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구멍이라도 숨고 싶던 순간
연기군은 정부청사 공사로 여기저기 파헤쳐져 있었다. 예전의 도시건설은 자연을 적게 훼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굽이치는 강이 있으면 강을 따라 굽도록, 언덕이 있으면 언덕을 따라 오르내리도록 길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구 전라선은 섬진강을 따라, 구 경춘선은 북한강을 따라 건설되어, 그만큼 이동시간은 길어지되 자연의 풍광을 만끽하며 갈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현대의 도시건설은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여 진행된다. 도로는 직선화되고, 언덕이 있으면 터널을 뚫어 최단거리가 되도록 한다. 바로 이곳도 그런 현대의 건설방식이 그대로 적용되었기에 온 토지를 모두 깎아내어 온갖 생명체의 비명이 가득한 곳이 되고 말았다. 난 그저 잠잘 곳을 찾아 스쳐 지나가는 데도 여러 생각이 들더라.
처음 허락받은 교회에 만족 못하다
어느덧 5시가 넘었기에 무작정 걸었다. 외곽을 빠져 나가야 그나마 멀쩡한 마을이 보일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 탓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 희미하게 마을이 보인다. 마을로 가려면 어쩔 수 없이 논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들판에서 부는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마을로 걸어간다. 거긴 연기군 남면으로 꽤 규모가 있는 마을로 보였다. 그래서 최대한 가까이 가보니 교회가 3군데나 있어서 한숨 놨다. 그중에 제일 작은 교회로 들어가서 목사님께 잘 수 있는지를 물어보니, 자도 된다고 하시더라. 이로써 오늘의 여행은 순식간에 잘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쉽사리 짐을 풀지 못했고 마을을 한 바퀴 다시 돌고 나서야 비로소 잘 수 있었다. 과연 어떤 일이 생겼던 걸까?
큰 길을 사이에 두고 마을이 갈라지는데 왼쪽 마을에 한 교회가, 오른쪽 마을에 두 교회가 있다. 이런 상황이니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두 교회 모두 왼쪽 교회에 비하면 규모가 있다. 두 교회 중에 아무래도 좀 더 작은 교회가 끌리더라. 아무래도 예전에 작은 교회를 다녀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사택에서 목사님께 허락을 맡으려 사정을 말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물으시더라.
목사님: 이불은 가지고 다니세요?
건빵: 아니요~ 배낭엔 옷과 책밖에 없어요
목사님: 저녁은 먹었어요?
건빵: 부랴부랴 오느라 먹지 못했어요
오늘은 아침을 먹은 이후로 줄곧 굶었다. 중장초 아이들이 준 간식으로 간단히 요기했을 뿐이다. 사택에 허락을 맡으러 갔을 때 목사님은 식사 중이었다. 그러니 같이 먹자고 하시는 건 아닐까 은근히 기대할 수밖에~ 배가 고프고 몸이 고달프니 염치ㆍ코치는 죽 쒀먹은 지 오래다.
하지만 그런 말씀을 하시긴 커녕 이곳엔 식당이 없다며 슈퍼마켓 위치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닌가? 기대를 했던 탓인지, 굶은 탓인지 실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목사님은 예배당에서 자라고 말씀하셨다.
예배당은 고풍스런 분위기였다. 예전에 지어진 건물답게 마룻바닥이 인상적이었고 오래된 나무 의자도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예배당에 짐을 풀고 여행기를 정리하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지도에 표시했고 순간순간 들었던 감상을 정리했다. 한참을 정리하고 있는데 목사님은 오시지 않더라.
교회 안은 썰렁했고 어둑침침했다. 그곳에 덩그러니 혼자 있으려니 불현듯 암담하다는 생각과 함께 쓸쓸함이 몰려오더라. 그 순간 ‘차라리 딴 교회에 갈 걸 그랬나?’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점차 커져가더라. 그러다 급기야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럴 땐 맘을 먹기보다 행동은 훨씬 빠른 느낌이다.
교회 문을 조심스레 열고 고양이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배신하는 것만 같은 찝찝함을 느끼면서, 혹 뒤에서 목사님이 ‘어디 가세요?’라고 부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면서 말이다.
두 번째 교회에선 불청객 취급을 당하다
곧바로 위쪽에 있는 교회에 갔다. 그 교회는 7시밖에 안 됐는데도 이미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 조용히 들어가 뒷좌석에 앉아 조용히 예배를 드렸다.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께 상황을 말했다. 거기엔 교회란 사람을 품어주는 곳이기 때문에 매몰차게 쫓아내진 않을 거란 생각이 있었기에 편하게 얘기했다.
그런데 언제나 상황은 변화무쌍하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목사님뿐 아니라 성도님까지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지역도 공사구간에 포함되기에 교회는 임시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거라며, 잘 곳이 없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난 골방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안 되겠냐고 사정을 해봤지만, 매우 완강했다.
헐!! 설마 했던 일이 이렇게 진짜로 일어날 줄이야. ‘설마 교회에서 사람을 내치기야 하겠어’라고 안도했었는데, 보란 듯이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어떤 분은 “근처에 한 시간 정도 더 걸어가면 다른 교회도 있어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더라. 이미 8시가 넘었는데 그러면 이 어둠을 뚫고 다시 1시간을 가야 한다는 말인데, 어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실 줄이야. 그 분은 그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얻은’ 셈이다.
어찌나 기분이 상하던지 ‘썩소’를 머금고 교회를 나왔다. 그런 상황을 겪고 보니 그제야 처음에 허락해준 목사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겠더라.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이다.
살기 위해 안면몰수하고 첫 번째 교회로 다시 가다
과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두 가지 선택 사항이 있었다. 1시간 더 걸어 다른 교회에 가는 것과 안면몰수하고 아까 그 교회로 가는 것이다. 새로운 교회를 찾아가도 상황이 좋을 것이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창피함을 무릅쓰고 아까 그 교회로 갔다. 내 얼굴에 철판 두께가 얼마나 두꺼운지 처음 알게 된 순간이다^^ 나도 살아야 하니 이리도 뻔뻔해진다.
양화 감리 교회도 예배를 드리고 있더라. 설교 중에 예배당에 들어가니,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신다. 그때는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야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예배가 다 끝나고 광고 시간에 내가 머물게 되었단 얘길 하시더라. 그러면서 “어디 갔다 왔어요?”라고 물으신다.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재빨리 머리를 굴려 “식당이 있나 찾으러 한참을 가다가 없어서 슈퍼에서 빵을 사 먹고 왔어요.”라고 거짓말을 했다. 정직하게 말하기엔 너무도 쪽이 팔렸고,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나고 성도님들이 다 떠난 후에 목사님과 여행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교사가 되는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과 세상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걸어서 여행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목사님도 흥미진진하게 들으셨고 내일 가야 할 길을 지도를 보며 설명도 해주시기까지 했다.
금방 전엔 교회에서 거부를 당하며 암담함을 느꼈었는데 지금은 안락함을 느끼고 있다. 내가 자초한 환경 변화지만 그 덕에 목사님의 호의도, 예배당의 고적함도 새롭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나름 괜찮은 경험이라고 할 만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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