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만나자
‘우리 지금 만나’ 머리말
인간관계에 있어 성격이 소심하든 대범하든, 가릴 것 없이 때론 ‘용기 백배’하고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미치도록 보고 싶거나, 싸우고 나서는 더욱 그렇다.
절절하되 강요하지 않도록
물론 이렇게 외치기 위해선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상대방에 대한 확신이다. 그저 곶감 찔러 보듯이, 강태공이 낚시 바늘 던지듯이 ‘걸려도 그만, 안 걸려도 그만’이란 자세로 해서는 안 된다. 하긴 그런 마음으로 외친다면 이미 진심이 없으니 결과야 뻔하겠지. 외치려면 ‘진심을 담아 절실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절실하되 강요하지 않으려는 빈 마음’으로 해야 한다. 내 마음을 다 보여주되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거다. 그럴 때 진심은 상대방의 마음을 파고들 거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확신ㆍ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말 좋아하면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둘째는 나에 대한 확신이다. 어찌 보면 이게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 좋아하는지? 정말 좋아하긴 하는지? 이 행동에 대해 어떤 결과가 나오건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외치는 과정에 나의 마음을 다 담아 최선을 다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고, 그런 질문들에 스스로 ‘YES!’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니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나를 알겠느냐~’(노래 가사를 개사함)라는 말처럼 자기 자신을 아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고 한다.
나의 감정에 확신을 가져라
‘게쉬탈트 상담이론(Gestalt counseling)’에 따르면 억압적인 육아 환경은 아이의 욕망을 거세하게 하여 자신이 무얼 욕망하는지 조차 모르게 한단다. 자신의 신체적인 욕망을 억압하게 되니 자신이 진정 뭘 원하는지 알 리가 없다. 그렇게 우린 나의 감정에 대해서는 무뎌져 가면서 타인의 감정, 사회의 시선에만 집중했던 거다. 그런 상태에선 더 이상 ‘우리 지금 만나’라고 확신 있게 외칠 수 없다. 내 감정을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행동까지 할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프로그램화된 기계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나에 대한 확신’이란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언지 알자는 호소에 다름 아니다. 내 마음이 확실할 때 당당히 ‘우리 지금 만나’라고 외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확신’은 전적으로 너를 너의 기준으로 보며 인정하겠다는 고백이라 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한 확신’은 나다움을 긍정하며 내가 하는 일, 내가 가는 길을 믿고 지지하겠다는 고백이라 할 수 있다.
결과는 모른다지만 과정을 따라
내가 힘주어 외쳐 우린 만났다. 과연 우리가 찐하게 연애를 하게 되었을까? 아니면 오히려 인사하며 지낼 때보다도 어색한 사이가 되었을까?
그런데 ‘우리 지금 만나’라는 말이 꼭 사랑을 고백할 때만 쓰이는 건 아니다. 사귀던 연인들이 무언가로 다투고 토라졌을 때도 해야 하는 말이니까. 솔직히 둘 다 잔뜩 화가 나있는 상태에서 만나면 더 노골적으로 상대를 비난하게 되어 그나마 있던 애정도 식어버릴 확률이 높다. 말과 말은 예리한 비수가 되어 서로의 생채기에 더 깊은 상처를 내니까.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시간을 회피하며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둘 사이의 접점은 둘에게 있는 거니까. 정말 좋아한다면 오히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일 때,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야 한다. 그럴 때 첫 표현은 당연히 ‘우리 지금 만나’일 수밖에 없다. 만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우린 다시 만나게 되었다. 서로 간에 잘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 자리에 나온 것이기에 한 발자국씩 물러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렸을 때, 손깍지 끼고 포옹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겠지. 물론 늘 해피엔딩일 수 없겠지만 상대방을 위한 마음이 있다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위기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만나
이 자료집엔 공청회에서 제시된 전공 한문 범위표에 따라 한국 산문과 시, 중국 산문과 시를 담았다. 이 자료집과 난 늘 만나야 한다. 그래서 당당히 ‘우리 지금 만나’자고 외친 것이다. 이 말 속엔 이 자료집을 믿고 따르려 하는 ‘너에 대한 확신’과 이 공부를 통해 나를 바꾸려 하는 ‘나에 대한 확신’이 있다. 하지만 ‘우리 지금 만나’라는 외침이 이 한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말 공부가 하기 싫을 때, 한문을 보는 것만으로 소위 ‘토가 나올 것’ 같을 때조차도 당당히 ‘우리 지금 만나’자고 외칠 수 있어야 하니까. 그럴 때 무언가 이루어져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과연 난 이 자료집과 연애를 한바탕 하게 될까? 아니면 짝사랑에 그치게 될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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