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사론
1. 자유가 대중교육의 목표여선 안 되는 이유
전남대학교 철학과의 경우
인문학 르네상스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전남대학교 철학과에서는 1학년 정원 35명 중에서 6개의 자리를 특별히 대안학교 출신의 학생들에게 수능점수에 관계없이 배당한다고 한다. 처음에 3명만 받았다가 그들의 성적이 너무 우수하고 또 인간적으로 성숙되어 있어 6명으로 늘렸는데, 이들의 존재는 과의 면학 분위기를 놀랍게 향상시키고 있다고 한다. 자유로운 사색과 억압받지 않는 삶, 그리고 목전의 당면한 성취 스트레스에 오염되지 않은 여유로움을 지닌 어린 생령의 정신능력이 철학을 공부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한 토양을 보유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입학 내규가 국립대학과 교수들 자체의 합의에 의하여 성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혁명은 바로 이렇게 로칼하고도 자율적인 작은 불씨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중ㆍ고교의 현실태가 대학입시에 영향을 주는 좋은 사례로서 우리가 주목할 만하다. 성공회대학교에도 대안학교ㆍ혁신학교 출신들을 따로 배려하는 입학제도가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서울시교육청에서도 엄선된 대안학교ㆍ혁신학교 출신의 우수학생들을 대학과 협의하여 추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 성공회대학교엔 대안학교 전형이란 게 자리한다. 주영익이 이 전형으로 글로컬아이티학과에 들어갔다.
협동과 협력의 뉘앙스
나는 앞서 시민의 제1의 덕성을 자유 아닌 ‘코오퍼레이션(cooperation)’이라는 영어단어를 써서 말했는데, 그것을 ‘협동’이라 번역하지 않고 ‘협력’이라고 번역했다. 협동이라는 단어는 전체우선주의에 의하여 개체가 말살되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협력’이란 대등한 개체 간의 협조양식을 의미한다. 민주는 법질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자도 우리 인생이란 송사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 했고, 사회질서를 법으로 유지하게 되면 민중이 피하는 것만 배우고 염치를 상실한다고 했다[民免而無恥 『論語』 「爲政」]. 민주는 인간개체 내면의 덕성의 공통분모가 없이는 성립할 수가 없다.
▲ 2013년 지리산 여행 때 협력의 절정을 봤다.
자유는 일시적 느낌
여기 협력과 대극점에 있는 ‘자유’라는 말은 ‘freedom’의 번역술어이다. ‘自由’라는 단어는 선진문헌에는 나오지 않는다. ‘freedom’은 ‘free’라는 형용사의 명사형인데, ‘free’는 반드시 ‘from’이라는 전치사를 수반한다. 자유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반드시 ‘……로부터의 자유’라는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다. 절대적 자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란 결국 억압으로부터 풀려날 때 느끼는 일시적인 느낌일 뿐이다. 이러한 일시적 느낌을 인생의 지고의 목표로 삼거나, 보편교육 즉 대중교육의 주제로 삼을 수는 없다.
▲ 자유하면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은 자유에 탐닉하게 되면 반드시 자기파멸을 가져오게 되거나, 향유하던 자유를 헌납하게 된다. 이 자유의 헌납이 인간이 사악한 종교에 굴종하게 되는 이유다. 하나님이라는 추상체가 굴종의 대상으로는 제일 마음 편한 것이다. 사교(邪敎)는 이러한 인간의 약점을 활용하여 사익을 취한다. 인류가 자유를 처음으로 흠뻑 누리게 된 20세기 벽두에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창궐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 나치즘은 자유가 방종으로 흐른 결과였다.
2. 소유하려는 마음이 자율을 제약하다
자유에서 자율로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는 일시적인 느낌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로울 수 없는가? 물론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어떻게? 존재모드를 자유에서 ‘자율’로 전환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자율(自律)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규율을 부과하는 것이다. 인간은 욕망의 주체이다. 욕망은 공생의 진리를 부정하는 강렬한 유혹성을 가지고 있다. 사적인 욕망에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법정 스님께서 그토록 가르치시고 실천하신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 우리의 존재모드를 소유모드에서 무소유모드로 전환하는 것, 이 전환을 나는 ‘협력(cooperation)’이라고 부른 것이다.
▲ 법정스님 다비식. 남김 없이 가셨다.
칸트의 자율적 도덕론
칸트는 이 자율의 궁극적 원리를 나의 주관적 의지의 격률이 항상 동시에 모든 사람이 같이 지킬 수 있는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한다고 하는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에 두었다. 그리고 인간은 수단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목적의 왕국에서 같이 공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진보교육 즉 혁신교육이라는 것은 피교육자인 학생을 입시나 여타 사회적 경쟁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 자체의 인격을 목적의 왕국에 안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보교육의 원리가 왕왕 서구적 시장중심주의적 자유주의와 혼효(混淆)되고 있다는 것을 나의 공부이론과 협력이론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 진보교육은 학생의 그 자체를 중시하는 교육이다.
소유의 비극
자유란 결국 욕망에의 굴종이다. 우리에게 식욕이라는 게 있다. 고량진미에 대한 유혹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도락이다. 그런데 이 식욕은 기껏해야 1.5리터 가량의 위벽의 제한된 공간에 제약 당한다. 색욕도 마찬가지다. 색도락을 즐길수록 인간의 신체가 파멸되어 간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본인들이 먼저 깨닫는다.
그런데 포화점을 모르는 욕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소유욕이다. 인간의 소유욕은 우주를 다 소유해도 끝나지 않는다. 지식도 역동적 깨달음의 여정이 아니라 아파트나 자동차 같은 재산목록처럼 소유창고에 축적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사랑도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감금하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도 인간이 신을 소유하고 신이 세계를 소유하는 소유의 순환으로서 이해된다.
▲ 소유욕은 무한한 소유를 부추긴다.
쾌락의 만족과 독락의 폭력사회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의 미신 중의 하나가 감각적인 쾌락을 무한정 만족시킴으로써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지상명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검증되지 않는 신념이다. 무한한 개인적 자유의 실현을 향하여 역사가 진보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조차도 사람들의 감각적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기 위해서 물질적 풍요를 실현한다고 하는 혁명목표의 나이브한 신화를 버리지 않는다. 인간이 소유를 통하여 삶을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형성한다는 꿈은, 결코 소비를 조장하는 극소수 대기업과 그 기업과 결탁된 관료제의 폭력이 조작하는 자국민의 식민지화정책의 일환일 뿐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면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
소유모드에 빠져있는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이 자기가 소유하는 것의 양과 질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에 되도록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며, 이를 위하여 힘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힘의 요청이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거부하는 ‘독락(獨樂)’의 폭력사회를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 손바닥 뉴스에서 '여민동락'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협력과 무아
‘협력’이란 인간 존재의 소유모드를 근원적으로 단절시키는 ‘무아(無我, anātman)’의 철학적 배경이 없이는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유란 쉬운 것이나 자율이란 어려운 것이다. 자율이란 반드시 ‘교육’을 통하여 달성되는 ‘교양’이며 이 교양의 집합을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civilization’이라는 단어는 ‘civilized(교양 있다)’라는 단어와 상통하며, 시민(civitas)이라는 말과도 어원이 상통한다. 시민, 교양, 문명, 협력, 무아가 결국 동일한 가치관의 내재적 맥락을 갖는 것이다.
▲ 시민, 교양, 협력, 문명은 모두 같은 말이다.
3. 학생은 온전한 개체이기에 풀어둬도 될까
존 듀이 철학을 왜곡하지 말라
그런데 진보주의교육이 왕왕 자유주의로 오해된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적 가치를 지상의 테제로 삼는 성향이 있다. 개체지상주의는 결국 방종으로 귀결된다. 몬테소리(Montessori), 섬머힐(Summerhill)류의 열린학교가 초창기의 건강한 혁명적 성격과는 달리 실패로 끝나는 이유가 결국 ‘방종’과 ‘훈육의 결여’, ‘결과적 진부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미국 교육철학의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그의 리버랄리즘적 교육관의 계승자들이 시행한 교육방법론의 파탄은 미국의 공교육을 망쳐버리고 미국 사회를 근원적으로 해체시키는 데 공헌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 존 듀이의 사상은 교육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학생은 결코 온전한 개체라고만 말할 수 없다
듀이 철학이 역동적 과정을 중시하지만, 교육이 ‘과정 그 자체’에 대한 신화적 예찬에만 머물게 되면 아무런 목표설정이나 ‘휴먼빌딩(human building)’의 결실이 부재하게 된다. 한국의 학부모들이 초창기의 대안학교를 불안하게 바라보았던 제1의 이유였다. 어설프게 혁신교육을 외치는 자들이 흔히 말한다: 학생은 온전한 개체이므로 그 온전한 개체의 가능성이 스스로 발현되도록 돕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다. 말인즉 매우 근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학생의 현실태는 온전한 개체가 아니다. 학생은 교육받기 위해서 학교에 오는 것이다. 목가적인 에밀(Émile)의 체험을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온전한 개체라는 것은 학생을 바라보는 시각설정의 이데아티푸스(ideal type, 이상형)적 좌표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곧 학생의 현실태일 수는 없다.
▲ 슈타이너 학교에서도 가능성은 이미 개인 안에 있다는 말을 했었다. 이 말을 나도 좋아한다.
길거리에 가득 찬 것이 다 성인
맹자도 사람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 했고, 나는 성인과 동류(同類)라고 말했다. 그리고 왕양명의 제자들은 “길거리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성인이다[滿街人都是聖人]”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것은 19세기 조선의 유자 최한기(崔漢綺, 1804~77)의 말대로, 인간의 가능성을 말한 것이지 현실태의 승인은 아니다.
인간은 교육되어야 한다. 혁신학교의 자발성은 교육적 계기의 효율적 방법론을 말한 것이지 자발성 그 자체에 절대적 가치를 두자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무아적 자기규율의 난제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협력하는 인간(homo cooperativus)’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 지리산 여행은 우리에게 협력하는 인간이 무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대안학교와 규율
이러한 교육의 수행자가 바로 ‘교사’이다. 모든 낭만주의 교육, 열린 교육, 자유 교육의 낭패는 바로 교사와 학생을 완벽하게 평등한 개체로 설정하는 천진스러운 낙관주의에 있다. 나의 ‘공부론’은 이러한 낙관론을 거부한다.
모든 성공적인 대안학교ㆍ혁신학교는 자율적 규율성을 강조한다. 내가 경험한 김제의 지평선중ㆍ고등학교는 매우 실험적인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놀라운 자발적 규율성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토록 학생들이 예절에 밝은 것이다.
▲ [검단산]에 갈 때 아이들은 스스로 교칙을 정해 지켰다.
4. 교육의 주체인 교사를 존중하라
에꼴 노르말의 경우
프랑스가 인류의 인문주의세계에 자랑하는, 세계지성계를 선도한 위대한 사상가들을 배출한 걸출한 교육기관으로서 에꼴 노르말 쉬페리외르(École normale supérieure)라는 것이 있다. 앙리 베르그송, 에밀 뒤르껭, 사르트르, 보봐르, 메를로 퐁티, 알튀세르,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 …… 이 셀 수 없는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 한 교육기관에서 쏟아져 나왔다. 참으로 경이롭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 프랑스 교육부 산하의 교육기관이 고등학교 교사를 배출하기 위한 ‘사범학교’로서 출발한 기관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프랑스에서는 중ㆍ고등학교 교사도 ‘프로페쇠르(professeur)’라고 부른다. 에꼴 노르말을 거친 사람들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다가 논문을 써서 대학으로 가기도 하고, 또 대학에서 가르치던 사람이 고등학교 교사를 택하여 전근가기도 한다. 교사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다른 것이다.
▲ 모인 선생님들. 특권 의식이 아닌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사범대학 전통은 일제 관료주의 연속태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는 우리나라의 사범대학제도와 교사임용고시제도를 전면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대학에 문리과 대학의 국문과, 물리학과와 사범대학의 국문과, 물리학과가 2원적 구조로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 대학에서는 무전제의 순수학문을 전공하고, 교사의 임용은 대학원 레벨의 고등교육기관의 심오한 훈도를 받은 자들에게 자동적으로 허락되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서울대학교를 대학원 수준의 에꼴 노르말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 미래비전의 중요한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새 질서는 당장 실천하기 어려운 과제상황이므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교육개선을 이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 중등임용시험은 엄청 어렵고 지식적인 측면만 강조하게 됐다.
교육의 주체는 교사
교육의 주체는 교사이지 학생이 아니다. 학생은 피교육자이며, 입학하여 졸업하는 과객(過客)이다. 객(客)에 대하여 주(主)의 자리는 선생이 지키는 것이다. 학교의 주체도 교사이지 교장ㆍ교감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교육개혁의 주체도 결국 교사이다. 교사는 교육의 알파이며 오메가이다. 교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없이는 우리는 교육개혁을 실현할 수 없다.
교육개혁이란 결국 교사가 학생들의 교육 그 자체에 헌신할 수 있는 존귀함의 입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학교를 학부형이 좌지우지하고 교사는 그 하수인인 꼴, 교장ㆍ교감은 교육청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하달하며 교사를 닦달하고 있는 꼴, 이것은 도무지 한참 잘못된 판국이다. 『여씨춘추』 「존사(尊師)」편에는 중국의 모든 고래 성인이 스승을 존귀하게 섬기지 않은 자가 없었다[未有不尊師者也]고 말한다. 스승을 존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대인(大人)을 만나본 적이 없는 자가 대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 좋은 스승을 두 명을 만났고, 이곳에선 맘껏 공부할 수 있어서 좋다.
5. 교사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제안
교사혁명의 다섯 가지 조건
나는 교사의 존엄성과 학교의 면학분위기를 제고시키기 위한 현실적 개선방향으로서 다음의 다섯 가지 테제를 제시한다.
첫째, 교사는 교육의 커리큘럼을 조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가 주체적으로 시험문제를 내고 자기가 채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개성 있는 교육이 가능해지는 첩경이다. 수학자ㆍ물리학자로서 20세기의 가장 완정한 형이상학적 우주론을 수립한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1861~1947)는 교사가 자기가 가르치는 과목의 교과과정을 자신의 주체적 판단에 따라 상황적으로 조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문ㆍ과학교육의 기본여건에 미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현재 입시교육의 전체주의적 엄격성 때문에 그러한 권한을 교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교사의 교수내용에 창의성과 자발성이 확보될 수 없다. 획일적 기준에로의 순응만 있으면 학생은 교과내용에 대한 흥미를 상실한다.
둘째, 교사에게는 체벌의 권한이 있어야 한다. 교사가 체벌을 할 수 있다 없다 하는 문제가 법규적으로 논의된다는 것 자체가 비교육적인 것이다. 요즈음처럼 민주화된 사회에서 교사가 체벌을 할 수 있다 할지라도 과연 체벌의 어려움을 감내할 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공부는 몸의 공부이며 교육은 몸의 교육이다. 말의 한계를 느낄 때 각성의 계기로서 체벌을 사용하는 것은 유용한 방편이 될 수 있다. 단지 체벌은 ‘때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감정의 표출이 아니며 객관화된 제식(objectified ritual)이라는 것, 그리고 신체적 상해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체벌에 관해서는 학생들과의 자율적 약속의 전제가 있으면 그만이며, 시나 고전 구절을 외우게 한다든가 운동장을 몇 바퀴 뛰게 한다든가 하는 다양한 방법이 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학부형이 학교에 항의하는 일체의 행위를 학부형 스스로 부끄럽게 느끼는 전반적 사회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학생의 본질적 인권이 훼손당하는 중대사 이외로, 점수나 학교행정상의 사소한 문제에 학부형이 개입하는 행위는 차단되어야 마땅하다. 학부형은 어떠한 경우에도 임의적으로 교무실을 침입할 수 없다.
넷째, 교감·교장의 평가기준이 교사들의 창의적인 교육적 가치에 대한 기여도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어야 한다. 현금의 교육개혁은 혁신학교 운운하기 전에 이미 교장 한 사람만이라도 위대한 인격체로서 교사들을 보호하고 학생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모범을 보인다면, 학교분위기의 많은 문제가 개선될 수 있다. 장학사가 되기 위하여 일제식 관변주의 사고의 악순환을 영속시키고 있는 교장의 행태는 정죄되어야 한다.
다섯째, 교육청 자체 내의 수많은 비리가 깨끗이 척결되어야 한다. 나와 대학동기인 이재정 교육감에게 나는 이런 말을 건넸다.
“여보게, 혁신학교에서는 교장을 공모한다는 데 내가 한번 응모해보면 어떨까?”
한참 생각해보더니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자격여건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당신은 나이가 많아 실격일 것 같구만.”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럼 한 3개월 공석을 메우는 기간제 교사를 신청해보면 어떨까?”
“그건 될 수 있겠는데. 암 되구말구!”
▲ 학부모가 교권에 개입하는 것들을 줄여야만 교육이 바로 선다.
『예기』 「학기」의 교학상장론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중ㆍ고교 교육현장에서 내가 한 말들을 차분하게 검증하고, 새롭게 ‘교육함’을 배워가는 체험을 해보고 싶다. 교사의 덕성은 『예기』 「학기(學記)」에 나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이 한마디! 「학기」는 말한다.
아름다운 요리가 앞에 있어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 길이 없고, 지극한 도리가 앞에 있어도 배워보지 않으면 그 위대함을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고 난 연후에나 비로소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가르쳐 보고 난 연후에나 비로소 교육의 곤요로움을 깨닫는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연후에 사람은 진정으로 자기를 반성할 수 있고, 교육의 어려움을 깨달은 연후에 교육자는 자신의 실력을 보강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하노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서로를 키운다!
雖有佳肴, 不食不知其旨也. 雖有至道, 不學不知其善也. 是故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知不足然後能自反也. 知困然後能自强也. 故曰敎學相長也. -『禮記』 「學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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