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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책 머리에 - ‘고’를 탐구해나가는 힘찬 발걸음들 본문

책/한문(漢文)

책 머리에 - ‘고’를 탐구해나가는 힘찬 발걸음들

건방진방랑자 2020. 4. 12.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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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탐구해나가는 힘찬 발걸음들

 

 

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부분이며, 그 점에서 하나의 지속이다. 우리의 이 지속성 속에서 잃었던 자기 자신을 환기하고, 소중한 자신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으며, 자신의 오랜 기억과 대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는 진정한 자기회귀自己回歸의 본질적 계기가 된다. 진정한 자기회귀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긍정하되 자기에 갇히지 않고, 잃어버린 것을 통해 자기를 재창조해 내는 과정이다. 이 점에서 는 한갓 복원이나 찬탄의 대상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를 찾아나가는 심오한 정신의 어떤 행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의 에 대한 탐구다.

 

 

 

텍스트에 대한 사유와 자아의 확장

 

세상은 점점 요지경이 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으며, 빨라지는 그만큼 생각을 점점 더 않게 된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 세계에 대해 점점 더 피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많이 안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대개 시시껄렁한 것 아니면 실용적인 지식이며, 삶의 근원과 관련된 앎은 아니다.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럽다. 왜 고통스러운가. 텍스트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생각’, 즉 사유思惟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 역시 그렇듯이 이 고통의 과정 없이는 우리는 텍스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텍스트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는 기다림을 배우고, 연민을 배우며, 깊은 슬픔을 응시해 낼 수 있게 되고, 이 세상의 온갖 존재들이 감추고 있는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심안心眼을 얻게 된다. 이 점에서, 문학과 예술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은 세상ㆍ삶ㆍ자연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의 텍스트에 대한 탐구다.

연암을 읽는다는 것은 무언가. 연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암 주변을 아무리 빙빙 배회해 봤자 연암의 진면목을 알기를 어렵다. 연암을 알기 위해서는 연암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연암이 무엇을 괴로워했는지, 무엇을 기뻐했는지, 무엇을 슬퍼했는지, 무엇에 분노했는지, 스스로 연암이 되어 느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연암을 읽는다는 일이, 단지 연암의 시선으로 삶과 자연과 세상을 읽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스스로의 시선, 다시 말해 우리 시대 의 시선으로 삶과 자연과 세상을 읽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럴 경우, 사유하는 주체이자 심리적 주체로서의 연암은, 또 다른 사유의 주체이자 심미적 주체인 와 부단히 교섭하면서 대화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가 연암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암이 속으로 들어오기도 하며, 이 과정을 통해 죽었던 연암은 환생하게 되고, ‘는 내가 속한 좁은 시공간을 넘어 자아의 놀라운 확충을 경험하게 된다.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저자는 대학 시절 연암을 대상으로 졸업 논문을 쓴 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 일이다. 생각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든 격이다. 패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연암을 읽는 일이 패기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 생각도 짧고, 한문 문리도 턱없이 부족했으며, 미묘한 것을 명료하게 표현해내는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참담한 일이지만, 당시 나는 연암과의 첫 대면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했다. 그 점에서 연암은 나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후 나는 다른 문제로 관심을 돌려 이런저런 연구를 해 왔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늘 마음 한구석에는 연암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이 거인과 대등한 정신적 높이에서 대화할 그날을 기다리며,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단련하면서 사유의 연습을 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점에서, 나는 지금 내가 출발했던 그 지점에 다시 서 있는 셈이다.

 

 

 

 

 

지난 1년 동안 연암과 함께 한 희노애락을 기술하다

 

이 책에서는 스무 편 가까운 연암의 산문 작품을 다루고 있다. 예술성이 빼어난 연암의 산문은 이 책에서 다룬 작품의 네댓 배는 족히 되리라 보지만, 우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 20여 편을 대상으로 읽기를 시도하였다. 이들 글은 연암의 정신세계와 작가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조만간 연암의 다른 글들에 대해서도 후속 작업을 할 생각이다.

연암의 산문은, 들판에 홀로 서서 바라보는 저녁 구름과 같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까지 약 30분 가까운 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해가는 저 구름의 미묘한 색조色調하며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은 그만 휘발되어 사라져 버리고, 내가 꼭 구름이 된 듯한 느낌이 들곤 하지 않던가. 그 경이로운 느낌과 황홀감이라니! 그리고 사위四圍가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비로소 정신을 차렸을 때 엄습하는 그 쓸쓸함과 묘한 여운이란! 아마도 유한한 지상의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서 우리는 그런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리라.

지난해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 내내 나는 연암과 함께 생활해 왔다는 기분이다. 연암이 벗들과 술을 마실 때 나는 그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연암과 그 벗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과 한 마디 한 마디 말에 희비喜悲를 함께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암이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나도 그를 따라 눈물을 떨구었고, 연암이 달빛이 비치는 밤길을 걸을 때면 나도 따라 걸었으며, 연암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먼눈이 되면 나 역시 문득 먼눈이 되어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이 되곤 하였다. 말하자면 나는 지난 1년 동안 연암과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셈이다. 이 책은 그러한 체험의 외화外化.

 

 

 

특이한 방식의 연암 읽기

 

이 책의 연암 읽기는 다소 특이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한 편의 글 전체를 보인 다음, 다시 단락 별로 글을 제시해 자세히 음미했으며, 최종적으로 다시 글 전체의 차원으로 돌아가 총평을 가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연암의 글은 워낙 치밀한 데다 깊은 사유와 미학적 고려를 담고 있으며, 고도의 구성과 안배安排를 해 놓고 있기에, 범범하게 글 전체만 갖고 대강 논의해서는 수박 겉핥기(외지수포外舐水匏)가 되기 쉬우며, 정작 연암이 글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미묘하고 아름다운 국면들을 놓쳐 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저자는 분석과 종합의 묘를 모두 살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런 접근 방식을 생각하게 되었다. 분석의 과정은 때로 지루하다. 하지만 이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연암의 사유와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일단 들어간 다음에는, 나의 말은 죄다 부질없는 것이니 모두 잊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의 형식과 관련해 한 가지 더 말해 둘 것은, 이 책은 문단에 따라 글을 나누고 있지만, 하나의 문단 내에서 행을 달리하여 적은 경우가 더러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문단이란 행을 구분해서는 안 되고 하나로 쭉 이어 써야 하는 것이지만, 이 책의 경우 시각적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작문법상의 원칙을 기계적으로 고수하지는 않았다.

 

 

 

연암강회의 소우들과 함께 만든 책

 

나는 5년 전부터 나의 학우들과 매주 수요일 저녁에 연암 산문을 강독해 오고 있다. 이른바 연암강회燕巖講會. 이 강회에선 연암이 쓴 글의 자구 하나하나를 갖고서 요리조리 따지고 음미하며 많은 시간을 들인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내 생각의 많은 부분은 이 강회 중에 말해진 것이다. 다행히 홍아주 소우少友가 나를 위해 강회에서 내가 한 말을 자세히 기록해 놓아 이에 의거해 생각을 보태고 확장해 이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여기에 수록된 연암 작품들에 대해 작년 1학기 서울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에 개설된 과목인 한국고전비평연습수업에서 한 차례 검토한 바 있다. 당시 학생들의 발표를 들으며 나는 연암 작품에서 어떤 부분이 특히 오독되기 쉬운가, 무엇은 그런대로 이해되는 반면 무엇은 제대로 잘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학생들의 발표에서 더러 시사점을 얻기로 하였다. 이 자리를 빌려 당시 나의 수업에 열의를 갖고 참여한 강국주, 박현숙, 김인나, 심지원, 이효원, 고은임, 이경근 등 여러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연암강회에서는 연암 산문의 원의原義를 살리면서도 오늘날의 한글 독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쉽고도 유려한 번역문을 내놓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이 책의 번역문은 바로 이 연암강회에서 이룩된 성과다. 이 책에서는 연암 작품의 한문 원문을 싣지 않았다. 한글 번역만으로 연암 산문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끼게 하자는 것이 저자의 원래 의도이기 때문이다. 원문에 표점을 붙이는 일, 자세한 주석, 교감 등 고도의 학문적인 엄격성이 요구되는 다른 여러 작업은 곧 이어 연암강회에서 공동 작업으로 따로 책을 낼 예정이기에 그쪽으로 미룬다.

 

 

 

연암의 글을 읽어야 자구 조직의 치밀함과 사태를 꿰뚫는 깊은 시선이 보인다

 

9년 전, 나는 나의 아버지 박지원(원제 과정록過庭錄’)이라는 역서를 낸 적이 있는데, 그 서문의 첫 머리에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 (중략)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라고 쓴 바 있다. 당시 나는 이른바 근대 부르주아 문학, 국민문학의 관점에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보다 근원적인 견지에서, 사유와 미학의 관련, 삶 속에서 도모되는 문학의 궁극적 가능성 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이 번역서가 나오고 나서 며칠 후, 지금 이름은 잊어 버렸지만, 어떤 신문 기자한테서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그 요지인즉슨, 셰익스피어ㆍ괴테 운운한 게 대체 무슨 말인가, 연암의 어떤 면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호질허생전양반전열하일기등등의 작품에 대해 하는 말인가, 뭐 이런 거였다. 이 기자는 적어도 이런 작품들의 성취와 특징을 그런대로 알고 있는 듯했으며, 연암이 시사 비판과 풍자에 뛰어난 대가라는 점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교과서적 통념 이상의 것은 갖고 있지 못하다고 여겨졌다. 아마 그래서 연암을 셰익스피어와 괴테에 견준 나의 비유가 잘 이해도 되지 않고, 내심 과한 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어, 나에게 전화로 물어 온 것이리라. 이 기자의 질문에 대체 어떻게 답해 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연암 글쓰기의 진수, 자신의 사유를 풀어내는 그 놀라운 능력하며, 자구字句를 단련하면서 물샐틈없이 삼엄하게 한 편의 글을 조직해 내는 그 빼어난 솜씨하며, 자신의 안팎을 반성적으로 성찰해 내는 저 깊은 시선 등에 대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작품을 예로 들어가며 말해주어야 하리라. 하지만 그것은 며칠을 말해도 부족할 것이며, 또 며칠을 말한다 한들 소용이 없는 일일 것이다. 작품을 스스로 읽으며, 스스로 생각하고 음미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떤 과일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그 과일의 독특하고 미묘한 맛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줘 봤자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당시 그 기자에게 그건 도무지 설명해 줄 수 없는 일이라고 짤막하게 말한 후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책은 부족한 대로 9년 전의 그 기자 분에게 들려주는 답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20064

박희병

 

 

 

인용

목차

작가 이력 및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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