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석별의 아쉬움을 잇는 ‘사이’ 이야기
갑자기 문세가 확 전환되면서 앞서 「『말똥구슬』 서문蜋丸集序」에서 봤던 것과 같은 이상한 일화가 제시되고 있다. 뭘 말하려는 걸까?
처화가 툭 던진 물음은 방망이 소리가 먼저냐 다듬잇돌 소리가 먼저냐는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일까? 방망이 소리일까, 다듬잇돌 소리일까? 영탁의 대답이 절묘하다. 어느 것이 먼저랄 게 없으며 소리는 그 ‘사이’에서 난다는 것. ‘사이’라는 말의 원문은 ‘제際’다. ‘제’는 「『말똥구슬』 서문蜋丸集序」에 나온 ‘중中’이나 ‘간間’과 동일한 개념이다. 「『말똥구슬』 서문蜋丸集序」이라는 글을 읽을 때 이미 자세히 살핀 바 있지만, 황희 정승은 이가 옷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요 살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옷과 살 ‘사이(間)’에서 생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소리가 방망이도 아니요 다듬잇돌도 아닌 그 ‘사이’에서 난다는 영탁의 대답은 황희 정승의 말과 동일한 논리이자 어법이다. ‘중’을 강조하는 연암의 독특한 사유 구조가 금강산 유람 중에 접한 불교 체험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이 단락을 통해 확인된다.
그런데 백화암 암주라고 한 처화는 준대사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앞에서 「관재라는 집의 기문觀齋記」을 읽은 바 있는데, 그 글에는 연암이 백화암을 처음 찾아가 준대사와 그의 동자승이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것을 목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연암은 준대사가 설파한, ‘이름이란 아무 실체가 없으며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는 메시지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이로 보면 연암이 백화암에 묵을 때 선승에게서 받은 영향은 비단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연암 사유의 전개 과정에서 ‘백화암 체험’이라는 모티프를 하나 특별히 내세움직하다. 연암의 사유 태도에 유의해서 말한다면 이 백화암 체험을 계기로 연암은 마침내 중년기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이처럼 연암의 백화암에서의 선禪 체험은 그의 생애를 구획 짓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건 그렇고, 이 글은 편지 아닌가? 연암은 편지에서 왜 이런 말을 갑자기 하는 걸까? 더구나 앞 단락에서는 석별을 아쉬워하는 말을 너무나 시적인 어조로 말해놓지 않았던가. 이 단락은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생각이 빠른 독자라면 이런 의아심을 가질 법하다. 하지만 연암의 글은 기복起伏과 반전反轉, 전후 조응前後照應이 많아 끝까지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끝에 가서 비로소 쫙 하나로 꿰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 전문
인용
1. 경지란 누구인가?
5. 총평
- 백화암百華菴: 내금강 마하연에 있던 암자이다. 연암은 29세 때인 1765년 가을에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던 중 이 암자에 묵은 적이 있다. [본문으로]
- 암주菴主: 암자의 주인 노릇하는 승려를 말한다. [본문으로]
- 비구比丘: 남자 중을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암주 처화의 상좌上佐(=제자 중)를 가리킬 터이다. [본문으로]
- 게偈: 산스크리트어 가타gāthā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어漢語로는 ‘송頌’이라 번역한다. 산스크리트어와 한어를 합쳐 ‘게송偈頌’이라고도 한다. 부처를 찬양하거나 깨달음을 읊은 말이다. 여기서는 깨달음을 읊은 말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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