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교육
‘대안학교’를 ‘일반학교’와 비교하며 차이점을 부각시키지 않으며 ‘학교’라는 단일명칭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아빠교육’을 ‘아빠들도 교육을 받아야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닌, ‘자식이란 전혀 다른 존재에 대해 어떻게 관심 가질 것인가?’라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바로 거기서부터 ‘대안학교 아빠로 산다는 것’이란 주제의 강연이 선명하게 들린다. 즉, 주제를 철저히 부정하는 속에서만 강연이 들리고, 그때에 내용이 더욱 확장되어 고정관념과 충돌하며 의미심장해지는 것이다.
강연장에 올라선 준규쌤의 목소리는 소리전수관을 꽉 채우도록 울렸다. 소리는 파동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의미 있는 말은 단순한 파동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건 귀로 들어와 생각의 한 부분을 할퀴며 자리 잡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말이 울림을 낳을지, 어떤 단어가 꽂히게 될 지는 강연자도 모르고, 그걸 듣고 있는 당사자도 모른다. 그렇기에 애초에 강연이란 듣는 사람에 따라, 그 당시의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역동의 장이라 할 수 있다.
▲ 여는 말부터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여는 말 다음에 나오는 말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든다.
교육의 다양한 스펙트럼
준규쌤은 본격적으로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화면에 띄우고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광범위한 이야기를 펼쳐내기 시작한다. ‘모든 말을 다 씹어주겠어’라는 호기로운 자세로 강연을 듣기 시작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로기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지식의 옅음을 자책함과 동시에, 처음부터 이론적인 이야기로 일대 혼란을 안겨준 준규쌤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도 동시에 든다. 그래도 어쩔 텐가? 모르면 이해하기보다 그냥 막고 품는 수밖에 없는 것을 말이다.
준규쌤은 다섯 명의 학자를 소개해줬는데 그들의 교육에 대한 생각이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존 로크John Locke(1632~1704)는 ‘정신=빈 서판tabular rasa’이라 하여, 아이들은 백지 상태이기에 어른들은 그걸 채워 넣어야 한다고 봤단다. 그래서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른들이 전면에 나서 아이들을 이끌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런 교육관으로 ‘어른이 세팅해 놓은 커리큘럼에 따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이 가능해진 것이다.
피아제Jean Piaget(1896~1980)는 ‘각 나이별로 발달단계가 있다’고 하여, 나이에 맞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했단다. 그러니 아이들을 무작정 가르치고 주입하려 하기보다 나이에 맞게 가르치면 된다는 풍조를 만든 것이다.
존 듀이John Dewey(1859~1952)는 ‘생산 활동에 기초한 노작학교’를 주창하여, 학교 내에서 노작활동이랄지, 실생활과 관련된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단다. 이런 생각은 대안학교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풀무학교’, ‘변산공동체학교’와 같은 학교들이 만들어졌다.
촘스키Noam Chomsky(1928~)는 ‘사람에겐 생득적으로 언어를 배울 수 있는 매커니즘이 있다’고 했단다. 그건 곧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위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을 기본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촘스키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은 존 로크와는 반대성향의 교육을 하려 하는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Joseph Lorenz Steiner(1861~1925)는 ‘원래 가지고 태어나는 게 있기에 조화를 이루어 갖추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여, 촘스키의 논의와 비슷하면서도 자연스런 배움의 과정을 중시했다.
당연하지만 ‘다섯 명의 교육관이 어느 부분이 비슷하고 어느 부분이 다르냐?’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람마다 교육을 보는 관점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며 로크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뒷사람으로 갈수록 인위적인 교육이나 강압적인 교육을 하자는 입장에서, 자율성을 존중하고 가능성에 집중하는 쪽으로 바뀌어 갔다는 점이 중요하다. 준규쌤은 이런 이론가들을 설명하고 나서 “누구나 이 다섯 명이 말한 내용에 대해 어느 정도는 동의하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타율성과 자율성의 스펙트럼 중 누구나 한 지점을 찍고 자신의 교육관을 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정리해줬다.
▲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듣지만, 쉽지 않은 얘기라 자꾸 정신이 달아나려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느냐의 문제
이렇게 ‘교육’이란 깔때기로 여러 학자들의 입장을 정리하고 보니, 좀 더 교육에 대해 명확하게 알게 됐고 나는 어느 정도의 지점을 찍고 교육을 정의하는지 알게 됐다. 이 말에 덧붙여 준규쌤은 “여기서 어느 말이 맞다 그르다 하는 논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현실에 따라 이러한 논의 중 하나를 자신이 취사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단순히 하나만을 택하여 옳다고 보는 ‘극단적인 선택’을 근본적으로 회의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건 ‘극단적인 선택’을 부추긴다. 그래서 ‘북한에 대한 옹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로, ‘기업의 비판’은 ‘돈 없는 자의 현실 불만’으로 받아들이며, ‘학벌체제에 대한 비판’은 ‘공부 못하는 사람의 넋두리’로,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은 ‘부적응 세력의 헛소리’로 받아들인다. 이런 논의에선 ‘모 아니면 도’의 극단적인 선택만 있고, 그에 따라 답까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럴 때 반대되는 이야기를 들으려 하고, 그걸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두려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으니, 생각은 얕아지고 행동의 반경은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사회의 교육은 시스템(입시위주의 교육이고 정답암기식 교육)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 쳐도, 전체적인 흐름은 로크의 이론보다 후자의 이론이 좀 더 인간적인 것으로, 그리고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래서 ‘혁신학교’라는 말이 전면에 떠오르며 최고의 선인 것처럼 인식되고, 혁신적인 수업을 하는 교사가 유능한 교사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문제는 ‘혁신’이 제왕의 자리에 올라서는 순간, 다른 논의들은 핍박받거나 묻힐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혁신이 학교 개혁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 차지할수록, 공교육은 더욱 위태롭게 되는 아이러니가 이러한 이유로 발생한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의 내용이 옳음으로 받아들여지며 다른 것들을 깔아뭉개는 현실을 비꼬며 동섭쌤은 “지금 왜 칭송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필요한가?”라는 파격적인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준규쌤도 걱정하셨던 것이다. 그러니 ‘맞다 그르다’의 논의로 보지 말고, 이런 다양한 내용을 ‘취사선택’하는 논의로 보자고 말씀하신 것이다.
▲ 무지개엔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색깔만 있는 게 아니다. 무수한 색이 숨어 있듯이 교육도 마찬가지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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