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인데도 고관대작의 수레바퀴 자국이 많던 진평네
진평다철(陳平多轍)
『前漢』. 陳平陽武戶牖人. 少家貧, 好讀書, 治黃老術, 爲人長大色. 及長可取婦, 富人莫與者, 貧者平亦愧之. 久之, 富人張負有女孫, 五嫁夫輒死, 人莫敢取, 平欲得之. 負偉平, 隨至其家, 迺負郭窮巷, 以席爲門, 然門外多長者車轍. 負歸謂其子仲曰: “吾欲以女孫予陳平.” 仲曰: “平貧不事事, 一縣中盡笑其所爲, 奈何予之女?” 負曰: “固有美如陳平長貧者乎?” 卒與女. 予酒肉資以內婦, 戒其孫曰: “毋以貧故事人不謹.”
里中社, 平爲宰, 分肉甚均, 父老善之. 平曰: “使平得宰天下, 亦如此肉矣.”
從高祖爲護軍中尉, 盡護諸將. 出黃金四百萬斤予平, 恣所爲不問出入. 平多以金縱反間於楚軍, 自初從至天下定, 凡六出奇計. 定封曲逆侯, 惠帝時爲左丞相, 呂后時爲右丞相, 又相文帝, 乃薨.
해석
『前漢』.
『전한서』에 실린 이야기다.
陳平陽武戶牖人.
진평은 양무군(陽武郡) 호창현(戶牖縣) 사람이다.
少家貧, 好讀書, 治黃老術, 爲人長大色.
소싯적에 집은 가난했지만 독서하길 좋아해 도가인 황노술을 연마했고 사람됨이 키가 크고 얼굴색이 훤칠했다.
及長可取婦, 富人莫與者, 貧者平亦愧之.
장성하여 아내를 맞아들일 때가 되었지만 부잣집은 딸을 주는 사람이 없었고 가난한 집은 진평이 또한 그 집을 부끄러워했다.
久之, 富人張負有女孫, 五嫁夫輒死, 人莫敢取, 平欲得之.
얼마 되어 부잣집 장부의 손녀 중 다섯 번 시집 갔지만 남편이 갑작스레 죽어 사람이 감히 데려가지 않으니 진평은 그녀를 맞아들이려 했다.
負偉平, 隨至其家, 迺負郭窮巷, 以席爲門, 然門外多長者車轍.
장부는 진평을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해서 그의 집에 따라 가니 성벽 아래 마을에 멍석으로 문을 만들었지만 문 밖엔 높은 사람들의 수레바퀴 자국이 많았다.
負歸謂其子仲曰: “吾欲以女孫予陳平.”
장부가 돌아와 아들 장중에게 “나는 손녀를 진평에게 보내려 한다.”라고 말했다.
仲曰: “平貧不事事, 一縣中盡笑其所爲, 奈何予之女?”
장중이 “진평이 가난한데도 일을 일삼지 않아 현에서도 그가 하는 것을 모두 비웃는데 어째서 딸을 보내려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負曰: “固有美如陳平長貧者乎?” 卒與女.
장부가 “아마도 미쁘기가 진평 같음에도 오래도록 가난한 이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고서 마침내 딸을 보냈다.
予酒肉資以內婦, 戒其孫曰: “毋以貧故事人不謹.”
술과 고기를 주어 아내를 맞아들일 적에 손녀에게 “가난 때문에 사람 섬기길 삼가지 않아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里中社, 平爲宰, 分肉甚均, 父老善之.
마을에서 토지신께 제사지낼 때 진평을 재상으로 삼았고 고기를 나눠주는데 매우 고르게 하자 마을 어르신들이 그를 좋게 여겼다.
平曰: “使平得宰天下, 亦如此肉矣.”
진평이 “저로 천하를 다스리게 한다면 또한 이 고기 같게 할 텐데 말이죠.”라고 말했다.
從高祖爲護軍中尉, 盡護諸將.
훗날 한고조 유방을 따라 호군중위(護軍中尉)가 되어 여러 장수들을 모두 호위하였다.
出黃金四百萬斤予平, 恣所爲不問出入.
황금 사백만근 내어 진평에게 주었지만 하고 싶은 데로 멋대로 쓰게 하고선 출입은 묻지 않았다.
平多以金縱反間於楚軍, 自初從至天下定, 凡六出奇計.
진평은 많은 금으로 초나라 군대에 반간계【반간계(反間計): 적의 간첩을 거꾸로 이용하는 계책, 또는 계략을 써서 적을 이간질하는 계책】를 내었으니 처음부터 천하가 평정될 때까지 모두 여섯 번의 기이한 계책을 내었다.
定封曲逆侯, 惠帝時爲左丞相, 呂后時爲右丞相, 又相文帝, 乃薨.
평정되고선 곡역후(曲逆侯)에 봉해졌고 혜제 때엔 좌승상이 되었으며 여후 때엔 우승상이 되었고 또 문제 때엔 승상이 된 후 숨졌다.
해설
상식으로 보자면 취하기에 부족해 보이는 인물이지만 보는 방향을 바꾸어 보면 가치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진평다철(陳平多轍)」과 「이광성계(李廣成蹊)」는 그러한 인물 두 사람을 들었다.
가난한데도 생계에 신경 쓰지 않는 진평(?~기원전 178)을 사람이 많이 찾아 드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크게 성공할 것이라며 손녀 딸을 시집보낸 장부는 사람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다. 옛말에 항상 천리마는 있었으나 천리마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진평의 집 앞에 수레바퀴 자국이 깊이 파였다는 것은 누구나 보지만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의 미래를 살펴 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번째 이야기의 이광은 불행한 남자였다. 장군으로서의 자질을 타고나 부하들의 신뢰를 얻었지만, 제후가 발탁할 정도의 공적은 세우지 못했다.
기원전 119년 황후인 위후의 동생 위청과 그의 사위 표기장군 곽거병이 흉노를 토벌하는 대군을 일으켰을 때 이광은 스스로 지원해서 위청의 선봉장으로 출전한다.
위청은 동쪽 길을 통해서 본대와 합류하도록 이광에게 명령했지만 길을 잃어 약속한 날짜에 맞추지 못했다. 그가 지은 죄는 평민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늙은 이광은 자신의 불운을 개탄하고 치욕보다는 자살을 택했다.
마지막 부분은 사마천의 『사기』 「이장군열전」에 있는 말을 그대로 적고 있다. 이광의 불운함을 천하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뒤따른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광의 불운은 손자 이름에게까지 이어진다. 이 책의 표제 중에 ‘이릉초시’ 부분을 참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름은 무제가 총애하는 이부인의 오빠인 이광리가 출동할 때 별동대 오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출전했는데 흉노의 정예 기병대에 포위되어 항복했다. 그의 일족이 모두 처형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변호한 사마천도 남성의 상징을 잘라 버리는 형벌인 궁형(宮刑)에 처해졌다. 이광의 집안에 붙어 다닌 불운의 그림자에 사마천도 연루되었던 것이다.
‘복숭아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아래 저절로 길이 생긴다[桃李不言, 下自成蹊]’라는 비유에는 시대의 불행을 후세에 이름을 남겨 갚고자 한 사마천 자신의 감상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몽구』, 이한 지음, 유동환 옮김, 홍익출판사, 2008년, 50~52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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