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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상권 88. 퇴계 선생의 선비화 시가 불편한 사람들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상권 88. 퇴계 선생의 선비화 시가 불편한 사람들

건방진방랑자 2021. 10. 2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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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의 선비화 시가 불편한 사람들

 

 

앞선 후기에서 공부란 여러 자료를 참고하며 제대로 알고자 하는 노력이다라고 했듯이 소화시평권상 88도 다양한 측면에서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지만 퇴계의 시에서 스님의 말을 어느 부분까지 볼 것인지도 명확해진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잠시 살펴보고 가야 할 게 있다. 영주 부석사의 어느 암자 처마 아래엔 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건 예로부터 의상대사가 좌선을 하기 위해 꽂아둔 석장이 어느새 뿌리가 내리더니 무럭무럭 자라나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 나무다. 바로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흘러오는 얘기이고 그런 기이한 이야기에 감동한 퇴계는 시까지 지으며 뒷받침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퇴계야말로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유학자 중에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유교철학을 가감 없이 펼쳐냈던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퇴계의 시를 보면 지극히 불가적인 생각을 승인해주는 형식으로 쓰여 있는데, ‘비와 이슬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무럭무럭 자라났다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나도 교수님이 다양한 글을 제시해주기 전까지는 퇴계의 시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양한 글들을 보니 유학자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들, 특히나 대선배이자 유학의 근본을 설파한 퇴계 선생께서 유학의 근본을 거부하고 불가를 승인한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음을 어느 정도는 엿볼 수 있게 되더라.

 

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와 이슬의 도움을 받아서 나무는 자라야 하는 거였다. 비와 이슬이란 곧 천지자연의 이치이며, 그건 달리 말하면 임금의 하해와 같은 은혜이기도 하니 말이다. 모든 만물은 천지자연의 흐름에 따라 생성되고 자라나며 죽어야 하고, 사람은 임금의 은혜를 받아 성장하고 죽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부석사의 선비화는 그런 자연적인 흐름을 거부하고 부처님의 은혜로 자라고 있으니 유학자들에겐 눈엣가시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고, 그걸 승인해준 퇴계선생이 매우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봄볕과 단비春陽時雨’는 유학의 중요한 메타포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선비화에 대한 수많은 글들이 나오게 되었다. 이해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불가의 입장에서 선비화를 인정해주는 방식과 다른 하나는 유가의 입장에서 퇴계의 글을 비판적으로 보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3~4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따라 두 방식은 갈라진다고 할 수 있다. 2구에서 스님의 말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는 것엔 이론이 없었다. 하지만 과연 스님의 말이 2구에서 끝나는 것으로 볼 것인지, 4구까지 쭉 이어지는 것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불가적인 입장이냐, 유가적인 입장이냐가 갈리게 된다.

불가적인 입장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2구만 스님의 말로 봐야하며, 그 스님의 말에 대해 3~4구에서 작가가 승인해주면서 역시나 부처님의 은혜로 우로의 은택을 입지 않고도 지팡이가 나무로 성장했군요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려 한다. 이러한 견해를 지닌 사람은 박지원신좌모. 박지원은 아예 선비화를 훼손한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를 예로 들며 우연히 글을 지어 불성실하고 경박한 무리들인 젊은이들의 경계를 삼는다[偶書之爲浮薄曺年少戒].”라고 결론짓고 있으며, 신좌모는 해마다 꽃과 잎사귀 피고 지며 우로의 적심에 힘입지 않고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네[年年花葉長開落 不藉沾濡報佛恩].”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유가적인 입장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3~4구의 말을 작자의 생각으로 인정해선 안 된다고 본다. 그건 스님의 계속 이어하는 말로 치부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 다음에 생략되어 있지만 어디서 그런 뻥카를이란 생각을 날릴 수 있으니 말이다. 바로 이런 유가적인 입장을 지닌 사람은 안정구구봉령이라 할 수 있다. 안정구는 퇴계 선생의 시는 불가를 비웃은 것이다[陶山詩語笑禪門].”라고 초장부터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냈으며, 구봉령은 퇴계선생의 시는 다만 망령되고 허탄한 실체를 배척하고 사람들이 혹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先生詩, 只斥其妄誕之實, 而人或不察故].”라고 결론지으며 미혹되지 말기를 촉구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어디까지 볼 것이냐에 따라 시의 내용이 확 달라지는 경우는 권하 3에서 이미 봤었다. 이 시와 권하 3의 시를 함께 참고하여 보면 한시의 재미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가적인 입장 불가적인 입장
안정구, 구봉령 박지원, 신좌모, 홍만종
퇴계의 시는 불가를 비웃은 것. 퇴계의 시는 불가를 승인해준 것.
처마 밑의 흙도 우로 받은 것이기에 나무는 결국 우로의 힘으로 자란 것이다. 나무는 어떤 외부적인 도움 없이 부처의 힘으로만 자랐다.
擢玉森森倚寺門, 僧言卓錫化靈根.
杖頭自有曹溪水, 不借乾坤雨露恩.”
擢玉森森倚寺門, 僧言卓錫化靈根.”
杖頭自有曹溪水, 不借乾坤雨露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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