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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입국론, 총론 - 2. 진보교육감 시대의 의의 본문

책/교육(敎育)

교육입국론, 총론 - 2. 진보교육감 시대의 의의

건방진방랑자 2022. 2. 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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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보교육감 시대의 의의

 

 

교육감만 장악하면 역사의 대세를 장악하는 대승

 

우익보수의 한 진실한 대부임을 자만하는 언론인이 이와 같이 말했다: “새누리당이 6·4 지방선거에서 참패해도 전 학생인구의 40%를 관장하는 서울·경기도의 교육감만 장악하면 승리하는 것이요, 반대로 대승한다 하여도 서울·경기도 교육감을 놓치게 되면 대패하는 것이다. 이것은 헌법정신이 사느냐 죽느냐의 대결전이다.”

참으로 통찰력 있는 명언이다. 도대체 그분이 생각하는 헌법담론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국가의 운명을 통시적으로 생각하는 혜안은 가상한 것이 있다.

 

 

'반대한민국적 성향=좌파 후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최근 나는 어느 유수 대학에서 이공계 1·2학년 500여명을 상대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세월호 참변 이후의 참담한 분위기였고, 강연자인 나의 가슴에는 무엇인가 조국의 앞날에 관하여 우려를 전하고 싶은 파토스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40분 정도였다. 여하(如何)한 대중이든 40분 정도의 시간 동안 나의 말에 집중을 시키지 못하게 만든 경험은 나의 기억에 있지 않다. 나의 강의는 한 달 전부터 학생들에게 예고되었고, 총장과 교수님들도 참석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도 강연장을 가득 메운 상태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매우 조용하게 앉아 있었으며 주변 학생들과 담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이크가 쩌렁쩌렁 울리는 매우 좋은 시설의 강론장이었는데, 5분이 지나도록 나의 언변에 귀를 기울이는 학생이 없었다. 차라리 담벼락에 대고 이야기하라면 그런대로 일방적인 담론을 쏟아놓을 수도 있겠지만, 살아있는 인간 앞에서 1밀리미터도 교감의 통로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나는 울화가 치밀고 말았지만, 계속 학생들을 달래면서 강론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15년 2월 11일 전남교육청 강연의 모습. 강연마다 공감대의 가능성은 확실히 다르겠지.  

 

 

 

대학생들의 아파티

 

알고 보니 그 학생들은 출석체크가 되기 때문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책상 밑으로 눈을 깔고 카톡에 열중하였고, 카톡을 안 하는 학생들은 조용히 잘 뿐이었다. 도올이 누구인지, 자기들이 공부하는 과학의 위대성이 무엇인지, 도올의 강론이 자기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일체 자기향상(自己向上)에 관한 의지나 호기심이 부재한 상태였다. 500여명 중에 내 말을 듣는 초롱초롱한 눈빛은 몇몇 눈동자에 불과했다. 초현실주의적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에게는 진실로 깊은 상처를 안겨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내가 사랑해온 내 나라 대한민국이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그 자리의 대한민국 젊은이들을 특징지은 것은 오직 아파티(apathy), 즉 무감(無感), 그리고 개별화된 시공간 속에 자기를 단절시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창문 없는 모나드(Monad)형이상학적 철학에서, 모나드(단자)'단일의 본질'에 해당하는 개념이다에게는 예정조화라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감각만 있는 것이다.

 

 

세월호 단식 투쟁장 옆에서 폭식 투쟁이 열린다. 무감이 만든 사회의 모습.  

 

 

 

세월호 참변에 대한 안타까움

 

세월호 안에서 무기력하게 스러져간 어린 생령(生靈)들의 행동은 주어진 상황에서 누구라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최선의 방도였다는 것을 우리는 공감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 학생들의 상당수가 애절하게 부모님들과 카톡을 했다. 그 덕분에 귀중한 자료가 많이 남았다. 그래서 국가 시스템의 무능의 실상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적 차원에서 안타깝게 반추해볼 수도 있는 또 하나의 가설은 카톡이 아닌 생존의 방법의 모색을 위한 진지한 호상적(互相的) 토론이 우선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선중의 마이크에서 울려 퍼지는 가만히 있으라는 절대명령이 있었다 할지라도 생사의 기로에서는 생존을 향한 본능적 욕구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충분한 토론의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공간은 카톡과 더불어 개별화될 수밖에 없었던 문명의 구조적 현실태에 종속되어 있었고, 절대적 권위에 대한 물리적 순응만이 그들의 행위를 지배했다.

 

 

카톡으로 그 상황을 전했기에 그 상황은 여실히 남았다.

 

 

앞서 지방선거를 예견한 언론인이 헌법 수호를 운운했지만, 헌법이라 하는 것도 필요에 따라서는 개정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헌법 수정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헌법도 수정될 수 있는 것이어늘 가만히 있으라는 마이크 소리가 개정의 대상일 수는 없겠는가? 생존의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탐색대를 밖으로 내보내면서 긴밀한 상황연락을 취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요번 6·4 지방선거는 가만히 있으라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기존 세력의 역사몰이 전체에 대한 응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순결한 단원고 학생들은 우리 시대의 교육이 저지른 죄업의 희생양이었다.

 

보수는 표가 갈리고 진보는 단일화되었기 때문에 진보가 이긴 것이 아니다. 보수를 표방하는 교육감들의 정책방향이 근원적으로 불성실하고 이 땅의 자녀들을 사지로 휘몰고 있다는 불안감이 국민들의 일반정서를 각성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보교육감들의 정책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나 요구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진보교육감들이 좀 더 성실하고 신중한 느낌을 준다는 것, 그리고 보수교육감들의 정책이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는 마당에는 진보세력에게 일단 기대를 걸고 보자는 애절한 마음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17명의 교육감 자리 중에서 13석을 진보세력이 차지했다는 것은, 내가 단언하건대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보다도 더 큰 역사적 의의를 갖는 사건이다. 더구나 노무현도 바보가 되고 말았던 부산과 경남 지역마저 진보교육의 정신에 겸허하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은 군사독재 시절의 부마민중항쟁에 비견할 수도 있는 민중역량의 표출이다.

 

 

 

3곳만 빼고 진보교육감이 탄생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과연 이 기회를 살릴 수 있을까?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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