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과 실험
심경호
새로운 문풍
산문(散文)이란 ‘흩어놓은 글’이다. 글자 수나 음악적 효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돈되지 않고 흩어놓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형식요건을 규범화하지 않는 것은 생각과 감정을 정해진 틀에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산문에는 그 나름대로 글쓰기의 규칙이나 문체의 양식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비문의 문법이며, 서발의 문체며, 기록의 방식이며, 의론의 투라고 하는 문법, 문체, 방식, 투와 같은 것이 글쓰기에 앞서 존재하여, 그때그때의 글쓰기에서 그것들이 해체되어 새로 구축되고 새로운 ‘휴전’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흩어놓는다는 것은 결코 풀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작가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기왕의 글쓰기 규칙과 문체의 양식을 참고하고 또 극복하고자 하는 긴장을 수반한다. 그렇다면 산문은 확산성과 통합성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는 문학 갈래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산문 작가들은 사회나 역사에 대하여 의미 있는 관점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책임의식에 짓눌리기 일쑤였다. 그러한 책임의식이 강하다보니, 양식, 형식, 체, 투와 같은 형식요건에 따라서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감정과 신념을 엄격하게 조정하여야 하였다. 그렇기에 한문산문은 글을 써나가는 문법(文法)을 매우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18세기 말에 이르러 경험적 사실의 일회적 진실과 그 아름다움에 눈을 뜬 일군의 작가들이 돌연 역사상에 등장하였다. 물론 ‘돌연’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감정과 신념을 엄격하게 조정하다보면 결국 자신의 개성을 훼손시키는 것이란 사실을 자각한 작가들이 늘 존재하여 왔으며, 그들의 자각과 그에 따른 불만이 더 이상 은폐되거나 억눌려 있지 못할 지점에까지 이르렀을 때, 문학사에서 볼 때 돌연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문법, 문체, 방식,투는 이지러지고 고통의 비명을 지르게 된다.
여기, 한 산문 작가가 있다. 산문 문체의 모든 형식들을 이지러뜨리고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법을 실험한 사람이다. 과거에 대비해서 연습하던 ‘부(賦)’도 산문의 문체로 훌륭하게 부활시켰으며, 일반 민중들이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지(장첩狀牒)도 인간관계의 실상을 반영하는 허구적 요소를 지닌 산문으로 멋지게 사용하였다. 불경의 어조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인생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가 곧 이옥이다. 『개구리 울음[後蛙鳴賦]』이란 글에서 이옥은 이렇게 말한다. 개구리 울음에는 감정이 들어 있는가 없는가? 있다. 감동과 수심과 노여움과 교만함과 즐거움의 감정을 담고 있다. 글 속의 주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지만 손님은 이렇게 반문한다. 그들이 우는 것을 들으면 무언가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 있는 듯 여겨지지만, 결국 그들은 진창이나 파고 구덩이에서 폴짝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울음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옥은, 표현되는 언사와 시문에 감정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그것은 현실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과연 나의 글쓰기가 현실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의미 있는 행위로서? 이옥은 회의하였다.
이옥에게는 자기의 글쓰기가 곧 현실사회에 유효하다고 전제하는 교조적 태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만의 감정을 표출하고 그것으로 자족하고 마는 글쟁이의 사고방식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문인의 존재가 조선사회에 등장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옥(1760~1812), 그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풍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같은 시대의 문인이자 친구였던 김려(金鑢)가 말하였듯이, 그의 시문에서는 기이한 생각과 감정이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토하듯, 샘물구멍에서 물이 용솟음치듯 흘러나온다【金鑢, 「題梅花外史卷後」. “其奇情異思, 如蠶絲之吐, 如泉竅之湧.”】.
이옥은 천부적으로 글을 잘 지었다. 글을 신속하게 지었으며, 뜸 들여 구상하지도 않았고 다 지은 뒤 고치는 법이 없는데도 장편이든 단편이든 글자마다 권점(圈點)을 쳐야 할 판이다.
그는 또 방언과 속어를 글 속에 사용하였다. 남들은 그것을 두고 글의 병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가 방언과 속어를 사용한 것은 생경하고 껄끄러운 글쓰기를 배격하고 자연스러운 행문(行文)을 추구한 결과다【金鑢, 「題花石子文鈔卷後」, “及見吾友李其相之爲文詞也, 每操筆立書, 疾如風電, 手無停脘, 心無凝思. 毋論長篇大文, 短律小闋, 無不可圓之 語, 無不可壓之字, 讀之者, 或嫌其時用方言俚語, 以爲文字之一疵. 然 大抵了無生澁牽强之態, 眞可謂一時之奇才也.”】. 그는 글쓰기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실험하여, 규범적 세계로부터 벗어나고픈 지향의식을 담아내었다.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면서 디테일의 묘사와 섬세한 감정의 표출에 주력한 그는 “나는 지금 세상 사람이다. 나의 글을 한다”라고 외쳤다. 옛 글의 문체를 따른다면서 형식주의에 빠지거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옥의 저술은 친구 김려가 교정하여 자신의 총서 『담정총서(藫庭叢書)』에 11권으로 수록한 것이 고본으로 전한다. 김려는 이옥의 산문을 『문무자문초(文無子文鈔)』 『매화외사(梅花外史)』 『화석자문초(花石子文鈔)』 『중흥유기(重興遊記)』 『도화유수관소고(桃花流水館小稿)』 『경금소부(絅錦小賦)』 『석호별고(石湖別稿)』 『묵토향초본(墨吐香草本)』 『매사첨언(梅史添言)』 『봉성문여(鳳城文餘)』 『경금부초(絅錦賦草)』 등으로 나누어 실었다. 그리고 각각의 뒤에 평어를 붙였다.
한편 『예림잡패(藝林雜佩)』 이옥의 시 창작론과 창작시 「이언(俚諺)」이 전한다. 이옥은 시 창작이론을 「삼난(三難)」으로 설명하였고, 「이언(俚諺)」은 4조(調) 각 10여 편씩으로 구성하였다. 「이언(俚諺)」은 민요풍의 정서를 담고, 속어를 사용하여 남녀간의 정과 시집살이 애환을 그려내었다. 이밖에 가람본 『청구야담』에 따르면 그가 「동상기(東廂記)」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동상기」는 1791년(정조 15)에 정조가 혼기를 놓친 남녀를 결혼시켜주는 정책을 폈을 때, 파혼의 경력이 있는 김희집(金禧集)과 신씨(申氏)를 관가의 주선으로 혼례 올려 준 사실을 희곡으로 꾸민 것이다. 작자는 문양산인(汶陽山人)이라 되어 있는데, 『청구야담』은 그 작가가 이옥이라 하였다. 이덕무(李德懋)의 「김신부부사혼기(金申夫婦賜婚記)」【『아정유고(雅亭遺稿)』 권12】는 김(金)·신(申) 부부의 결연 사실을 산문으로 기록한 글이다.】.

이옥이란 인물
이옥의 자(字)는 기상(其相)이다. 호(號)는 문무자(文無子)·매사(梅史)· 매암(梅庵)·경금자(絅錦子)·화석자(花石子)·청화외사(靑華外史)·화서외사(花漵外史)·매화외사(梅花外史)·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등을 사용하였다. 본관은 전주다. 조부 이동윤(李東胤)은 서울에서 살았으며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를 지냈다. 부친 이상오(李常五)는 1754년(영조 30)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옥의 본가는 경기도 남양(南陽) 매화산(梅花山) 아래에 있었다. 15세에 최종(崔宗)의 딸과 결혼하였고, 뒷날 아들 우태(友泰)를 낳았다【김균태, 『이옥의 문학이론과 작품세계의 연구』, 창학사, 1986.】.
이옥은 젊어서부터 문인 기질이 많았다. 24세가 되던 1783년(정조 7)에 학질에 걸렸을 때는 고통을 이기려고 「저학사(詛瘧辭)」를 지었다. 25세 때인 1784년(갑진년)에는 「제문신문(祭文神文)」 지어 ‘글의 신’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옥은 1790년(정조 14), 31세로 생원시에 급제하고, 성균관 기재(寄齋)에서 생활하였다. 1792년 가을에는 김려와 함께 반촌의 김응일(金應一)의 사랑에서 공령문(과거시험의 문체)을 연습하였다. 그들은 틈나는 대로 짧은 부를 지어 자신들의 정감을 담아내었다. 이옥이 이 때 지은 부들은 『경금소부』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옥은 성균관 유생(상재생)으로 있던 36세(1795, 정조 19) 에 응제(應製)의 표문(表文)에 소설(소품) 문체를 썼다는 이유로 정조의 견책을 받았다【이옥은 뒷날 「추기남정시말(追記南征始末)」에서 그 경위를 적었다.】. 정조는 동지성균관사에게 명을 내려, 일과(日課)로 사육문(四六文) 50수를 채우도록 시켜서 그가 옛 문체를 완전히 바꾼 뒤에 과거에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은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정조가 동지정사(冬至正使) 박종악(朴宗岳)에게 중국서적의 수입을 금하는 대목에서 당시의 문풍을 우려하는 말이 실려 있고, 거기에 이옥의 일이 거론되어 있다. 정조는 패관소설을 열람하였다는 이유로 이상황(李相璜)을 서학교수의 직위에서 해임하였는데, 그가 답을 올리자 다시 전직을 맡기되, 남공철(南公轍)에게도 공초(供招)를 받아오게 전교하였다. 그 때에도 이옥의 일을 거론하였다.
정조는 처음에 이옥에게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나, 곧 있을 경과(慶科)에 응시할 수 있도록 충군(充軍)의 벌로 바꾸었고, 이전처럼 응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옥은 그 해(정조 19년)에 충청도 정산현(定山縣)에 충군되었으나, 문서에 이름을 올리자마자 서울로 와서 그해 9월에 다시 응제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정조는 그의 문체가 아주 초쇄(噍殺, 음조가 아주 낮고 구슬픔)하다는 이유로 엄하게 꾸짖고, 더욱 먼 곳으로 충군하게 하였다.
이옥은 1795년 9월 13일에 동작 나루를 건너 웅치(熊峙)를 넘어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에 이르렀다. 삼가현은 봉성(鳳城)·삼치(三峙)· 가수현(嘉樹縣)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합천군에 속한다. 거기서 군적에 이름을 올리고 3일간 머문 이옥은, 삼가현을 떠나 10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 전말은 이옥 스스로가 「남정(南程)」에서 밝혔다.
이옥은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사비추해(士悲秋解)」에서는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까닭을 음양의 이치로 해석하였다. 「북관기야곡론(北關妓夜哭論)」에서는 북관 기녀 가련(可憐)의 일화를 들어서, 선비의 우불우(遇不遇) 문제를 논하였다.
이옥은 다음해, 즉 1796년(정조 20) 2월에 별시(別試) 초시에 응시하여 일등을 하였다. 하지만 책이 격식을 어겼다는 이유로, 정조는 그를 떨어뜨리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국법에 따르면 충군된 자는 일해(一解, 과거 초시의 합격)하면 사면을 받게 되어 있는데, 그러려면 충군자가 소장(訴狀)을 올려야만 하였다. 하지만 이옥은 관례를 몰라 소장을 올리지 않고, 3월에 남양으로 돌아갔다. 5월에는 부친의상을 만났다.
그런데 1797년(정조 21)에 홀연 삼가현에서 소환의 문서가 왔다. 이옥은 자신의 이름이 아직 군적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고서, 1798년에 삼년상을 마친 뒤 형조에 소장을 올렸다. 하지만 형조는 병조에, 병조는 예조에 떠넘겼으므로, 이옥은 예조에 소장을 올렸다. 예조는 사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1799년, 40세가 되던 해, 삼가현에서 소환의 독촉이 심해졌고, 예조, 경기관찰사, 남양군수도 모두 이옥에게 삼가현으로 돌아가라고 독촉하였다. 할 수 없이 그 해 10월, 삼가현으로 내려간 그는 점사(店舍)에서 방을 얻어 살면서 그곳의 풍물과 인물, 방언과 풍속을 관찰하여 필기류 산문집 『봉성문여(鳳城文餘)』를 엮었다. 그 소서(小叙)에서 그는 자기의 글쓰기가 ‘근심의 전이 행위’였다고 말하였다.
내 친구 가운데 근심이 많아서 본시 술을 좋아하는 자가 있었다. …… “나는 근심스런 몸으로 근심스런 땅에 거처하고 근심스런 때를 만났다. 마음이 근심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마음이 몸에 있으면 몸을 근심하고, 마음이 처소에 있으면 처소를 근심하고 마음이 상황에 있으면 상황을 근심하는 것이니, 마음이 있는 곳에 근심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근심은 따라오지 않을 수 있 다. 지금 내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술병을 들어 찰찰 따르면 마음이 술병에 있고, 잔을 잡고서 넘칠까 조심하면 마음이 잔에 있고, 안주를 집고서 목구멍에 넣으면 마음이 안주에 있고, 객에게 잔을 권하면서 나이를 고려하면 마음이 객에게 있다. 손을 뻗어 술병을 잡을 때부터 입술에 남은 술을 훔치는 때에 이르기까지, 잠깐 사이라도 근심이 없게 된다. 몸을 근심하는 근심도 처지를 근심하는 근심도, 닥친 상황을 근심하는 근심도 없다. 바로 이것이 술을 마심으로써 근심을 잊는 방도요,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까닭이다.” 나는 그의 말을 옳다고 여기되, 그의 실정을 슬퍼했다. 아아! 내가 봉성에서 글을 쓴 것도 또한 친구가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나 보다.
余之同人有多憂而業嗜酒者. …… “余以可憂之身, 處可憂之地, 値可憂之時, 憂者心在中, 心在身則憂身, 心在處則憂處, 心在値則憂値, 心所在而憂在焉. 故移其心而之它, 則要不能隨至. 今夫余之飮也, 提壺試蕩, 則心在壺․ 把盃戒溢, 則心在盃, 持肴投喉, 則心在肴, 醻客辨齒, 則心在客, 自伸手之時, 至拭脣之頃, 則暫而無憂焉. 無憂身之憂, 無憂處之憂, 無憂値之憂. 此飮之所以忘憂也, 余之所以多飮也.” 余是其說而悲其情. 差呼! 余之有鳳城筆, 其亦同人之酒也歟!
1800년 2월, 순조의 즉위를 경하하는 증광시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삼가현의 현령이 비로소 귀환을 허락하였다. 이옥은 2월 18일에 삼가현을 떠나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남원·전주를 거쳐 공산(公山)에 이르러, 사면령이 내렸음을 알았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 해(1801년), 신유옥사(辛酉獄事)가 일어났다. 이옥은 그 해 여름에 장편의 부 「삼도부(三都賦)」를 지어, 정치적 견해를 문학적으로 토로하였다. 당국자의 인정을 받고자 하였던 듯하다.
하지만 이옥은 좌절을 겪었다. 그때의 퇴영적 심사는 1803년에 지은「애호접(哀蝴蝶)」과 차운부(次韻賦) 「차도정절한정부운(次陶靖節閑情賦韻)」 「효번안인한거부(效潘安仁閑居賦)」에 잘 나타나 있다. 52세 되던 1811년에는 명나라 반유룡(潘遊龍)의 「시여취(詩餘醉)」를 읽고 정감을 토로하는 문학에 매료되었다. 스스로도 전사(塡詞)【사보(詞譜)에 맞추어 평측과 압운을 조절해서 글자를 놓는 일】하여 「묵토향(墨吐香)」을 엮었다.
이옥은 53세를 일기로 불우한 삶을 마감하였다.

이옥의 산문
이옥은 「이언(俚諺)」을 창작한 배경을 설명한 삼난 가운데 「이난(二 難)」에서, 정(情)의 진(眞)을 남녀의 정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남녀의 정을 시로 다룬다고 한 바 있다【『藝林雜佩』 俚諺引 「二難」, “夫地萬物之觀, 莫大乎觀於人, 人之觀, 莫妙乎情, 情之觀, 莫眞乎觀於男女之情.”】. 문학에서 정의 진실성을 중시 한 것이다. 「독초사에서 그는 문학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 는 영향에 주목하고, 그 영향을 정서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사물과 현실을 바라보는 이옥의 시선은 애상적이고, 또 때로는 표층의 사실에 머문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의 관념으 로 사물과 현실을 재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경험과 인식을 소중하게 생각한 결과였다.
이옥은 필기체 산문집 『본성문여』에서 삼가현이 정인홍(鄭仁弘)이라는 문제적 인물과 관련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깊이 있게 논하지 않았고, 기행문집 『남정』에서는 송광사(松廣寺)에 대해 기록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한 고승대덕이 그곳에 주지로 있었던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역사적 인식을 고의로 배제한 그의 글쓰기는 곧, 세계의 인식에서 고정성·규범성을 탈피하려는 해체적 방법이었다.
이옥은 작은 구멍을 통해서 세상을 엿보듯, 미세한 사항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묘사해내는데 정신을 쏟기 일쑤였다.
1799년, 삼가현에 가 있을 때, 그는 12월 27일의 장날 광경을 창 문 구멍으로 관찰하였다. 이제라도 눈이 올 듯 잔뜩 찌푸린 오후, 몽롱한 의식으로 방안에 있던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종이 창의 구멍을 통해서 저자의 광경을 엿보았다. 시기라는 글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저자를 오가는 사람들이 손에 쥐고 등에 업고 머리에 인 것과 옷차림, 걸음걸이를 하나하나 응시하면서, 형형색색의 태깔에 호기심을 느꼈다. 사물을 하나하나 또렷이 포착하여 묘사해내는 것은 의식의 생동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의 엿보기와 묘사는 아무 목적 의식이 없다. 그 자체가 즐거움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옥은 사계층으로서의 책임의식을 완전히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다. 「어부(魚賦)」에서 그는 어족(魚族)의 조직을 비유로 들어서, 군주가 관리를 잘 등용하고 목민관이 청렴하고 공정해야 민생이 안정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과어(瓜語)」에서는 용인(用人)의 문제를 주제로 삼았다. 또한 「유광억전(柳光億傳)」에서는 글품 파는 선비의 불의를 고발하였고, 「과책(科策)」에서는 과장의 문란 사실을 보고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옥은 농업이 민생의 근본이라는 견해를 견지하여 농법, 전세, 농정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전세설(田稅說)」에서는 관리들의 횡포로 연분9등법과 전분6등법이 효과를 낳지 못하는 현실을 우려하였고, 「오자구부(五子嫗賦)」에서는 군정의 폐해를 고발하였다. 「중어(衆語)」에서는 찰수수 재배법과 농지개간법에 관하여 다각도로 논하였고(이 글은 심성의 수양을 논한 것이 주제이지만), 「선경노(善耕奴)」에서는 농법의 개량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두론(斗論)」에서는 곡식을 측량하는 말[斗]의 중요성을 말하고, 도량형의 통일 이야말로 민생을 안정시키는 기초라고 역설하였다.
「야인양군자설(野人養君子說)」에서는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양성할 수 없다[無野人莫以養君子]”라는 『맹자』의 취지를 논하여, 치민의 원리를 밝혔다. 그는 궁극적으로 군주 - 고위 지배층 - 중간 지배층 - 야인(농민·공인·상인)의 계층구조가 안정되기를 기원하였으며, 군주의 시혜적 덕목을 중시하였다. 「논서풍(論西風)」에서는 민생을 해치는 방자한 지배층을, 여름·가을의 교체기에 불어 가뭄을 가져오는 서풍에 비유하고 성토하였다.
한편 이옥은 당시 상업이 흥성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그 역동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함께 드러내었다. 「시기(市記)」에서 그는 시장을 오가는 여러 인물들을 세세하게 묘사하여, 시장의 활발한 모습을 생동적으로 재현하였다. 동시에 그는,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종래의 인간 관계가 해체되고 이익만 추구하는 부정적 측면이 나타난 것을 우려하였다. 시장에서 활개치는 도적의 행태를 기록한 「시투(市偸)」는 그 대표적 예이다. 또 「이홍전(李泓傳)」에서는 희대의 사기꾼을 소재로 하여, 새로운 경제구조와 인간관계 속에서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옥은 지방에서의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지방의 가치를 재발견하였다. 특히 지역적 차이와 공동체의 관습에 따라 방언이 생긴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심지어 군도(群盜)의 은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숭교에서 도둑들이 사용하는 은어를 기록해두었다. 그는 계층과 집단에 따라 언어사용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하였고, 탈중심적 관점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옥은 여성의 삶에 깊이 주목하였다. 『봉성문여』에서는, 성주(星州)의 양녀 애금이 관청에 올린 소장을 다듬어 소개하였고(「愛琴供狀」), 또한 여자가 아홉 남편을 모두 사별하고 한 자리에 나란히 묻고 자신도 같은 자리에 묻혀 십총을 이룬 이야기를 적었다(「九夫家」)【이병혁 님의 현지답사와 이가원 님의 논문 「구부총고(九夫冢攷)」에 의해 구부총이 경남 사천에 있다고 밝혀져 있다.】. 그리고 야합을 하다가 부모에게 들켜 기적(妓籍)에 이름이 오른 필영(必英)이 그 부당함을 하소한 소장도 고쳐서 소개하였다(「必英狀辭」).
사계층의 문인이었던 이옥은 현실의 매개적 참여를 포기하지 않았다. 독주자라는 글에서는, 문학의 가치가 현실적 효용성에 있다고 역설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의 효용성은 경국 문장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글이 작가 자신의 감정과 사상에 기초하여, 그리고 객관사실을 진정으로 진실되게 드러내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고, 또 그러한 문학관을 실현하기 위하여 문체를 실험하였다【이옥의 산문에 대하여는 이가원, 『이조한문소설선』(민중서관, 1961); 이가원, 『연암·문무자 소설정선』(박영사, 1974) ; 김균태, 앞의 책 ; 임유경, 『이옥의 전 연구」(이화여대 석사논문, 1981) ; 졸고, 「일탈과 실험」, 『18세기 연구』 제3호(18세기학회, 2001) 등을 참조】. 그는 종래의 규범의식에 대해 반발하고, 규범의식에 의해 재단된 허위적 역사의식을 거부하면서, 현실의 진실태를 포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또한 조선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한자어휘와 새로운 조어를 과감하게 채용하여 표현의 폭을 확대하였다.
이옥. 그는 봉건사회의 질곡에서 벗어나 참다운 개성을 글 속에 담아내려고 하였던 실험적 작가였던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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