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따라 간 당신, 봄 따라 오시라
이자겸의 난으로 개성은 풍비박산이 났고 그에 따라 고려의 국운을 걱정하던 사람들이 천도 운동을 벌이게 된다. 묘청과 정지상의 무리들은 서경인 평양으로 천도하자고 말했고, 개성에서 완벽한 세력들을 구축한 김부식을 위시한 권문세족은 반대를 했다.
▲ 묘청은 수도 이전을 하고 독자적인 고려의 연호를 쓰자는 제안을 한다.
김부식과 정지상의 재밌는 일화
하지만 맘대로 되지 않자, 묘청은 반란(1135)을 일으켰고, 총사령관 김부식에 의해 제압당했다. 그리고 함께 가담했다는 근거 없는 혐의를 씌워 개성에 있던 정지상을 붙잡았고 목숨을 앗아 갔다. 당연히 현실의 승자는 김부식이었지만, 민중들은 승자의 편만을 들진 않았다. 수많은 민담을 통해 정지상을 되살려냈고, 김부식은 정지상의 시재가 부럽고 질투가 나서 죽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김부식에 의해 죽임 당한 정지상은 음귀가 되었다. 김부식이 ‘버드나무 천 가지 푸르며, 복숭아꽃은 만 개가 붉네.’라고 읊자, 공중에서 홀연히 음귀가 나타나 김부식에게 ‘천 가지, 만 개라니, 누가 그걸 세어봤냐?’라고 말하며, 뺨을 쳐 갈겼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어느 날은 해우소에서 김부식이 볼일을 보고 있는데 음귀가 불알을 확 휘어잡으며 “술 마셨기에 얼굴이 붉어지는 거요?”라고 묻자, 김부식은 느리게 “벽 바깥의 단풍이 얼굴에 비춰서 그렇소.”라고 말했고, 여러 얘기를 좀 더 나누다가 손에 힘을 줘서 불알을 터뜨려 화장실에서 죽게 했다는 이야기가 『백운소설』에 실려 있다.
아마도 민중들이 생각할 때, 모반에 휩싸여 안타깝게 정지상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런 이야기로라도 앙갚음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 도주 염려도 없던 정지상 일파를 잡아, 순식간에 처형했다는 점이 늘 의구심을 낳았던 것이다.
가을에 떠난 그대 봄바람 따라 오시오
庭前一葉落 床下百蟲悲 |
뜰 앞에 한 잎사귀 떨어지니 평상 아래 온갖 벌레들이 구슬피 우네. |
忽忽不可止 悠悠何所之 |
가벼이 가서 멈추게 할 수 없는데 유유하게 어디로 가시나요? |
片心山盡處 孤夢月明時 |
나의 마음 산 가는 곳까지 따라가 외로운 달 밝은 밤에 꿈을 꾸네. |
南浦春波綠 君休負後期 |
남포의 봄 물결 푸르러지면 그대 훗날의 기약 져버리지 마시오. 『東文選』 |
이 시는 이번에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읽어봤다. 정지상이 ‘그대를 보내며’란 제목으로 두 편의 시를 지었다는 걸 처음 알았고, 다른 한 편이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이 시에는 전혀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하지만 1, 2구만 읽어보고선 무릎을 쳐야만 했다. 낙엽 하나 떨어진 게 뭐 대수라고 온갖 벌레들이 울어대는가? 그런데 작아 보이는 변화 하나에도 수많은 의미나 삼라만상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인간은 문명이란 걸 만들며 자연의 변화에 둔감해져 갔기에 자잘한 변화를 평가절하하기 바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벌레들은 여전히 그 감각을 갖고 있기에, 가을이 왔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울어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을이 왔는데 어찌 한바탕 울어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낙엽 떨어지는 것, 구르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다가 금세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여고생들이야말로 정말 아름다운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가을에 그대는 어디에 간다는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가지 말라는 말을 수없이 하고 싶었지만, 말로는 하지 못한 채 마음만으로 그대 가는 길을 따라 산까지 배웅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 않은데, 현실은 그럴 수 없는 절절함이 잘 전해진다. 살면서 얼마나 이런 때가 많았나. 맘은 붙잡아두고 싶지만, 맘은 정반대지만, 현실이란 이름 때문에 그러지 못해 맘 아파했던 뭇 날들 말이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구에선 ‘봄에 오신다 했으니, 겨울 지나거든. 만물을 소생시키는 따스한 봄바람과 함께 그대 오시오.’라고 말한다. 간절하지만 놓아줘야할 때 놓아줄 수 있는 그 끊고 맺음이 부럽다.
▲ 15년 9월 30일. 변산으로 가는 길에. 호남평야에 가득 내린 가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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