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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몽구 - 168. 이광성계(李廣成蹊) 본문

고전/몽구

몽구 - 168. 이광성계(李廣成蹊)

건방진방랑자 2020. 10. 18.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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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으로 자신의 길을 만든 이광

이광성혜(李廣成蹊)

 

 

前漢. 李廣隴西成紀人, 世世受射法. 武帝時拜右北平太守, 匈奴號曰漢飛將軍避之, 數歲不入界.

出獵, 見草中石以爲虎而射之, 中石沒矢, 視之石也. 他日射終不能入.

經七郡太守, 前後四十餘年. 得賞賜, 輒分其戱下, 飮食與士卒共之, 寬緩不苛, 士樂爲用.

元狩中爲前將軍, 從大將軍衛靑擊匈奴, 惑失道. 欲上書報天子失軍曲折, 長史責, 之幕府上簿. 謂其麾下曰: “結髮與匈奴大小七十餘戰, 今又迷失道, 豈非天哉? 且廣年六十餘, 不能復對刀筆吏矣.” 遂引刀自京, 百姓聞之, 知與不知, 老莊皆爲垂泣.

贊曰: “李將軍恂恂如鄙人, 口不能出辭. 及死之日, 天下知與不知, 皆爲流涕. 彼其中心, 誠信於士大夫也.”

諺曰: “桃李不言, 下自成蹊.” 此言雖小, 可以喩大.

 

 

 

 

해석

前漢.

전한서에 실린 이야기다.

 

李廣隴西成紀人, 世世受射法.

이광은 농서군(隴西郡) 성기현(成紀縣) 사람으로 대대로 활쏘는 법을 전수받았다.

 

武帝時拜右北平太守, 匈奴號曰漢飛將軍避之, 數歲不入界.

무제때 우북평 태수로 제배되었는데 흉노들은 한나라 날쌘 장군[漢飛將軍]’이라 부르며 그를 피했고 몇 년동안 국경에 들어오지 않았다.

 

出獵, 見草中石以爲虎而射之, 中石沒矢, 視之石也.

이광이 사냥을 나갔는데 풀숲의 바위를 보고 호랑이라 여기고서 그걸 쐈는데 바위에 적중하고 화살이 박혔으며 그걸 보니 바위였다.

 

他日射終不能入.

다른 날에 활을 쏴봤지만 마침내 박히질 않았다.

 

經七郡太守, 前後四十餘年.

이광은 칠군태수를 거쳐 전후의 40여년간이었다.

 

得賞賜, 輒分其戱下, 飮食與士卒共之, 寬緩不苛, 士樂爲用.

상을 받으면 대번에 대장기 아래의 부하들에게 나눠줬고 음식을 사졸과 공유하며 너그럽게 하되 가혹히 하지 않으니 병사들이 기꺼이 등용이 되려 했다.

 

元狩中爲前將軍, 從大將軍衛靑擊匈奴, 惑失道.

원수(元狩)원수(元狩): 한무제 때의 연호 때에 선봉장이 되어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를 쳐부수는데 헷갈려 길을 잃어 패배했다.

 

欲上書報天子失軍曲折, 長史責, 之幕府上簿.

위청이 글을 올려 천자께 군대를 잃은 곡절을 보고 하니 군대 감사관인 장사(長史)가 이광을 질책했고 군막으로 가서 시말서를 올리라 했다.

 

謂其麾下曰:

이광이 휘하 장병들에게 말했다.

 

結髮與匈奴大小七十餘戰, 今又迷失道, 豈非天哉?

저는 성례식을 하고 흉노와 크고 작게 일흔 여번을 싸웠는데 이제 또한 헷갈려 길을 잃었으니 아마도 천운(天運)이 아닌 것입니다.

 

且廣年六十餘, 不能復對刀筆吏矣.”

또한 제 나이 예순 살쯤인데 다시 붓만 휘두르는 관리[刀筆吏]를 대할 수는 없습니다.”

 

遂引刀自京, 百姓聞之, 知與不知, 老莊皆爲垂泣.

마침내 칼을 가져다가 스스로 목 베었으니[] 백성들이 듣고 알건 모르건 간에 늙건 젊건 간에 모두 눈물을 흘렸다.

 

贊曰: “李將軍恂恂如鄙人, 口不能出辭.

한서에서 찬했다. “이장군은 신실하기가 촌사람 같아서 입으로 말을 함부로 내지 않았다.

 

及死之日, 天下知與不知, 皆爲流涕.

죽고 나서 천하의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彼其中心, 誠信於士大夫也.”

그 속 마음이 진실로 사대부보다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이다.”

 

諺曰: “桃李不言, 下自成蹊.” 此言雖小, 可以喩大.

속담에 복숭아와 자두는 말을 못하지만 열매 때문에 사람들이 오고가느라 아래는 스스로 길이 만들어진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비록 소소한 이야기더라도 큰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해설

상식으로 보자면 취하기에 부족해 보이는 인물이지만 보는 방향을 바꾸어 보면 가치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진평다철(陳平多轍)이광성계(李廣成蹊)는 그러한 인물 두 사람을 들었다.

 

가난한데도 생계에 신경 쓰지 않는 진평(?~기원전 178)을 사람이 많이 찾아 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크게 성공할 것이라며 손녀 딸을 시집보낸 장부는 사람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다. 옛말에 항상 천리마는 있었으나 천리마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진평의 집 앞에 수레바퀴 자국이 깊이 파였다는 것은 누구나 보지만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의 미래를 살펴 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번째 이야기의 이광은 불행한 남자였다. 장군으로서의 자질을 타고나 부하들의 신뢰를 얻었지만, 제후가 발탁할 정도의 공적은 세우지 못했다.

 

기원전 119년 황후인 위후의 동생 위청과 그의 사위 표기장군 곽거병이 흉노를 토벌하는 대군을 일으켰을 때 이광은 스스로 지원해서 위청의 선봉장으로 출전한다.

 

위청은 동쪽 길을 통해서 본대와 합류하도록 이광에게 명령했지만 길을 잃어 약속한 날짜에 맞추지 못했다. 그가 지은 죄는 평민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늙은 이광은 자신의 불운을 개탄하고 치욕보다는 자살을 택했다.

 

마지막 부분은 사마천사기』 「이장군열전에 있는 말을 그대로 적고 있다. 이광의 불운함을 천하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뒤따른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광의 불운은 손자 이름에게까지 이어진다. 이 책의 표제 중에 이릉초시부분을 참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름은 무제가 총애하는 이부인의 오빠인 이광리가 출동할 때 별동대 오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출전했는데 흉노의 정예 기병대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그의 일족이 모두 처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변호한 사마천도 남성의 상징을 잘라 버리는 형벌인 궁형(宮刑)에 처해졌다. 이광의 집안에 붙어 다닌 불운의 그림자에 사마천도 연루되었던 것이다.

 

복숭아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긴다[桃李不言, 下自成蹊]’라는 비유에는 시대의 불행을 후세에 이름을 남겨 갚고자 한 사마천 자신의 감상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 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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