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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 화양동암상정사음(華陽洞巖上精舍吟) 본문

한시놀이터/조선

송시열 - 화양동암상정사음(華陽洞巖上精舍吟)

건방진방랑자 2021. 4. 1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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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화양동 위 거처에서 읊조리며

화양동암상정사음(華陽洞巖上精舍吟)

 

송시열(宋時烈)

 

 

溪邊石崖闢 作室於其間

계변석애벽 작실어기간

靜坐尋經訓 分寸欲躋攀

정좌심경훈 분촌욕제반 宋子大全卷二

 

 

 

 

해석

溪邊石崖闢 作室於其間 시냇가 바위 트인 곳 그 사이에 거처 만들어
靜坐尋經訓 分寸欲躋攀 고요히 앉아 경서의 가르침 찾고 한 푼 한 마디라도 오르고 싶어라. 宋子大全卷二

 

 

해설

이 시는 기유년(1669, 현종 10, 선생 63) 12월에 화양동 바위 위의 정사에서 지은 것이다.

 

송시열은 1666년 청주 침류정(枕流亭)에 우거(寓居)하다가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5곡인 운영담 위쪽에 화양계당(華陽溪堂)을 지었으며, 김사담(金砂潭) 위쪽에 작은 서재를 세워 지내면서 위의 시를 쓴 것이다.

 

송시열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정조(正祖)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고 있다.

송선생(宋先正)이 현묘조(顯廟朝) 때 흉년을 만나 쓸데없는 비용을 줄일 것을 청하였다. 그때 민유중(閔維重)이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그 일을 관장했는데 크게 원망과 비방을 받았다. 그러자 선정도 조정에 있는 것을 불안히 여겨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세속에 전하기를, 선정이 한강을 건너다가 하늘에 거위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 공물(貢物)까지 아울러 혁파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라고 했다고 하니, 옛사람이 나랏일에 마음을 다하여 한시도 잊지 못하고 일신의 이해를 계산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宋先正在顯廟朝 値歲歉 請減省糜費 其時閔維重以戶判掌其事 大致怨謗 先正亦不安於朝 竟至還鄕 而俗傳先正渡漢江 見天鵝飛 以手指之曰 吾恨未能幷罷此貢物 古人之盡心國事 慥慥不忘 不計一身利害如此].”

 

정조(正祖)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송시열의 문장 학습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장은 축적된 것이 많기 때문에 발양되는 것도 범위가 넓다. 드넓은 기세가 마치 江河가 터지듯이 거침이 없다. 그러나 일생 동안 수용(受用)한 것이 오로지 주자의 글이었기 때문에 종종 말하는 구절에 합치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주자의 문장과 합치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주자의 글만을 순수하게 배웠다고는 말할 수 없고, 또 전적으로 문장가의 법을 사용하였다고 말할 수도 없으니, 이는 일가(一家)를 이룬 선정의 법이라 할 것이다. 후세의 문자는 그 글을 읽고서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 글이 적은데, 이 문집은 비록 백 년 뒤인 지금까지도 문기(文氣)가 넘쳐 사람에게 압박해 오니, 물어보지 않고도 송 선정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先正文正公宋時烈文章 惟其積之也厚 所以發之也博 浩瀚滂沛 如決江河 而一生受用 專在紫陽書 故種種句語間 自有不期合而暗合處 然不可謂純學朱書 亦不可謂全用作家法 自是先正一家之則也 後世文字 鮮有可以讀其書想其人 而至若是集 雖在百載之下 文氣尙汪汪逼人 不問可知爲宋先正之文也].”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 225~226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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