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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 - 고증 본문

한시놀이터/서사한시

송대장군가(宋大將軍歌) - 고증

건방진방랑자 2021. 8. 1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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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 1.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완주군읍지에 실린 내용

 

시인은 주인공 송대장군을 분명히 역사상의 실제로 믿어 의심치 않고 그 인물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기려는 뜻에서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지금 그 형상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무척 흥미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실의 측면에서 보면 여러가지 불분명하고 궁금하여 고증을 요하는 사항들이 있다. 이 작품은 시적 표현이라는 한계도 물론 없지 않으나 내용 성향이 원래 좀더 구체적이고도 선명하게 처리하기 곤란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송대장군의 실체를 해명하기 위해 문헌을 더듬고 현지답사를 나가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알아낸 약간의 사실을 정리해서 여기에 붙여둔다. 시인 임억령은 이 송대장군가를 장시로 쓰기에 앞서 송장군이란 제목의 율시를 지었다[徵也神奇無與敵, 投兵八海負危巖. 山厖自吠多方便, 野馬生騎去轡銜. 長箭射穿侯峴石, 旋風吹送濟州帆. 井蛙逋主其能久, 弦血無端濕戰衫. 석천집·송장군2].

 

그 첫 구에서 징은 신출기략이 더불어 맞설 자 없더라[徵也神奇無與敵]”라고 한 것을 보면, 송대장군의 이름은 징이다. 송징(宋徵), 이 사람은 언제 어디서 활동했던가?

 

일반 역사서에는 송징이란 성명 두 자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진현(康津縣) 고적조(古跡條)에서 하나의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사현(射峴), 완도(莞島)에 있다. 전하는 말에 옛날 섬사람에 송징이라는 자가 무용이 절륜하여 활을 쏘면 60리 밖까지 나갔다. 활시위가 끊어진즉 피가 흘렀다. 지금까지 반석에 화살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곳을 사현이라 한다.”

 

사현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전설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송징은 완도사람이다. 구한말에 편찬된 완도군읍지(규장각 소장)를 보면 완도의 역사적 고적으로 장보고(張保皐)와 정년(鄭年)을 거명하고 이어 송징을 내세운다

사현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전설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송징은 완도사람이다. 구한말에 편찬된 완도군읍지(규장각 소장)를 보면 완도의 역사적 고적으로 장보고(張保皐)와 정년(鄭年)을 거명하고 이어 송징을 내세운다[古蹟叚, 新羅時張保皐爲大使也. 島人鄭年起兵於此, 討滅金明之亂, 回復舊都, 繼爲大使, 而勇力絶人, 能沒水底, 一噎之間, 行五六十里. 高麗末, 有宋徵者, 居丁莞島壯才島. 射及六十里, 弓絃絶則出血. 能使神兵云云是齊. -전라남도 완도군읍지광무光武3(1899) 성책成冊, 규장각 소장]. 내용은 동국여지승람을 거의 그대로 전재한 것인데, 한두가지 첨가된 사항이 있다. , “고려말에 송징이란 자가 있었는데 장재도(壯才島)에 살았다라고 하여, 그의 생존시기 및 활동지점을 명시한 것이다.

송대장군 송징은 고려 말에 완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가 쏜 화살이 60리 밖의 바위에 박혔다는 동국여지승람소재 전설은 시에서 서술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옛 명장 중에 화살이 바위에 꽂혔다는 일화가 전하지만 우리의 송징은 화살이 무려 60리를 날아가서 박혔다는 것이다. 그의 절세의 무용은 활로 상징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이나 완도군읍지활시위가 끊어진즉 피가 흘렀다라는 말은 대체 무슨 영문인가? 송장군이라는 율시의 마지막 구에서는 시위에서 피 끝없이 군복을 적시도다[弦血無端濕戰衫]”라고 읊어, 끊어진 활시위에서 흘리던 피는 송징의 신상과 심상치 않은 관련이 있었던가 싶다. 그런데 활시위는 왜 끊어졌을까? 바로 이 상황을 송대장군가에서는 관군도 기가 질려 숨죽이는 판이니 누가 감히 덤비리오. / 누가 알았으랴! 하늘이 계집아이 손을 빌려 / 하룻밤새 활시위에서 피가 줄줄줄[王師䝱息安能討 那知天借女兒手 一夜絃血垂如縷 ]”하고 시의 흐름이 장사의 남긴 육신……으로 직결된다. 끊어진 활시위의 피는 곧바로 활의 임자 송징의 최후였다. 그리고 문제는 활시위는 계집아이 손에 의해 끊어진 것이다.

 

송대장군은 그 자신의 만고 절세의 무용을 상징한 활이 어떤 여자의 손에 의해 시위가 절단되자 그로 인해 그 자신도 드디어 무력하게 되어 죽음을 맞았던 모양이다. 이것이 한 영웅의 비극적 최후다. 하지만 그 여자는 누구이고, 어떤 음모가 거기에 개재되었으며, 활시위의 끊어짐과 그의 죽음 사이의 연계 등등 아직도 많은 부분이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마치 삼손의 최후처럼 무언가 신비롭고 재미난 이야기가 숨겨졌을 법하지만 실증적으로는 더이상 잡아내기 어려운 것 같다.

 

사진출처 - 목포시민신 

 

 

 

고증 2. 반체제 우두머리가 민중의 영웅으로

 

이 송징은 어떤 활동을 벌였기에 대장군이라는 칭호까지 들었던가? 대장군의 직함이 공적인 국가기구에 의해 수여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지방지 기록은 정작 여기에 미쳐서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 오직 송대장군가송장군의 시적 표현에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천길이나 깊은 바다 한밤중에 나는 듯 건너와 / 만첩 산중 외진 골짝에 몰래 진을 치고는[千尋巨海夜飛渡 萬疊窮谷聊爲負 ]”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무리를 거느리고 섬으로 들어와서 천험의 요새를 장악한 모양이다. 그리고 무서운 용력과 비상한 책략을 구사해서 조운선이나 기타 선박의 물화를 탈취했던 듯싶다. 그런 중에 들개나 말을 이용하는 모종의 술수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미적추(米賊酋)’로 일컬어졌던 모양이다.

 

요컨대 송징은 해도(海島)에 거점을 둔 반체제 무장세력의 우두머리였다. 관군의 기를 여지없이 꺾어놓을 정도로 저항적 역량이 대단했다. 또한 그런 활동이 민중의 염원에 부합하였기에, 이 영웅의 좌절은 민중의 통한으로 남아 그를 대장군으로 추모하였다고 본다. 때문에 시인은 이 영웅 형상을 도탄에 빠진 우리 백성 고통을 민망히 여겨 / 일부러 장군을 내려보내 한번 청소하도록 한 것이로다[閔見蒼生塗炭苦 故遣將軍欲一掃 ]”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시인은 송대장군이란 민중영웅의 형상에 이와 같이 큰 의미를 부여했으면서도 그 활동상을 좀더 자상히 서술하진 못하고 암시하는 데 그쳤다. 왕조국가 체제하에서 반역적 무장활동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기는 실로 중난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작품의 소재를 고로에게 물어물어 / 자초지종 자세히 알았구나[問之於古老 首尾得細剖]”라고 하였다. 송대장군은 임억령 당시에도 그 지방의 구비적 전설의 주인공이었다. ‘대장군은 민중 사이에서 부여된 칭호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전하는 이야기가 혹시 없을까? 그리고 시에서 송대장군은 민간신앙으로 받들어지는바 고루한 식자들에 의해 박해받던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점도 현지에 가서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고증 3. 송대장군과 삼별초

 

198710월에 나는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서 완도로 현지답사를 갔다. 당장 놀라운 점은 송대장군이 완도 지역에서는 마을의 당신(堂神)으로 두루 받들어지고 있는 사실이다. 서해 도서에서 임경업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송대장군의 화신인 왕대를 어떤 왜놈이 함부로 꺼내 깔고 앉았다가 그 자리서 즉사했다고, 일제하까지 그 영웅 형상의 위력이 발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송대장군이 누구냐 물으면 대개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었다. 그 지역의 향토사가인 박창제(朴昌濟) 옹을 소개받아 물어보게 되었다. 박옹은 송대장군에 관해 구전을 듣고 또 조사해서 가진 지식이 상당히 있는데 그 내용은 모두 완도군지(완도군지편찬위원회, 1977)내 고장 전통 가꾸기(박창제 편, 1981)라는 두 책자 속에 담아놓았다. 완도군지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완도는 청해진을 파한 후에 지역은 삼분되어 타군에 이속(移屬)되었고 주민들은 축출되어 사방에 흩어졌다가 세월의 흐름을 따라 하나둘씩 선조의 무덤을 찾아 완도의 구석구석에 모여들었다. 이때에 송징 장군은 완도를 점령한 삼별초의 중요 인물로서 연년이 계속된 흉년과 육지군()의 관리ㆍ토호들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주민들을 위무하고 근해를 왕래하는 세미선(稅米船)을 잡아 그 세미로 거민을 구호하니 거민들은 한천(旱天)에 감우(甘雨)를 만난 듯 구세주와 같이 존경하였다. 이때 원동(院洞)을 통과하려는 세미선이 지금의 남선리(南仙里) 앞바다를 지나간 것을 장좌리(長佐里) 장도(將島)에서 활을 쏘아 이를 막아 잡고 개머리를 지나 서해안으로 가려 하면 정도리(正道里) 송댓여[宋大將嶼]에서 활을 쏘아 이에 적중시켜 세미를 빼앗았다 한다.

송징은 원종 118월에 입도(入島)하였다가 익년 여름에 제주로 떠났으니 체류 불과 1년에 그쳤으나 완도 주민들은 송장군의 은덕을 잊지 않고 마을에 사우(祠宇)를 지어 향토신으로 섬기면서 지금까지도 음력설이나 대보름이면동중에서 가장 정결하고 살기 없는 집을 골라 제물을 장만케 하고 동민이 군고(軍鼓)를 울리며 제향하는 유풍이 남아 있다.

 

 

이 인용문에 송징의 일을 삼별초와 관련지은 것은 대단히 관심을 끈다. 위 서술 내용은 지역적 구승을 기초로 일반적 역사지식을 끌어들인 것 같다. 이런 경우 억설(憶說)이 될 위험성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가령 송징이 완도로 들어왔다 떠난 시점을 연월일까지 밝힌 것은 일반 역사지식의 무리한 원용이 아닌가 본다. 문제는 송징의 활동이 과연 삼별초 투쟁에 연계되었던 가에 있다. 이 점에 대해 달리 확증을 댈 수 없지만 반증 또한 없다. 송대장군가송장군에서 송징이 분명히 바다를 건너 들어온 것으로 서술했다. 이런 등의 정황으로 미루어 단정은 못 하나 송대장군의 존재를 삼별초 투쟁에 연계지어 이해하는 편이 좋을 듯싶다.

 

 

 

 

 

고증 4. 민중영웅이 사라지다

 

그런데 송대장군의 문학적 구비적 형상에는 삼별초 투쟁과 관련된 사실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지 않다. 선명하게 부각된 것은 민중 구제의 측면이다. 송대장군가에서도 그렇거니와, 지역적 구전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완도는 예로부터 해운의 요충이었던바 물길과 지명까지 낱낱이 들어가며 세미선(稅米船)을 모두 나포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실감이 난다. 곧 송징에게 미적추(米賊酋)’라는 별호가 붙게 된 연유인 것이다. 그리하여 반역향(叛逆鄕)이라는 역사적 특수성과 도서라는 지역적 조건 때문에 억압과 착취를 편중되게 받고 있던 섬사람들을 구제하였으니,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였다. 그를 송대장군으로 길이 추모하는 까닭이다.

 

구한말에 편찬된 완도군읍지에서 장재도(長財島)를 송징이 있던 곳으로 지적하였다. 장재도란 장좌리(長左里, 지금 완도읍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큰 마을)에 있는 장도(將島)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장도는 장좌리에서 물이 빠지면 걸어가고 물이 차면 배를 타고야 건너는 조그만 섬이다. 섬에는 인가는 없고 중앙에 동백ㆍ대숲으로 싸인 당집이 한채 보일 뿐이다. 바로 송대장군을 모신 장좌리의 당집이다.

 

이 장도는 그 지방 전설에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었던 자리라 한다. 그렇다면 옛 청해진 위치에 송징이 다시 요새를 구축했던 셈이다. 장도의 송대장군을 모신 당집은 실로 유서가 깊다.

 

박창제 옹은 내 고장 전통 가꾸기에서 장도 당집은 제단 중앙에는 송대장군, 왼쪽에는 정년, 오른쪽에는 혜일대사를 모셨는데라고 분명히 증언한 다음, “장보고 장군을 빼놓은 까닭은 확실한 이유를 말해 주는 이가 없다라고 의문을 덧붙였다. 박옹도 고개를 갸웃거렸듯 정년은 옆에 모시면서 더 유명한 장보고는 왜 소외시켰던지 미상불 이상하긴 하다. 그러나 어쨌건 그 지방 민중의 의식 속에는 송대장군이 가장 중심위치에 놓여 있었고 장보고에 대한 향념은 희미했던 것이 뚜렷한 사실이다. 아주 옛날부터 형성ㆍ계승된 의식이었다.

 

그런데 내가 장좌리에 들렀을 때 그 당집에 모신 존재는 송대장군이 아니고 유일하게 장보고였다. 근래 더러 매스컴에 비쳐지고 외부적 입김이 작용한 결과라 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일반 역사지식에서 장보고의 위상과 그 지역에 삶을 영위하던 민중의 의식 사이에는 괴리가 있는 것이다. 이 괴리현상을 일반성에 맞추는 쪽으로 해소한 셈이다. 그리하여 오래오래 견지해오던 한 민중영웅의 형상은 또 한번 훼철(毁撤) 당하고 말았다.

 

시인 임억령은 강진 고을에 우거해 있던 시기에 이 시를 썼다. 당시 완도는 해남과 강진 두 고을에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섬은 아전들의 밥이라는 말이 생겼듯 완도 지역은 특수하게 열악한 상태로 지배를 받았던 셈이다. 그러나 시인은 말하자면 지배하는 지역 출신의 관인 신분이었으면서도 오히려 피지배 지역의 빼어난 역사전통을 높이 인정한다. 이러한 시인의 의식이 바로 완도 지역의 민중영웅 송대장군을 발견한 것이리라.

-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2, 창비, 2020, 27~32

 

 

 

 

인용

전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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