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서예를 배우는 것에 대해 논하다
시학론(詩學論)
박제가(朴齊家)
박제가가 생각하는 시의 등급
吾邦之詩, 學宋ㆍ金ㆍ元ㆍ明者爲上, 學唐者次之, 學杜者㝡下. 所學彌高, 其才彌下者何也?
두보나 당풍(唐風)이 아닌 최근의 시를 배워야 하는 이유
學杜者知有杜而已, 其他則不觀而先侮之, 故術益拙也. 學唐之弊, 同然而小勝焉者, 以其杜之外, 猶有王ㆍ孟ㆍ韋ㆍ柳數十家之姓字存乎胸中, 故不期勝而自勝也. 若夫學宋ㆍ金ㆍ元ㆍ明者, 其識又進乎此矣. 又况博極羣書, 發之以性情之眞者哉? 由是觀之, 文章之道, 在於開其心智, 廣其耳目, 不繫於所學之時代也.
박제가가 생각하는 서예의 등급
其於書也亦然. 學晉人者㝡下, 學唐ㆍ宋以後帖者稍佳, 直習今之中國之書者㝡勝. 豈晉人ㆍ唐ㆍ宋之書, 不及今之中國者耶?
지금의 서예를 배워야 하는 이유
代遠則摸刻失傳. 生乎外國則品定未眞, 反不如中國今人之書之可信而易近, 古書之㳒, 猶可自此而求也. 夫不知搨本之眞贋, 六書金石之原委, 與夫筆墨變化流動自然之軆勢, 而規規然自以爲晉人也二王也. 不幾近於盡廢天下之詩, 而膠守少陵數十篇之勾字, 以自陷於固陋之科者耶?
현재의 것을 무시하고 과거만 배우는 행위를 비판하다
夫君子立言, 貴乎識時. 使余而處中國則無所事於此論矣. 在吾邦則不得不然者, 非其說之遷也, 抑勢之使然也.
或曰: “杜詩ㆍ晉筆, 譬諸人則聖也, 棄聖人而曰‘學於下聖人者’耶?” 曰: “有異焉. 行與藝之分也, 雖然畫地而爲宮曰‘此孔子之居也.’ 終身閉目, 不出於斯, 則亦見其廢而已矣. 若夫文章, 古今升降之槩, 風謠名物同異之得失, 在精者自得之, 殆難與人人說也.”
上之五年辛丑初冬, 葦杭道人書于兼司直中. 『貞蕤閣文集』 卷之一
해석
박제가가 생각하는 시의 등급
吾邦之詩, 學宋ㆍ金ㆍ元ㆍ明者爲上,
우리나라의 시는 송ㆍ금ㆍ원ㆍ명을 배운 사람이 최상이 되고
學唐者次之, 學杜者㝡下.
당시풍을 배운 사람이 그 다음이며, 두보를 배운 사람이 최하위다.
所學彌高, 其才彌下者何也?
배운 것이 더욱 높아질수록, 그 재주가 더욱 낮아지는 건 왜일까?
두보나 당풍(唐風)이 아닌 최근의 시를 배워야 하는 이유
學杜者知有杜而已,
두보를 배운 사람은 두보만 알 뿐이요,
其他則不觀而先侮之, 故術益拙也.
그 나머지는 보지도 않고 먼저 까대기 때문에 재술(才術)이 더욱 졸렬하다.
學唐之弊, 同然而小勝焉者, 以其杜之外,
당의 폐단을 배워 똑같지만 조금 나은 것은 두보 외에
猶有王ㆍ孟ㆍ韋ㆍ柳數十家之姓字存乎胸中,
오히려 왕유ㆍ맹호연ㆍ위응물ㆍ유종원의 수십 명 시인의 성(姓)과 자(字)가 가슴 속에 있기 때문에
故不期勝而自勝也.
나을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낫다.
若夫學宋ㆍ金ㆍ元ㆍ明者, 其識又進乎此矣.
송ㆍ금ㆍ원ㆍ명을 배운 사람 같은 경우는 식견이 또한 이들보단 낫다.
又况博極羣書, 發之以性情之眞者哉?
또한 하물며 널리 여러 책을 연구하여 성정(性情)의 참됨을 발현한 사람이라면 오죽하겠는가.
由是觀之, 文章之道, 在於開其心智,
이런 사실을 종합하여 보면 문장의 도는 자신의 마음과 지혜를 열고,
廣其耳目, 不繫於所學之時代也.
귀와 눈을 확장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배운 시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박제가가 생각하는 서예의 등급
其於書也亦然.
서예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學晉人者㝡下, 學唐ㆍ宋以後帖者稍佳,
진나라 사람을 배운 사람이 최하위이고 당ㆍ송 이후의 문서를 배운 사람이 조금 나으며,
直習今之中國之書者㝡勝.
곧 지금의 중국의 서예를 익히는 사람이 가장 낫다.
豈晉人ㆍ唐ㆍ宋之書,
어째서 진나라 사람이나 당ㆍ송의 서예가
不及今之中國者耶?
지금 중국의 서예에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의 서예를 배워야 하는 이유
代遠則摸刻失傳.
시대가 멀어지면 모방하고 본뜰 게 사라진다.
生乎外國則品定未眞,
더욱이 외국에서 태어났다면 우열을 판정한 것【品定: 품질이나 우열을 가려서 판정함.】이 진실이 아니어서
反不如中國今人之書之可信而易近,
도리어 지금 중국 사람들의 서예가 믿을 만하고 쉽게 친근하며,
古書之㳒, 猶可自此而求也.
옛 서예의 자취를 오히려 여기서부터 구할 수 있는 것만 못하다.
夫不知搨本之眞贋, 六書金石之原委,
무릇 본뜬 문장의 진위, 6서와 금석의 본말【原委: 본말】,
與夫筆墨變化流動自然之軆勢,
필묵의 변화하고 흘러 움직인 자연스런 시체를 알지 못하고
而規規然自以爲晉人也二王也.
얼빠진 모양【規規: 얼빠진 모양, 식견이 좁은 모양】으로 스스로 ‘진나라 사람이다’, ‘왕희지ㆍ왕헌지다’라고 생각한다.
不幾近於盡廢天下之詩, 而膠守少陵數十篇之勾字,
이것은 천하의 시를 모두 없애고 두보의 수십 편 문장을 지켜
以自陷於固陋之科者耶?
스스로 고루한 법칙에 빠져든 것과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현재의 것을 무시하고 과거만 배우는 행위를 비판하다
夫君子立言, 貴乎識時.
군자의 입언(立言)은 때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使余而處中國則無所事於此論矣.
나로 하여금 중국에서 태어나게 했다면 이런 논의를 일삼을 것이 없었으리라.
在吾邦則不得不然者,
우리나라에 있기에 부득불 그러한 것은
非其說之遷也, 抑勢之使然也.
논설이 달라져서 그런 게 아니라, 기세가 그러한 것이다.
或曰: “杜詩ㆍ晉筆, 譬諸人則聖也,
어떤 사람은 말한다. “두보의 시와 진나라의 서예는 사람에 비유하면 성인이다.
棄聖人而曰‘學於下聖人者’耶?”
성인을 버리고 ‘아랫 성인을 배우자’라고 하는 것인가?”
曰: “有異焉. 行與藝之分也,
나는 말한다. “다르다. 행동하는 것과 서예의 분별 때문이다.
雖然畫地而爲宮曰‘此孔子之居也.’
비록 그러나 땅에 금을 긋고 집을 만들고서 ‘여긴 공자의 집이다.’라고 하며,
終身閉目, 不出於斯, 則亦見其廢而已矣.
종신토록 눈을 감고 여기서 벗어나질 않는다면, 또한 폐허가 됨을 볼 수 있을 뿐이다.
若夫文章, 古今升降之槩,
문장 같은 경우는 고금의 융성함과 쇠퇴한 줄거리와
風謠名物同異之得失,
풍요(風謠)와 명물(名物)의 같고 다름에 따른 득실을
在精者自得之,
정밀한 사람이 스스로 그것을 터득하는 것에 달려 있으니,
殆難與人人說也.”
거의 사람들과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上之五年辛丑初冬, 葦杭道人書于兼司直中. 『貞蕤閣文集』 卷之一
정조가 즉위한 지 5년인 신축(1781년) 초겨울에 위항도인이 겸사에 숙직하며 쓰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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