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과 최치원의 시와 류석춘
어제 2학기 들어 두 번째 한시 스터디가 있었다. 작년부터 했던 『소화시평』이 올해 7월에 상하권 선집을 무려 1년 4개월 만에 끝낸 후에 방학 기간엔 서사한시를 마쳤고 2학기부턴 이의현이 집필한 『陶谷集』을 보기로 했다. 지난주에 예행연습 삼아 『雲陽漫錄』에 나온 ‘재물과 관직을 탐내는 사람들에게’라는 편을 보면서 2학기의 스터디를 화려하게 열었다.
▲ 늦은 시간임에도 학구열을 불태우는 아이들, 그리고 명강의를 펼치는 교수님.
황상의 시와 그 기반이 된 최치원의 시
그래서 어제 두 번째 스터디를 하며 각자가 맡아온 부분을 발표한 후에 교수님이 가져온 시 두 편을 봤다. 하나는 다산의 애제자인 황상의 지은 것으로 짚신 짜던 가난한 계집아이에 대한 기록을 담은 「여인이 짚신을 짜네女織屦」란 시였는데 처음 보는 거라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고, 다른 하나는 최치원의 「강남의 까진 계집아이江南女」란 시로 한문학사 관련된 어떤 책을 펼쳐보더라도 웬만하면 실려 있기 때문에 매우 익숙했다. 과연 이 두 편의 시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갈 것인가?
女能織屦其何似 |
여인이 짚신 짠다는 게 어떠한가? |
萬中無似惟屦已 |
온갖 것 중에 보잘 것 없는 것이 이 짚신 짜기네. |
引針刺繡乃女工 |
바느질하고 수놓는 게 곧 여인의 일인데 |
紉草經緯豈汝美 |
새끼 가로로 세로로 꼬는 게 어찌 너의 미덕이겠는가. |
妙年守宮紅不渝 |
젊은 나이에 바른 수궁사은 붉기가 달라지지 않았고 |
風雨不赴魯男子 |
비바람 불 때 노남자에게 달려가지 않았지. |
席門深掩畏人知 |
석문 깊이 닫고 남들이 알까 두려워했지만 |
能無無聲涙不止 |
소리 없는 눈물 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十字橫木所謂屋 |
십자모양으로 나무를 비껴놓은 게 집이고 |
左右榱椽自枯竹 |
좌우 서까래는 마른 대나무라네. |
此中猶當郞伯軍 |
여기 가운데서 오히려 남편을 맞을 것인데 |
牛衣代裙如不忸 |
소 거적으로 치마를 대신하여도 부끄럽지 않으리. |
嗟呼我亦老山圃 |
아! 나 또한 산의 채마밭에서 늙어 가는데 |
得不傷心女不遇 |
너의 불우함에 상심치 않을 수 있겠는가. |
君不見 |
그대 보지 못했나. |
浿城美人獨繭裙 |
평양의 미인들이 홀로 비단 치마 입고 |
蘭氣猶輕百錢絇 |
난초 향기 뿜으며 오히려 백전이나 되는 신조차 가벼히 여기는 걸.『巵園小藁』 |
황상의 시는 가난한 집 아이가 방에 틀어 박혀 짚신을 짜야만 하는 서글픔에 대해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물론 마지막 구절에서 평양의 미인들과 대조하며 작가의 울분을 한껏 녹여내지만 그 전까지만 보면 이 아이는 울분이 가득 쌓였음에도 자신에게 매우 당당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 아이의 울분은 ‘소리 없는 눈물 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能無無聲涙不止’라는 구절을 통해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만, 그렇다고 주눅 들거나 억눌리지 않고 당당하다는 건 ‘소 거적으로 치마를 대신하여도 부끄럽지 않으리牛衣代裙如不忸’라는 구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일이 잘 풀려보지 않은 사람은,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산 사람은 저 두 가지 감정의 괴리가 얼마나 큰 지 여실히 알 것이다. 맘속에 울분이 있는 사람은 남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상황마저 최악으로 치닫게 되면 사람을 피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지게 마련이니 말이다.
나 또한 예전에 5년 동안 임용고사를 준비할 때 일이 잘 풀리지도 않고 사는 이유도 그저 막막했던 까닭에 늘 주눅 들어 있었고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라치면 큰 죄라도 지은 듯 쭈뼛거리며 뒷걸음치기에 바빴다. 이런 모습은 결코 나 스스로가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 상황과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실제로 단재학교에 취업을 하고 나선 단재 아이들을 데리고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자신만만하게 교사 생활을 했다는 것만 봐도 그건 명확히 알 수 있다.
이렇듯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당당하기’는 무척이나 힘든데 이 아이는 자신의 환경이 원망스러워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나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 하나로 자신을 옥죄진 않고 당당히 다가설 운명에 맞서고 있으니 대단하단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시를 모두 해석하고 나니 교수님이 왜 최치원의 시를 그 뒷장에 같이 가져오셨는지 명확하게 알게 됐다. 이 두 시의 정감이 무척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최치원 시를 보기로 하자.
江南蕩風俗 養女嬌且憐 |
강남땅은 풍속이 방탕하여서 딸 기를 때 예뻐하고 귀여워만 해. |
性冶恥針線 粧成調急絃 |
심성은 되바라져 바느질을 부끄러워하고 화장하고 빠른 음악 연주하지만 |
所學非雅音 多被春心牽 |
배운 것은 우아한 음악이 아니고 대부분 춘심에 이끌려진 것이라네. |
自謂芳華色 長占艶陽天 |
스스로 “이 고운 미색 청춘을 길이길이 누려야지”라고 말하는 구나. |
却笑隣舍女 終朝弄機杼 |
도리어 이웃 처녀가 아침 내내 베틀과 북 놀리는 것을 비웃네. |
機杼終老身 羅衣不到汝 |
“베 짜느라 인생을 마친대도 비단 옷은 네 차지 안 될 걸” |
어떤가? 읽어보니 비슷한 정감이 느껴지는가? 두 시는 비슷한 정감을 담아냈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180도 다르다. 황상의 시는 가난한 집의 여자 아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여 서글픔과 안쓰러움이 저절로 들게 만든 반면 최치원의 시는 강남 부유한 집 아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여 사람을 저절로 재수 없게 느껴지도록 했다. 그럼에도 두 시에 동시에 담긴 정감은 극단적인 대조를 통해 가난한 집 소녀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도록 했다는 점이다.
▲ 그때의 지금, 그리고 지금의 그때, 그렇기에 우린 문학작품을 보는 것이다.
위의 두 시의 내용과 현재, 그리고 류석춘
이 두 시가 지어진 시기는 1000년 정도의 격차가 있다. 우리도 으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하는데 그보다 100배에 가까운 1000년이란 시간이 지났으면 세상이 완전히 천지개벽할 정도로 달라져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두 시가 마치 같은 사람이 썼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시대의 변화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지금 우리와 황상과의 시대에도 250년 정도의 격차가 있지만 이 두 편가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도 70~80년도의 산업화시대에 여공들은 쪽방에 움츠리고 앉아 주사까지 맞아가며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으며, 지금도 제대로 못 먹고 살아 모녀가 함께 자살하는 끔찍한 상황도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황상 시의 5구에선 ‘젊은 나이에 바른 수궁사는 붉기가 달라지지 않았고妙年守宮紅不渝’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엔 典故가 있어 복잡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짚신 짜던 아이는 자신의 정조를 잃지 않으려 잘 지켰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을 얘기할 때 교수님은 그 의미를 곱씹을 수 있도록 이야기를 이어갔다. 위의 구절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 당시엔 가난한 집 아이가 정조를 지키기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계를 위해 정조를 잃는 경우도 있었지만 양반들에 의해 쉽게 정조를 빼앗기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누군들 자신을 지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더욱이 상황에 이끌려 강제로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려는 사람은 결코 없다. 그런데도 나를 지켜줄 가정환경이 안 된다는 이유로, 먹고 살 수 없다는 이유로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려야만 했던 것이다. 여자들이, 사회 소수자들이, 그리고 안전망에 들어갈 수 없던 약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 지랭이의 센스 있는 문구다. 우리도 다섯 번 정도 수요집회를 계속 참여했었는데 같이 하던 사람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의 이야기는 현재에도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연세대의 교양학부 교수인 류석춘이란 사람이 ‘위안부는 매춘’이라거나 ‘궁금하면 한번 해볼래요’라는 망언을 강의시간에 서슴지 않고 했다. 그건 곧 돈을 벌기 위해 성을 팔았다는 관념이고 거기엔 일본의 강압이나 상황의 압박 따위는 없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관념이 들어 있다. 하지만 위안부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저 말이 얼마나 그 당시의 역사를 무시한 발언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 공감이 빠진, 측은지심이 빠진 허울뿐인 지식이 이미 가슴 아픈 사람들을 또 다시 가슴 아프게 한다.
우린 세월호 사건을 대하며 같은 사건을 겪고 나서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볼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듯, 직접 겪지 않은 것에 대해선 이야기하려 할 때 더욱 꼼꼼히 살펴보고 드러난 사실 이면에 어떤 것들이 감춰져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최치원과 황상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볼 때 애달프게, 가련하게 볼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시를 통해 그 시대 아픈 모습들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그리고 미처 우리가 겪진 못했지만 시간이 흘러 상처로 남은 것들을 정약용이 「寄淵兒」라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시대를 속상해하고 풍속을 분개한 게 아니면 시가 아니며不傷時憤俗非詩也’라고 시의 정신에 대해 말한 것처럼 우리도 시대정신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조금이나마 살맛나는 세상이 되리라 믿는다.
한시를 보며 지금의 우리를 돌아봤고 그러다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바로 우리가 보던 작품들이 사람의 무늬가 한껏 담긴 人文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인문을 공부하는 이유가, 한문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니 내가 한문을 못 끊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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