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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 - 근차율정이선생운(謹次栗亭李先生韻) 본문

한시놀이터/조선

정여창 - 근차율정이선생운(謹次栗亭李先生韻)

건방진방랑자 2021. 4. 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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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며 율정 이관의(李寬義)의 운에 차운하다

근차율정이선생운(謹次栗亭李先生韻)

 

정여창(鄭汝昌)

 

 

學究天人冠一時 而居陋巷不求知

聖君特召問治道 因許山林意所之 一蠹先生續集卷之一

 

 

 

 

해석

學究天人冠一時
학구천인관일시
학문은 하늘과 사람을 연구함이 한 시대에 으뜸이었지만
而居陋巷不求知
이거루항불구지
보잘 것 없는 곳에 살면서 알려지길 구하지 않았네.
聖君特召問治道
성군특소문치도
성스런 임금께서 특별히 불러 다스림의 방법을 물으시고
因許山林意所之
인허산림의소지
산림에 가려는 뜻을 허락하셨네. 一蠹先生續集卷之一

 

 

해설

이 시는 스승인 율정 이관의의 운()에 차운한 시이다.

 

이관의의 학문은 성리학을 궁구하여 당대의 으뜸이었고,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다. 성스러운 임금인 성종(成宗)이 특별히 불러 다스림의 도를 물었는데, 막힘이 없이 대답하자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이관의는 벼슬에 뜻이 없이 산림에 은거하려고 하니, 성종이 그의 뜻을 허락하였다.

 

정여창은 21살 때(1471) 이관의의 명성을 듣고 2년 동안 수학하였다. 산수(山水) 사이에 은거하여 마음을 수양하고자 한 이관의의 학행(學行)을 제자인 정여창도 따르고자 하였다. 그래서 섬진강 가에 악양정(岳陽亭)을 세우고 도를 강론(講論)하였던 것이다.

 

정여창은 시에 주력하는 사람을 꼬집어 추강냉화65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백욱은 주정장주(周程張朱)의 견해가 있고 오경에 정통하면서도 유독 시를 전공하는 선비를 뽑지 않으면서, ‘시란 성정에서 피어나는 것이니, 힘써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냐.’ 하였다. 그 뜻은, 비록 시는 못 짓더라도 덕을 갖추고 경서에 능통하면 그만이지, 허물될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鄭自勖有周朱之見, 窮通五經, 獨不取攻詩之士曰: ‘詩性情之發, 何屑屑強下工夫爲?’ 其意雖不爲詩, 德備而經通, 則亦何爲病.].”

 

해동잡록에 그의 간략한 생평(生平)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하동인데, 자는 백욱(伯勗)이며, 호는 일두(一蠹)이다. 중국 사신 장녕(張寧)이 보고 특이하게 여겨 설을 지어 이름 지어 주었다. 성품이 단정하고 침착하고 고요해서 사귀어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홀로 한훤선생(寒喧先生, 金宏弼)과는 점필재(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함께 종유하였다. 성리(性理)의 학문에 마음을 쏟았는데, 같은 무리들이 이학(理學)으로써 추앙하였다. 성종 경술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천거되어 보직되었고, 지방으로 나가서는 안음현감(安陰縣監) 벼슬을 받았다. 무오년에 사화가 일어나자, 종성(鐘城)으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중종이 명하여 우의정을 증직하고, 고을의 원으로 하여금 봄과 가을에 사당에 몸소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뒤에 문헌(文獻)이라 시호하고, 문묘(文廟)에 배향하였다[河東人, 字伯勗, 號一蠹. 華使張寧見而異之, 作說以名之. 性端沈靜, 不喜交遊, 獨與寒暄先生, 同游於佔畢齋門下. 潛心性理之學, 諸輩以理學推之. 我成廟庚戌登第, 薦補檢閱, 出拜安陰縣監. 戊午禍起, 謫鐘城, 卒于謫所. 我中廟命贈右議政, 令邑守春秋親祭其廟, 後謚文獻, 配享文廟.].”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 140~141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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