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賜祭)를 드리며 조정을 찬양한 정유길의 시
『소화시평』 권상 89번에 처음에 소개된 시가 바로 이런 유형의 시다. 조정에 아부하기 위해 자신의 나태함을 나타낸다던지, 아예 조정이 없는 모습을 표현한다던지하는 두 가지 방식 외에 정유길의 이번 시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聖朝枯骨亦沾恩 | 성스런 조정이라서 마른 뼈가 또한 은혜를 입고, |
香火年年降塞門 | 향불 해마다 변방에 내리네. |
祭罷上壇風雨定 | 제사 마친 제단에 오르니 바람과 비는 멎고 |
白雲如海滿前村 | 흰 구름은 바다처럼 앞마을에 가득 찼구나. |
그건 1구에서부터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성스런 조정이라서 마른 뼈가 또한 은혜를 입고[聖朝枯骨亦沾恩]’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첫 구절만 읽어도 이 시가 지향하는 바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고, 또 하나의 단서인 ‘마른 뼈[枯骨]’라는 걸 통해 두 가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하나는 극성(棘城)이란 곳이 적을 방어하다 죽어간 병사들의 뼈가 묻힌 곳이기에 그들에게 임금의 은혜가 미쳤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는 반면에, 다른 하나는 바로 자기 자신을 비유하는 말로 보아 미천한 자신에게까지 임금의 은혜가 미쳤다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가지는 은혜가 미치는 대상이 다르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어찌 되었든 임금의 은혜가 세상 어느 곳 가리지 않고 이른다는 점에서 극도로 찬양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이 구절이 처음엔 명쾌하게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건 ‘성스런 조정[聖朝]’과 ‘마른 뼈[枯骨]’가 완전히 상반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성스런 조정이 성립되려면 ‘피둥피둥 살찐 백성’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의 내용이 나와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도 도무지 이 두 상반된 이미지를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더라. 그래서 초반엔 얼버무리며 ‘성스런 조정의 마른 뼈가 또한 은혜로 적시어’라고 퉁치며 넘어갔었다. 그런데 역시나 해석을 할 때 교수님도 이 부분에 대해 물어보더라. 이 부분을 분명히 해야만 이 시의 이미지가 확실히 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생각이 나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는데 지인이가 확신에 찬 어조로 “‘성스런 조정이라서’라고 해야 하는 건가요?”라고 말한다. 그 말은 즉 이 두 가지를 인과 관계로 묶어야 한다는 소리였고, 그 말을 듣고 다시 1구를 보니 역시 그렇게 봐야 훨씬 매끄럽게 해석이 되었다. 즉, ‘성스러운 조정이기 때문에 한낱 미천한 마른 뼈에게까지 은혜를 적셔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聖朝枯骨亦沾恩 | |
성스런 조정의 마른 뼈가 또한 은혜로 적시어 | 성스런 조정이라서 마른 뼈도 또한 은혜를 입고, |
그 다음에 4구에서 ‘흰 구름이 앞마을에 가득 찼네[白雲如海滿前村]’라는 구절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피상적으로 그 구름은 상서로운 구름이고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 참 = 좋은 징조’ 정도로 이해가 됐었는데 교수님은 아예, ‘백운(白雲) = 성은(聖恩)’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해줬다. 구름을 통해 시인은 임금의 은혜가 바로 지금 여기에 가득 찬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조정을 찬양하는 세 번째 방식도 알게 됐다. 임금이 내려준 제사, 그리고 그 제사를 드리며 임금의 은혜를 감사해 하며 조정을 찬양하는 방식 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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