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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산문선, 이옥의 일탈과 실험 - 1. 새로운 문풍 본문

한문놀이터/인물

태학산문선, 이옥의 일탈과 실험 - 1. 새로운 문풍

건방진방랑자 2020. 1. 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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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탈과 실험

 

심경호

 

 

새로운 문풍

 

산문(散文)이란 흩어놓은 글이다. 글자 수나 음악적 효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돈되지 않고 흩어놓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형식요건을 규범화하지 않는 것은 생각과 감정을 정해진 틀에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산문에는 그 나름대로 글쓰기의 규칙이나 문체의 양식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비문의 문법이며, 서발의 문체며, 기록의 방식이며, 의론의 투라고 하는 문법, 문체, 방식, 투와 같은 것이 글쓰기에 앞서 존재하여, 그때그때의 글쓰기에서 그것들이 해체되어 새로 구축되고 새로운 휴전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흩어놓는다는 것은 결코 풀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작가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기왕의 글쓰기 규칙과 문체의 양식을 참고하고 또 극복하고자 하는 긴장을 수반한다. 그렇다면 산문은 확산성과 통합성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는 문학 갈래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산문 작가들은 사회나 역사에 대하여 의미 있는 관점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책임의식에 짓눌리기 일쑤였다. 그러한 책임의식이 강하다보니, 양식, 형식, , 투와 같은 형식요건에 따라서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감정과 신념을 엄격하게 조정하여야 하였다. 그렇기에 한문산문은 글을 써나가는 문법(文法)을 매우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18세기 말에 이르러 경험적 사실의 일회적 진실과 그 아름다움에 눈을 뜬 일군의 작가들이 돌연 역사상에 등장하였다. 물론 돌연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감정과 신념을 엄격하게 조정하다보면 결국 자신의 개성을 훼손시키는 것이란 사실을 자각한 작가들이 늘 존재하여 왔으며, 그들의 자각과 그에 따른 불만이 더 이상 은폐되거나 억눌려 있지 못할 지점에까지 이르렀을 때, 문학사에서 볼 때 돌연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문법, 문체, 방식,투는 이지러지고 고통의 비명을 지르게 된다.

 

여기, 한 산문 작가가 있다. 산문 문체의 모든 형식들을 이지러뜨리고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법을 실험한 사람이다. 과거에 대비해서 연습하던 ()’도 산문의 문체로 훌륭하게 부활시켰으며, 일반 민중들이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지(장첩狀牒)도 인간관계의 실상을 반영하는 허구적 요소를 지닌 산문으로 멋지게 사용하였다. 불경의 어조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인생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가 곧 이옥이다. 개구리 울음[後蛙鳴賦]이란 글에서 이옥은 이렇게 말한다. 개구리 울음에는 감정이 들어 있는가 없는가? 있다. 감동과 수심과 노여움과 교만함과 즐거움의 감정을 담고 있다. 글 속의 주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지만 손님은 이렇게 반문한다. 그들이 우는 것을 들으면 무언가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 있는 듯 여겨지지만, 결국 그들은 진창이나 파고 구덩이에서 폴짝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울음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옥은, 표현되는 언사와 시문에 감정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그것은 현실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과연 나의 글쓰기가 현실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의미 있는 행위로서? 이옥은 회의하였다.

 

이옥에게는 자기의 글쓰기가 곧 현실사회에 유효하다고 전제하는 교조적 태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만의 감정을 표출하고 그것으로 자족하고 마는 글쟁이의 사고방식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문인의 존재가 조선사회에 등장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옥(1760~1812), 그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풍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같은 시대의 문인이자 친구였던 김려(金鑢)가 말하였듯이, 그의 시문에서는 기이한 생각과 감정이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토하듯, 샘물구멍에서 물이 용솟음치듯 흘러나온다金鑢, 題梅花外史卷後. “其奇情異思, 如蠶絲之吐, 如泉竅之湧.”.

 

이옥은 천부적으로 글을 잘 지었다. 글을 신속하게 지었으며, 뜸 들여 구상하지도 않았고 다 지은 뒤 고치는 법이 없는데도 장편이든 단편이든 글자마다 권점(圈點)을 쳐야 할 판이다.

 

그는 또 방언과 속어를 글 속에 사용하였다. 남들은 그것을 두고 글의 병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가 방언과 속어를 사용한 것은 생경하고 껄끄러운 글쓰기를 배격하고 자연스러운 행문(行文)을 추구한 결과다金鑢, 題花石子文鈔卷後, “及見吾友李其相之爲文詞也, 每操筆立書, 疾如風電, 手無停脘, 心無凝思. 毋論長篇大文, 短律小闋, 無不可圓之 語, 無不可壓之字, 讀之者, 或嫌其時用方言俚語, 以爲文字之一疵. 然 大抵了無生澁牽强之態, 眞可謂一時之奇才也.”. 그는 글쓰기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실험하여, 규범적 세계로부터 벗어나고픈 지향의식을 담아내었다.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면서 디테일의 묘사와 섬세한 감정의 표출에 주력한 그는 나는 지금 세상 사람이다. 나의 글을 한다라고 외쳤다. 옛 글의 문체를 따른다면서 형식주의에 빠지거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옥의 저술은 친구 김려가 교정하여 자신의 총서 담정총서(藫庭叢書)11권으로 수록한 것이 고본으로 전한다. 김려는 이옥의 산문을 문무자문초(文無子文鈔)』 『매화외사(梅花外史)』 『화석자문초(花石子文鈔)』 『중흥유기(重興遊記)』 『도화유수관소고(桃花流水館小稿)』 『경금소부(絅錦小賦)』 『석호별고(石湖別稿)』 『묵토향초본(墨吐香草本)』 『매사첨언(梅史添言)』 『봉성문여(鳳城文餘)』 『경금부초(絅錦賦草)등으로 나누어 실었다. 그리고 각각의 뒤에 평어를 붙였다.

 

한편 예림잡패(藝林雜佩)이옥의 시 창작론과 창작시 이언(俚諺)이 전한다. 이옥은 시 창작이론을 삼난(三難)으로 설명하였고, 이언(俚諺)4(調) 10여 편씩으로 구성하였다. 이언(俚諺)은 민요풍의 정서를 담고, 속어를 사용하여 남녀간의 정과 시집살이 애환을 그려내었다. 이밖에 가람본 청구야담에 따르면 그가 동상기(東廂記)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동상기1791(정조 15)에 정조가 혼기를 놓친 남녀를 결혼시켜주는 정책을 폈을 때, 파혼의 경력이 있는 김희집(金禧集)과 신씨(申氏)를 관가의 주선으로 혼례 올려 준 사실을 희곡으로 꾸민 것이다. 작자는 문양산인(汶陽山人)이라 되어 있는데, 청구야담은 그 작가가 이옥이라 하였다. 이덕무(李德懋)김신부부사혼기(金申夫婦賜婚記)아정유고(雅亭遺稿)12는 김(() 부부의 결연 사실을 산문으로 기록한 글이다..

 

 

 

 

인용

작가

1. 새로운 문풍

2. 이옥이란 인물

3. 이옥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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