의론이 사실을 제대로 서술하지 않은 게 없으며 자자구구 저울로 무게를 단 듯이 꼭 들어맞게 썼다. 그래도 모공(某公 박명원 )의 풍모에 관해 미처 듣지 못한 사람이면 역시 이 글의 잘됨을 깊이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인용

1223

 

 

 

 

  1. 연암의 삼종형인 박명원(朴明源 : 1725~1790)을 가리킨다. 그는 14세에 영조의 셋째 딸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결혼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고 1766년, 1780년, 1784년 세 차례나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을 다녀왔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그를 따라 중국을 여행한 기록이다. 《연암집》 권3에 실린 그의 묘지명에 생애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본문으로]
  2. 儀賓: 임금의 사위인 부마도위(駙馬都尉)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司謁: 액정서(掖庭署)에 속한 관직으로 왕명(王命)의 전달을 담당한다. [본문으로]
  4. 七言詩: 《홍재전서(弘齋全書)》 권5에 ‘금성도위의 회갑에 음식물과 옷감을 보내고, 인하여 시 한 수를 받들어 보이다.〔錦城都尉周甲送食物衣資仍以一詩奉眎〕’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5. 箋文: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표(表)라 하고, 그와 구별하여 황후나 황태자, 왕이나 왕후에게 올리는 글을 전(箋 : 또는 牋)이라 한다. 주로 감사를 표하거나 위로하는 목적으로 지으며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를 취하였다. [본문으로]
  6. 청탁차 찾아오는 손님들을 물리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런 것이다. 자신의 좌석만 남기고 내객을 맞을 좌석은 두지 않는 것을 측석(側席)이라 한다. [본문으로]
  7. 박명원의 맏형 박흥원(朴興源)의 아들인 박종덕(朴宗德 : 1724~1779)을 가리킨다. 박종덕은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번갈아 맡기 십수 년이요, 이조 판서를 무릇 열여덟 차례나 지냈으나 한결같이 인선(人選)에 공평했다고 한다. 《歸恩堂集 卷10 吏曹判書朴公諡狀》 [본문으로]
  8. 尸位素餐: 온 말로, 아무 공적도 없이 봉록을 받음을 이른다. [본문으로]
  9. 영조가 위독하자 세손(世孫)인 정조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는 세력과 이를 극력 저지하려는 세력 간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박명원이 전자의 편에 확고히 섰던 사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0. 文貞公: 박미(朴瀰 : 1592~1645)를 가리킨다. 박미는 선조(宣祖)의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결혼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수학하고 장유(張維), 정홍명(鄭弘溟) 등과 교유하면서 문학에 치력하여 장유와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손꼽혔다. 문집으로 《분서집(汾西集)》 16권이 전하고 있다. [본문으로]
  11. 박명원은 실제로는 영조와 정조의 양조(兩朝)에서 각별한 예우를 받았지만,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서도 남다른 지우(知遇)를 받았으므로 이와 같이 표현한 듯하다. 《연암집》 권3에 실린 그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가 임종할 때에도 “내가 세 조정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티끌만큼도 보답한 것이 없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본문으로]
  12. 《맹자》 진심 상에서 제(齊) 나라 왕자 점(墊)이 “선비란 무슨 일을 하는가?”라고 묻자 맹자가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尙志〕”라고 답했다. 그리고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는 것은 곧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13. 《논어》 학이(學而)에서 자하(子夏)가,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이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사귀되 말에 신의가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하리라.〔賢賢 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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