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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 - 고증 3. 송대장군과 삼별초 본문

한시놀이터/서사한시

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 - 고증 3. 송대장군과 삼별초

건방진방랑자 2021. 8. 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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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3. 송대장군과 삼별초

 

198710월에 나는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서 완도로 현지답사를 갔다. 당장 놀라운 점은 송대장군이 완도 지역에서는 마을의 당신(堂神)으로 두루 받들어지고 있는 사실이다. 서해 도서에서 임경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송대장군의 화신인 왕대를 어떤 왜놈이 함부로 꺼내 깔고 앉았다가 그 자리서 즉사했다고, 일제하까지 그 영웅 형상의 위력이 발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송대장군이 누구냐 물으면 대개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었다. 그 지역의 향토사가인 박창제(朴昌濟) 옹을 소개받아 물어보게 되었다. 박옹은 송대장군에 관해 구전을 듣고 또 조사해서 가진 지식이 상당히 있는데 그 내용은 모두 완도군지(완도군지편찬위원회, 1977)내 고장 전통 가꾸기(박창제 편, 1981)라는 두 책자 속에 담아놓았다. 완도군지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완도는 청해진을 파한 후에 지역은 삼분되어 타군에 이속(移屬)되었고 주민들은 축출되어 사방에 흩어졌다가 세월의 흐름을 따라 하나둘씩 선조의 무덤을 찾아 완도의 구석구석에 모여들었다. 이때에 송징 장군은 완도를 점령한 삼별초의 중요 인물로서 연년이 계속된 흉년과 육지군()의 관리ㆍ토호들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주민들을 위무하고 근해를 왕래하는 세미선(稅米船)을 잡아 그 세미로 거민을 구호하니 거민들은 한천(旱天)에 감우(甘雨)를 만난 듯 구세주와 같이 존경하였다. 이때 원동(院洞)을 통과하려는 세미선이 지금의 남선리(南仙里) 앞바다를 지나간 것을 장좌리(長佐里) 장도(將島)에서 활을 쏘아 이를 막아 잡고 개머리를 지나 서해안으로 가려 하면 정도리(正道里) 송댓여[宋大將嶼]에서 활을 쏘아 이에 적중시켜 세미를 빼앗았다 한다.

송징은 원종 118월에 입도(入島)하였다가 익년 여름에 제주로 떠났으니 체류 불과 1년에 그쳤으나 완도 주민들은 송장군의 은덕을 잊지 않고 마을에 사우(祠宇)를 지어 향토신으로 섬기면서 지금까지도 음력설이나 대보름이면동중에서 가장 정결하고 살기 없는 집을 골라 제물을 장만케 하고 동민이 군고(軍鼓)를 울리며 제향하는 유풍이 남아 있다.

 

 

이 인용문에 송징의 일을 삼별초와 관련지은 것은 대단히 관심을 끈다. 위 서술 내용은 지역적 구승을 기초로 일반적 역사지식을 끌어들인 것 같다. 이런 경우 억설(憶說)이 될 위험성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가령 송징이 완도로 들어왔다 떠난 시점을 연월일까지 밝힌 것은 일반 역사지식의 무리한 원용이 아닌가 본다. 문제는 송징의 활동이 과연 삼별초 투쟁에 연계되었던 가에 있다. 이 점에 대해 달리 확증을 댈 수 없지만 반증 또한 없다. 송대장군가송장군에서 송징이 분명히 바다를 건너 들어온 것으로 서술했다. 이런 등의 정황으로 미루어 단정은 못 하나 송대장군의 존재를 삼별초 투쟁에 연계지어 이해하는 편이 좋을 듯싶다.

 

 

 

 

인용

전문

해설

고증 1.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완주군읍지에 실린 내용

고증 2. 반체제 우두머리가 민중의 영웅으로

고증 3. 송대장군과 삼별초

고증 4. 민중영웅이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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