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화팀의 좌충우돌기: 2012~2014
‘한문 전공자가 영화 교사가 됐다’는 말은 어찌 보면 ‘삶이야말로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공부하던 때엔 ‘내가 한문을 전공하며 한문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며, 대학에 들어와 한문을 전공하던 때엔 ‘영화를 매개로 아이들과 함께 만나야지’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우연과 휩쓸림 속에 나아가다보니 이렇게 흘러온 것일 뿐, 거기엔 ‘빅 픽쳐’도 ‘거시적 안목’도 자리할 여지가 없다.
▲ 2015년에 일주일 동안 낙동강에서 한강까지 라이딩을 하며 다큐를 찍었다.
몰라서 만든 영화 『다름에의 강요』
얼떨결에 단재학교에서 영화팀 교사로 일하게 됐고, 그렇게 영화의 영자도 모르던 사람이 아이들과 함께 2012년에 첫 영화를 찍게 됐다. 그 이름도 찬란한 『다름에의 강요』는 무모한 도전이 낳은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영화촬영에 대한 지식도 없고,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영화가 만들어지는지도 모르지만, ‘막고 품는 식’으로 무작정 도전하게 됐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우리만의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힘들었기 때문에, 그 당시 경수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 1949~)의 『깊이에의 강요』를 패러디하여 우리의 상황에 맞게 각색하여 시나리오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체계도 없고 씬에 대한 지식도 없이 무작정 내달렸다. 어찌어찌 미술학원과 박물관 씬이 필요했는데, 그곳도 잘 섭외가 됐다. 이제 정말 찍기만 하고 그걸 편집하여 영화를 만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어찌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의욕은 활활 넘치되 체계도 없고 흐름도 없으니, 좌충우돌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힘들어했고, 나도 나대로 ‘뭔가 그럴 듯한 결과물을 만들어야한다’는 부담 때문에 괴로웠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서 결국 영화는 만들어졌고, 그나마 영화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결과물이야 어떠하든지 그 과정은 영화팀 아이들에겐 물론이고 나에게도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 뭣 모르게 달려 들었다가 만들어진, 우리의 입봉작.
영화팀 처음으로 언론인이 되어보다
영화팀의 활동은 크게 영화를 보고 후기를 쓰며, 각종 영화제에 참석하여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게 어떻게 유통되고 사람들에게 소비되는지 현장에서 익힌다. 영화는 결코 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 그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공동 창작의 괴로움과 희열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셈이다.
▲ 이렇게 나의 생각을 말하면서 한문전공자가 영화교사로 변모하게 된다. 뭔 말이 계기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2년 정도 활동을 하며 나름의 이력을 만들어 가고 있던 2014년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그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전혀 모르는 번호였기에 받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받아보니, 낯선 목소리로 “이번에 광명에서 대안교육 행사가 열리는데, 참석해보실래요?”라는 제안을 해주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페북을 통해 광명에서 대안교육의 세계적 행사라 할 수 있는 ‘광명세계민주교육 한마당(International Democratic Education Conference)’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학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개최되기에 ‘한 번 가볼까?’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는데, 그런 제안을 받으니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다. 그 분은 우리가 영화팀이란 걸 알고 있었고, 그곳에 와서 강연을 들으며 그 현장 활동을 영상으로 스케치해주길 바라며 그와 같은 제안을 해준 것이다. 그러면서 “현장에 오면 ‘PRESS’라는 명패를 줄 거예요. 그러니 그걸 부착하시고 촬영해주시면 됩니다”라고 뒷말을 덧붙이셨다. 그분이 바로 우지성쌤이다.
솔직히 그 제안을 받는 순간 부담이 밀려왔던 게 사실이다. 영화팀이라곤 하지만, 그때까지 영화 한 편을 제작해보고 지리산을 종주했던 『그 날의 생존자들』이란 다큐멘터리를 어설프게 제작해본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우린 여전히 ‘영화의 영자도 제대로 모르는 풋내기들’이었는데, 지성쌤은 우릴 ‘영화의 영자를 어느 정도 아는 준전문가’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찍을 순 있는데, 아직 편집을 하는 건 많이 서툴거든요. 그러니 영상 파일만 넘겨도 될까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말을 듣고 지성쌤은 ‘명세기 영화팀이라며 편집도 못해?’라며 황당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면 그때 오셔서 더 얘기 나눠보죠”라는 말로 마무리 지으셨다. 그 덕에 우리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여러 강연을 공짜로 들을 수 있었고, 현장을 스케치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영어로 하는 강연을 담아놓긴 했지만, 그걸 편집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지성쌤에겐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했다는 것은 안비밀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상황은 우리가 나름 영화팀으로 활동하다 보니, 외부 사람들에게도 서서히 우리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지성쌤에게 ‘우리를 어떤 루트로 알게 됐어요?’라고 물어본 적은 없지만, 검색이든 아는 사람을 통한 소식이든 알게 됐던 게 분명하니 말이다. 한 길로 쭉 가다 보면, 전문성이 꼭 쌓이는 건 아니겠지만, 어떻게든 그 일에 맛들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조금씩 알게 되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 우지성쌤의 제안으로 이곳에 와서 나름의 프레스 역할을 하게 됐다.
인용
2. 영화란 주제로 아이들과 5년간 뒹굴며 알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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