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야회록(書齋夜會錄)
신광한(申光漢)
* 해설 : 기재기이의 두 번째 작품, 서재야회록 역시 사물을 의인화한 몽유록 형태의 작품이다. 네 벗이란 곧 문방사우로, 치의자는 벼루, 탈모자는 뚜껑 없는 붓, 백의자는 종이, 흑의자는 먹을 지칭한다. 매우 재미있는 발상의 작품이다.
선비가 한 사람 있었다. 이름은 밝혀 적지 않는다. 고풍(古風)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기개가 높아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집은 아주 가난하였으나 뜻은 활달하였다. 일찍이 달산촌(達山村)에다가 작은 오두막을 하나 지어놓고 문 밖 출입을 끊고 그 곳에서 지내며, 오직 책 읽는 데에만 재미를 붙이고 살았다. 이웃조차도 그의 얼굴을 못 본 지가 여러 해되었다. 해는 대황락(大荒落), 중추(仲秋) 보름 이틀 전, 산 속 서재(書齋)에 비가 막 개어 밤 기운이 맑고 서늘하였다. 맑은 하늘엔 은하(銀河)가 흐르고 밝은 달빛 아래 이슬이 내렸다. 쓸쓸히 송옥(宋玉)이 가을을 슬피 노래했던 심정이 느껴지고 한 줄기 이백(李白)이 달을 감상했던 감흥이 일었다. 서당(書堂)을 걸어 나와 뜰을 거닐며 혼자서 시를 읊었다.
丁丁伐木澗之濱 | 떵떵 나무 찍는 산 속 개울 물가 |
岑寂書齋少有隣 | 덩그러니 솟은 서재 홀로 이웃도 없어라 |
搗藥只應憐玉兎 | 달 속엔 약 찧는 가련한 옥토끼 |
停盃誰與問氷輪 | 술잔 들고 누구와 달세계 이야기할까 |
楓林滴瀝時聞露 | 단풍 숲속 때때로 이슬 지는 소리 |
門巷淸深不見塵 | 사립은 말끔히 한 점 티끌도 없어라 |
一別鳳樓今幾載 | 봉루를 떠나온 지 이제 몇 핸가 |
美人何得更愁人 | 미인을 어떻게 만날까 다시 마음이 슬퍼지네 |
이렇게 읊고 나서 몇 번이고 탄식을 하였다. 밤 공기가 썰렁하여 잠은 달아나버리고 해묵은 오동나무를 더듬어서 기대어 앉았다. 이때 밤은 이미 삼경(三更)을 넘었고 전혀 인적이 없었다. 문득, 말소리인 듯 웃음소리인 듯 소곤소곤하는 소리가 서실(書室) 안에서 흘러나왔다. 선비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과연 서실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선비는 혹시 도둑이 들었나 생각하고 맨발로 살금살금 바싹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이때 달빛이 창문으로 흘러들어 방안은 낮처럼 환했다. 창틈으로 가만히 엿보았다. 방안에는 네 사람이 둘러앉아 있는데, 생김새가 다 다르고 옷차림도 모두 달랐다. 한 사람의 치의(緇衣)를 입고 현관(玄冠)을 썼는데 무게가 있고 꾸밈이 없었으며 나이가 가장 많았다. 한 사람은 반의(班衣)를 입고 탈모(脫毛)하였는데 맨머리 상투가 위로 불쑥 솟았고 기품이 날카로웠다. 한 사람은 백의(白衣)를 입고 윤건(輪巾)을 썼는데 용모가 흰 옥과 흰 눈처럼 깨끗했다. 한 사람은 흑의(黑衣)를 입고 흑모(黑帽)를 썼는데 얼굴이 검푸르고 매우 못생기고 작달막하였다. 네 사람이 서로들 말하기를,
“누가 무(無)로 몸을 삼고 생(生)을 임시로 가탁한 것으로 보고 사(祀)를 본래의 참모습으로 여길 수 있을까? 누가 동(動)과 정(靜), 흑(黑)과 백(白)이 같은 이치라는 것을 알까? 그런 자가 있으면 내가 그와 친구가 되리라.”
하였다. 네 사람이 서로 쳐다보며 웃고 말하기를,
“사(사)와 여(與)와 리(梨)와 래(來) 정도라면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고 할 수 있겠지?”
하고 무릎을 당겨 바싹 다가앉았다. 백의자(白衣者)가 말하기를,
“오늘밤 주인이 집에 없는 것을 틈타 우리가 방을 독차지하고 즐기고 있으니, 너무 방자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탈모자(脫帽者)가 머리를 저으며 말하기를,
“주인께서 세상을 등지고 외진 곳에 살면서 함께 지내는 자라곤 우리들뿐이었다. 우리가 살갗을 문질러대고 뼈를 갈아내고 머리를 적시고 등을 축축히 젖게 하면서 일을 맡아 해온 지 오래다. 그런데 나는 노둔하다는 놀림을 당했고 자네는 경박하다는 나무람을 들었으며 저 사람은 운명이 다하였고 이 사람은 이가 빠져 못 쓰게 되었다. 앞으로 주인과 더불어 지낼 날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자리에서 한 마디 아니하기에는 저 고운 달이 너무나 아깝구나.”
하였다. 그러고는 원진(元稹)의 ‘흰 머리 늙은이 어디로 갈거나? 님 향한 붉은 마음 아직도 남았는데[白首何歸 丹心來泯]’라는 시구를 외고는 수 차례 오열하였다. 좌중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백의자가 말하기를,
“한갓 남관초수(南冠楚囚)의 행실이나 본받아 둘러앉아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어떻게 회포를 달랠수 있으리요.”
하였다. 이어 탈모자에게 농담을 걸며 말하기를,
“자네는 머리가 검으면서 '흰 머리'라 하고 속이 텅비어 마음이 없으면서[無心] ‘붉은 마음[丹心]]이 있다고 하니, 될 말인가?”
하였다. 탈모자가 웃으며 말하기를,
“고루하다. 구망씨(勾芒氏)는 시를 모르는구나. 이 사람이 어찌 흰 바탕에 채색을 한다는 뜻을 알겠는가?”
하였다. 흑의자(黑衣者)가 치의자(緇衣者)에게 눈짓을 하고 말하기를,
“두 사람은 입을 다물게.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할 수 있어야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거라네.”
하였다. 치의자가 농담으로 말하기를,
“나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옥(玉)을 다듬을 수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먹을 다듬는다는 말은 못들었네.”
하였다. 흑의자가 말하기를,
“그래, 과연 옥이 아니란 말이지?”
하였다. 드디어 서로들 손을 함께 잡고 웃었다.
[중략 - 네 사람(?)이 서로 시를 지으면서 즐기다가, 밖에서 엿보고 있던 선비와 만난다. 넷이 각기 자신의 내력을 길게 이야기한다. 그에 이어 아래의 내용이 이어진다.]
선비는 비록 “예예”라고 대답은 했으나, 네 사람의 말이 무슨 뜻인지 끝내 알 수가 없었다. 네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밤 이런 만남은 사실 하늘이 도운 것입니다. 다만, 별자리도 북두성도 많이 회전하였고 새벽달은 장차 서산에 떨어지려 하니, 느긋이 남은 회포를 다 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아까 방안에서 여러분들이 각각 시를 지으시던데, 그것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네 사람이 말하기를,
“감히 말씀대로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치의자가 시를 지었는데,
구름 사이 밝은 달이 아름다움 다투는데
온 세상에 누가 옛 견씨(甄氏)를 돌봐 줄까
웃지들 마라 돌 창자가 지금 모두 닳은 것을
눈으로 보았네 한유(韓愈)가 명(銘) 짓던 봄을
하였다. 흑의자가 시를 짓기를,
검은 가루 다 찧는 건 흰토끼의 근심
창힐(倉頡) 글자 배우던 때 이 몸 태어났네
이마 다 닳도록 세상 구제하는 일이라도
양주(楊朱)에게 한 발도 양보하지 않으리
하였다. 탈모자가 시를 짓기를,
시서(詩書)를 전한 지도 세월이 오래 흘러
젊은 얼굴 없어지고 머리 허옇게 세었네
풍류롭던 옛일은 아무도 관심이 없으니
술 마시며 글재주 다투는 일 이제 다 틀린 일이로세
하였다. 백의자가 시를 짓기를,
유유히 내려오던 죽백(竹帛) 모두 연기 되어버리고
누덕누덕 만신창이나마 나로부터 전해졌네
석거각(石渠閣)의 많은 책들 짐바리로 거둬들여
환한 달빛 영롱한데 섬계(剡溪) 뱃놀이 저버렸네
하였다. 선비는 깊이 음미하며 세 번을 반복해 읊어보고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이어 답하기를,
百年交契將誰托 | 백 년 교우를 누구와 맺을꼬 하다 |
偶識山中四老人 | 우연히 산중에서 네 노인을 알았네 |
他時記得淸宵話 | 뒷날 다시 알 수 있게 오늘밤 이 이야기를 |
留作書齋□□珍 | 서재 책장 속에 보배로 남겨 두리라 |
하였다. 네 사람이 사례하며 절을 하고 말하기를,
“저희들을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버리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드디어 떠나겠다고 말하고는 어름어름 사라져버렸다. 선비는 홀로 방안에 누워 초롱초롱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거의 알 것도 같았다. 햇빛이 이미 창을 비추고 있었다. 시중드는 아이가 이상히 여기며 와서 문안하기를,
“오늘 어찌 이렇게 늦게 일어나시는지요?”
하였다. 선비가 답하기를,
“지난 밤 달이 너무나 밝아 늦게까지 시를 읊다가 아침잠이 깊이 들었었구나. 네 어찌 그것도 모르고 와서 문안하느냐?”
하였다. 일어나서 방안의 붓, 벼루, 종이, 먹을 찾아 살펴보았다. 옛날에 보관해두었던 벼루는 바람벽 흙덩이를 맞고 깨어져 있고, 붓 한 자루는 무늬 있는 대나무로 대롱을 만들었는데 뚜껑이 없었으며 너무 닳아 글씨를 쓸 수 없었고, 먹 한 개는 다 닳아 남은 것이 한 치도 안 되었다. 종이는, 며칠 전에 시중드는 아이가,
“이곳에 투박한 종이가 있는데 장단지를 덮겠습니다.”
하여, 선비가 그렇게 하라고 했었는데, 아이를 불러 그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니 바로 깨끗하고 두꺼운 종이였다. 이에 환히 모든 것을 깨닫았다. 즉시 종이로 세 물건을 싸서 담장 밑에 묻어주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그 글에,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고양씨의 후손 아무개는 삼가 좋은 술과 여러 음식을 장만하여, 감배씨의 후손 견군(甄君) 지(池)와 수인씨의 후손 진군(陳君) 옥(玉)과 구망씨의 후손 혼돈자(渾沌者) 고(藁)와 포희씨의 후손 모군(毛君) 예(銳) 네 친구의 신령께 경건히 제사를 올리노라. 아, 하늘이 성명(性命)을 부여하심에 물칙(物則)도 함께 주셨다네. 윤리에는 오륜(五倫)이 있고 덕에는 오덕(五德)이 있네. 생각건대, 붕우(朋友)는 이오(二五) 가운데 하나, 저녁에 죽어도 괜찮으나 신의가 없으면 설 수 없네. 아득히 신의가 없어지자 대도(大道)가 이에 막혔네. 사생(死生)과 귀천(貴賤)은 구름처럼 하찮은 것. 까닭 없이 뭉치는 건 장주(莊周)가 기롱했고, 이끗이 다하자 멀어지는 건 달인(達人)이 슬퍼했네. 누가 망믕를 함께 하랴. 누가 소리를 함께 하랴. 산엔 나무가 푸르고 골짜기엔 새가 지저귀네. 아, 나의 단칸방 쓸쓸한 그림자만 있었는데, 줄줄이 네 벗이 마음 통해 모였다네. 좋은 밤 환한 달빛 시를 읊고 담론했네. 속된 말은 전혀 없이 고양씨가 시작해서, 감배, 수인, 포희, 구망, 그 이야기 청아했네. 본초 만든 신농씨, 글자 만든 창힐이, 순 임금 살던 하수 물가, 고공 살던 저칠 땅, 춘추의 절필 사건, 전국시대 모수자천, 석거각과 천록각, 한제와 당황까지, 이리저리 두루 섞어 빠짐없이 거론했네. 아득아득 넓고 넓게 모든 것을 근거했네. 풍류 넘치는 이런 모임 성의 다해 이뤄졌네. 형체는 없는 데서 생겼다가 또다시 없어지고, 시간도 없는 데서 생겼다가 또다시 없어지고, 시간도 없는 데서 생겼다가 또다시 없어지네. 백년 벗을 굳게 맺어 세상 일을 토론했네. 살아서는 막역한 벗, 죽어서도 같은 무덤. 그래도 사람인데 사물만도 못할손가. 낭낭한 석별 인사 감히 부탁을 잊으리요. 내 무엇을 상심하리, 그대들이 떠난다 해도. 그대들 혼 남았으면 이 글에 감응하리.
하였다. 이날 밤 꿈에 네 사람이 와서 사례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부터 사십 년을 더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답합니다.”
하였다. 그 뒤 다시는 이런 변괴가 없었다고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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