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행 국어교육의 한계, 그 너머
그렇다면 ‘놀이하는 언어적 인간’을 어떻게 길러낼 수 있을까? 어떻게 텍스트에 대한 부담은 내려놓고 맘껏 글을 가지고 놀며 글이 사람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할 수 있을까? 일반 국어시간에 하는 것처럼 개념을 가르치고, 단어의 뜻을 외우게 하면 될까?
▲ 개념이 본질에 앞서는 게 아니라, 본질이 개념에 앞선다
개념암기 교육의 한계
개념(문자)은 세상을 분절하여 파편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무지개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녔음에도 우린 ‘일곱 색깔 무지개’라고 표현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무지개를 볼 때에도 빨간색 다음에는 주황색이 올 거라 생각하고 옅은 불그죽죽한 색이 보이면 ‘주황색’이라고 단정 짓는다. 현실을 제대로 보려하기보다 파편화된 지식에 현실을 끼워 맞추기에만 급급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 암기교육의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 개념을 익히는 것은 방편에 불과하다. 방편을 활용하여 앎의 본질에 들어가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면 되는 것이지 그걸 국어교육의 전면에 내세워선 안 된다. 부분이 전체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부분조차 알지 못하면 전체를 영원히 알 방법이 없으니 등한시해서도 안 된다. 개념 암기교육은 최소화하고 다른 방법을 고민해봐야 한다.
▲ 단순 암기를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깜지를 써왔던가.
시로 한바탕 놀다
그런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시’였다. 시는 개념공부가 가진 파편화된 앎의 한계를 최대한 극복한 정제된 문학 장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소소한 가치들에 관심 갖고 개념의 한계를 유희적으로 드러내며 한글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또한 시는 다른 장르로 전환하는 것도 쉽다. 시는 만화나 산문, 편지글로 바꾸어 표현하며 글의 다양성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된다. 이러한 시의 특성을 통해 한 바탕 푸지게 놀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런 경험을 통해 글에 대한 흥미가 생긴다면 그 이상 바랄 게 무엇이랴.
그렇기에 ‘시는 열쇠다’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다. 미지의 세계, 우리가 지금껏 안다고 자부해왔던 세계를 부수고 가려진 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시를 통해 세상의 익숙하지만 낯선 이면을 보고 나 자신의 숨겨진 면모를 볼 수 있다. 열쇠를 손에 쥔 자, 그 아니 열어보겠으며 그 세계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 궁금해 하겠는가. 방 안에 콕 처박혀 세상을 그리는 사람은 ‘두려움’이란 감정으로 세상을 덧칠할 테지만 열쇠를 손에 쥐고 세상을 그리는 사람은 ‘설렘’이란 감정으로 세상을 한바탕 그려 제칠 테다.
▲ 중학팀과 시를 가지고 재밌게 논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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