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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산문선, 이옥의 일탈과 실험 - 3. 이옥의 산문 본문

한문놀이터/인물

태학산문선, 이옥의 일탈과 실험 - 3. 이옥의 산문

건방진방랑자 2020. 1. 1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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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의 산문

 

이옥은 이언(俚諺)을 창작한 배경을 설명한 삼난 가운데 이난(二 難)에서, ()의 진()을 남녀의 정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남녀의 정을 시로 다룬다고 한 바 있다藝林雜佩俚諺引 二難, “夫地萬物之觀, 莫大乎觀於人, 人之觀, 莫妙乎情, 情之觀, 莫眞乎觀於男女之情.”. 문학에서 정의 진실성을 중시 한 것이다. 독초사에서 그는 문학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 는 영향에 주목하고, 그 영향을 정서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사물과 현실을 바라보는 이옥의 시선은 애상적이고, 또 때로는 표층의 사실에 머문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의 관념으 로 사물과 현실을 재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경험과 인식을 소중하게 생각한 결과였다.

 

이옥은 필기체 산문집 본성문여에서 삼가현이 정인홍(鄭仁弘)이라는 문제적 인물과 관련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깊이 있게 논하지 않았고, 기행문집 남정에서는 송광사(松廣寺)에 대해 기록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한 고승대덕이 그곳에 주지로 있었던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역사적 인식을 고의로 배제한 그의 글쓰기는 곧, 세계의 인식에서 고정성·규범성을 탈피하려는 해체적 방법이었다.

 

이옥은 작은 구멍을 통해서 세상을 엿보듯, 미세한 사항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묘사해내는데 정신을 쏟기 일쑤였다.

 

1799, 삼가현에 가 있을 때, 그는 1227일의 장날 광경을 창 문 구멍으로 관찰하였다. 이제라도 눈이 올 듯 잔뜩 찌푸린 오후, 몽롱한 의식으로 방안에 있던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종이 창의 구멍을 통해서 저자의 광경을 엿보았다. 시기라는 글에 나타나 있듯이, 그는 저자를 오가는 사람들이 손에 쥐고 등에 업고 머리에 인 것과 옷차림, 걸음걸이를 하나하나 응시하면서, 형형색색의 태깔에 호기심을 느꼈다. 사물을 하나하나 또렷이 포착하여 묘사해내는 것은 의식의 생동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의 엿보기와 묘사는 아무 목적 의식이 없다. 그 자체가 즐거움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옥은 사계층으로서의 책임의식을 완전히 벗어던진 것은 아니었다. 어부(魚賦)에서 그는 어족(魚族)의 조직을 비유로 들어서, 군주가 관리를 잘 등용하고 목민관이 청렴하고 공정해야 민생이 안정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과어(瓜語)에서는 용인(用人)의 문제를 주제로 삼았다. 또한 유광억전(柳光億傳)에서는 글품 파는 선비의 불의를 고발하였고, 과책(科策)에서는 과장의 문란 사실을 보고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옥은 농업이 민생의 근본이라는 견해를 견지하여 농법, 전세, 농정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전세설(田稅說)에서는 관리들의 횡포로 연분9등법과 전분6등법이 효과를 낳지 못하는 현실을 우려하였고, 오자구부(五子嫗賦)에서는 군정의 폐해를 고발하였다. 중어(衆語)에서는 찰수수 재배법과 농지개간법에 관하여 다각도로 논하였고(이 글은 심성의 수양을 논한 것이 주제이지만), 선경노(善耕奴)에서는 농법의 개량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두론(斗論)에서는 곡식을 측량하는 말[]의 중요성을 말하고, 도량형의 통일 이야말로 민생을 안정시키는 기초라고 역설하였다.

 

야인양군자설(野人養君子說)에서는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양성할 수 없다[無野人莫以養君子]”라는 맹자의 취지를 논하여, 치민의 원리를 밝혔다. 그는 궁극적으로 군주 - 고위 지배층 - 중간 지배층 - 야인(농민·공인·상인)의 계층구조가 안정되기를 기원하였으며, 군주의 시혜적 덕목을 중시하였다. 논서풍(論西風)에서는 민생을 해치는 방자한 지배층을, 여름·가을의 교체기에 불어 가뭄을 가져오는 서풍에 비유하고 성토하였다.

 

한편 이옥은 당시 상업이 흥성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하고 그 역동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함께 드러내었다. 시기(市記)에서 그는 시장을 오가는 여러 인물들을 세세하게 묘사하여, 시장의 활발한 모습을 생동적으로 재현하였다. 동시에 그는,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종래의 인간 관계가 해체되고 이익만 추구하는 부정적 측면이 나타난 것을 우려하였다. 시장에서 활개치는 도적의 행태를 기록한 시투(市偸)는 그 대표적 예이다. 이홍전(李泓傳)에서는 희대의 사기꾼을 소재로 하여, 새로운 경제구조와 인간관계 속에서 의()와 이()의 구분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새로운 인간형이 등장한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옥은 지방에서의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지방의 가치를 재발견하였다. 특히 지역적 차이와 공동체의 관습에 따라 방언이 생긴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심지어 군도(群盜)의 은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숭교에서 도둑들이 사용하는 은어를 기록해두었다. 그는 계층과 집단에 따라 언어사용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하였고, 탈중심적 관점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옥은 여성의 삶에 깊이 주목하였다. 봉성문여에서는, 성주(星州)의 양녀 애금이 관청에 올린 소장을 다듬어 소개하였고(愛琴供狀), 또한 여자가 아홉 남편을 모두 사별하고 한 자리에 나란히 묻고 자신도 같은 자리에 묻혀 십총을 이룬 이야기를 적었다(九夫家)이병혁 님의 현지답사와 이가원 님의 논문 구부총고(九夫冢攷)에 의해 구부총이 경남 사천에 있다고 밝혀져 있다.. 그리고 야합을 하다가 부모에게 들켜 기적(妓籍)에 이름이 오른 필영(必英)이 그 부당함을 하소한 소장도 고쳐서 소개하였다(必英狀辭).

 

사계층의 문인이었던 이옥은 현실의 매개적 참여를 포기하지 않았다. 독주자라는 글에서는, 문학의 가치가 현실적 효용성에 있다고 역설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그의 효용성은 경국 문장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글이 작가 자신의 감정과 사상에 기초하여, 그리고 객관사실을 진정으로 진실되게 드러내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고, 또 그러한 문학관을 실현하기 위하여 문체를 실험하였다이옥의 산문에 대하여는 이가원, 이조한문소설선(민중서관, 1961); 이가원, 연암·문무자 소설정선(박영사, 1974) ; 김균태, 앞의 책 ; 임유경, 이옥의 전 연구(이화여대 석사논문, 1981) ; 졸고, 일탈과 실험, 18세기 연구3(18세기학회, 2001) 등을 참조. 그는 종래의 규범의식에 대해 반발하고, 규범의식에 의해 재단된 허위적 역사의식을 거부하면서, 현실의 진실태를 포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또한 조선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한자어휘와 새로운 조어를 과감하게 채용하여 표현의 폭을 확대하였다.

 

이옥. 그는 봉건사회의 질곡에서 벗어나 참다운 개성을 글 속에 담아내려고 하였던 실험적 작가였던 것이다.

 

 

 

 

인용

작가

1. 새로운 문풍

2. 이옥이란 인물

3. 이옥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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