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흉노 정벌의 도미노(둔전제, 균수법, 한4군)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흉노 정벌의 도미노(둔전제, 균수법, 한4군)

건방진방랑자 2021. 6. 4. 16:49
728x90
반응형

 흉노 정벌의 도미노

 

한 무제는 내치에서 뒤늦게 국가 기틀을 만드느라 애썼지만, 정작 그의 야심은 바깥에 있었다. 바깥이 안정되지 않으면 안이 튼튼할 수 없고, 바깥을 안정시키려면 정복과 복속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대내적으로 분주한 상황에서도 대외 정복 사업을 서둘렀다.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건국 이후 한을 괴롭혀온 흉노와의 대결이다. 무제는 고조 때부터 이어오던 화친 정책을 버리고 강공으로 나아갔다. 그것도 단순히 방어에 치중하는 게 아니라 멀리 고비 사막을 넘어 흉노의 근거지인 몽골 초원까지 공략하는 것이다. 정복을 지휘한 인물은 위청(衛靑)과 그의 조카인 곽거병(霍去病)이었다.

 

흉노 정벌의 부산물로 무제는 바라던 것 이상의 큰 소득을 얻었다. 바로 서역 원정이었다. 그때까지 무제는 서역이라는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흉노의 포로들에게서 서역을 알게 된 무제는 장건(張騫)에게 군사를 주어 서역으로 파견했다. 장건(張騫)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대월지(大月氏, 고대국가 박트리아)까지 가서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과 페르시아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장건이 개척한 동서 교통로는 이후 당 시대에 비단길(실크로드)이라는 중요한 무역로로 쓰이게 된다【】중국의 입장에서 개척된 것일 뿐 원래 비단길은 수천 년 전부터 현지 상인들이 이용하던 교역로였다. 그런데 당의 비단이 유럽 세계에 많이 수출되어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원래 흉노 정벌을 목적으로 시작된 무제의 팽창정책은 무제 자신까지 포함해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가히 유라시아 전역이 연관된 변화였다. 중국 북방에서 밀려난 흉노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도미노 현상처럼 거대한 민족 대이동이 빚어진 것이다. 우선 흉노가 중앙아시아로 이동하는 바람에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대월지의 부족들이 남쪽으로 밀려나 인도에서 쿠샨 왕조를 열었다. 또한 서쪽으로 진출을 계속한 흉노의 한 갈래는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북부를 거쳐 중부 유럽까지 갔다. 당시 문명의 오지였던 중부 유럽의 게르만족은 그들을 훈족(Hun)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5세기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는 초기 유럽의 민담 속에 무시무시한 전설의 마왕으로 전해졌다).

 

흉노의 압박으로 게르만족은 서양 고대사에 일대 풍파를 가져온 민족대이동을 일으킨다. 4세기부터 이탈리아 북부의 게르만족은 로마 국경을 자주 넘었고, 결국 476년에는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가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또한 게르만족의 다른 일파인 루마니아의 고트족은 동유럽의 끝에서 서유럽의 끝으로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해 서고트 왕국을 건설했으며, 독일의 반달족은 에스파냐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넘어갔다. 중부 유럽에 눌러앉은 흉노의 일파인 마자르는 수백 년 뒤 헝가리를 건설하게 된다(Hungary의 어원은 바로 흉노의 Hun이다). 결국 한 무제의 흉노 정벌은 중국의 역사만이 아니라 유라시아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셈이다.

 

 

물론 당시 한 무제는 자신이 한 일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저 난적인 흉노를 물리쳤다는 게 중요했다. 그 뒤에도 무제는 팽창정책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는 월남을 복속시키고 동북 방면에서는 한반도를 공략했다. 당시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이 터를 잡고 있었다. 한에 대해 강경책으로 대응한 위만조선의 우거왕(右渠王)은 적을 맞아 한껏 저항했지만 흉노마저 제압한 한의 군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위만조선은 한에 의해 멸망하고 그 지역에는 네 개의 군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진번(眞蕃)ㆍ현도(玄菟)4(漢四郡)이다4군은 군이라는 이름만 보면 중국 내의 군현과 똑같았지만, 중국 본토가 아닌 주변 지역의 군현은 사실상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 4군 가운데 세 곳은 얼마 안 가 랴오둥 지역으로 물러났고, 낙랑군만이 남아 있다가 313년 고구려가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면서 멸망했다. 그때는 이미 본체인 한이 멸망하고 100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인데, 4군이 사실상 독립국의 위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이곳만이 아니라 당시 무제는 변방 지역을 군사적으로 복속시키고 군을 설치한 다음 군대를 철수하는 전략을 즐겨 구사했다(4군 이외에도 월남 지역에는 9, 남서 지역에는 6, 북서 지역에는 4군이 설치되었다).

 

점령지를 군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만들고 물러나는 전략은 둔전제(屯田制)라는 중요한 제도를 낳았다. 둔전은 말 그대로 군대가 주둔한 곳의 토지를 가리키는데, 처음에는 북서 방면의 변방을 수비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였다.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점령지의 경우에는 보급 문제가 있기 때문에 병사들이 오래 주둔하기 어렵다. 그래서 무제는 병사들과 함께 농민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국경을 방어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과 군량을 자체 조달하도록 했다. 둔전의 생산물은 전량 군수물자로만 사용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둔전제는 이후 역대 왕조에서 변방을 수비하는 기본 방침으로 자리 잡는다(중국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고려와 조선에서도 둔전을 기본적인 국경 방어 체제로 이용했다)사실 둔전제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도시 국가 체제에서 영토 국가 체제로 발전한 데 따르는 필연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도시국가는 각 성곽을 중심으로 영토를 거느리는 점() 개념국가인 데 비해, 영토 국가는 선() 개념의 국가다. 그래서 도시 거점보다 성과 성, 도시와 도시를 잇는 영토의 개념이 중요해졌다.

 

무제의 대외 정복 사업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주변국들을 복속시켜 안정을 꾀했고, 동아시아는 물론 멀리 서역에까지 제국의 위명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것은 돈이 많이 드는 게임이었다. 정복에는 막대한 군비가 지출되었다. 군대가 한 번 원정을 떠났다 하면 몇 달씩 걸리는 데다 부대 편성도 대규모였다. 이에 비하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열국이 벌인 전쟁은 소꿉장난에 불과했다. 정복 전쟁이 오래 지속되자 국가 재정은 금세 바닥나버렸다.

 

어떻게든 재원을 마련해야 했던 무제는 새로운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재원이 부족하다고 해서 농민들에게서 지나치게 많이 거두어들이면 자칫 농업 사회의 근본이 뒤흔들릴 수도 있을뿐더러, 사실 농민들이 가진 것이라고 해봐야 뻔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전국시대부터 상당한 부를 쌓은 상인 계층에게서 갹출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여기서 무제는 묘안을 생각해낸다. 상인들이 돈을 버는 품목은 바로 소금과 철이다. 그래서 무제는 소금과 철의 민간 유통을 금지하고 국가에서 전매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물론 소금과 철의 유통으로 부유해진 상인들에게서 이익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둘 수도 있었지만, 국가가 독점한다면 그 수익은 세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제는 국가 권력을 이용해서 물류를 도맡았다. 우선 균수법(均輸法)을 시행해 상인들 대신 정부가 직접 물품의 구입과 운송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전쟁을 위한 군수물자를 위주로 했는데, 이 정도라면 오늘날의 조달청 업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일반 물품까지 취급했다. 이 때문에 물자 보급이 원활치 못해 물가가 상승하자 이번에는 물가 안정을 위해 평준법(平準法)을 시행했다. 외견상으로 이 조치들은 국가가 상인의 이익을 빼앗은 것에 해당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정치와 행정에 이어 경제마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흉노의 병사들 후대에 한족 중심의 역사가 주로 전해진 탓에 북방의 이민족들은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거치는 동안 그들도 꾸준히 발전했다. 한대 초기만 해도 북방의 흉노는 한의 조공을 받을 정도로 강성했다. 그러나 한 무제의 공략으로 흉노는 중국에서 힘을 잃고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 민족대이동은 유라시아 전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죽 쒸서 개 준 통일

촌놈이 세운 대제국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흉노 정벌의 도미노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외척과 환괸의 악순환

또 다시 분열의 시대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