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사람이 되라
어제 잠을 자기 전에 목사님이 새벽 기도에는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없었다면 함열성결교회에서 머물 때 정한 철칙처럼 새벽기도에 나가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누우니, 정말 맘껏 자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더라. 그만큼 여태껏 교회에서 잘 때마다 새벽기도에 대한 부담이 있었다는 얘기일 거다.
새벽기도에 나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눈이 새벽 4시 45분에 떠진 것이다. 이럴 땐 한 번 잤다하면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자는 사람이 부럽기만 하다. 나는 아무리 피곤할 때에도 8시 이후까지는 자본 적이 없으며, 맘껏 자야겠다고 맘 먹었을 때에도 10시간 이상을 잘 순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눈이 떠진 이상 쉬이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한 햄릿처럼 ‘기도회에 나가느냐 마느냐’를 진지하게 고민 때리기 시작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에겐 매우 실존적인 문제이며, 일생일대를 결정지을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예 안 나갈 생각이면 지금부터라도 자면 되지만, 그렇지 않고 결정을 유보할 경우라면 잠도 못 자고 기도회에 나가지 못했다는 찝찝한 마음까지 들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오히려 다른 걱정이 들었다. ‘막상 기도회에 나가지 않았는데 아침에 목사님과 사모님을 뵈면 얼마나 어색할까?’하는 생각이 번쩍 든 것이다. 그건 누가 뭐라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느끼는 죄스러운 마음이란 걸 알기에 결국엔 나가기로 결심했다. 막상 마음을 정하고 나니 한결 가벼워지고 편해지더라.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방문을 열고나갔다. 거실은 어두웠는데 현관문을 열려고 할 때, ‘투덜이 사모님(어제 저녁에 함께 얘기하며 나름 편안하다고 느꼈기에 애칭으로 붙여준 거다^^)’이 안방에서 나오시는 게 아닌가. 서로 자다 깬 모습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새벽기도는 잘 마치고 왔다. 막상 방에 들어왔지만 언제까지 더 잘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목사님의 생활패턴에 맞춰 나도 움직여야 한다. 일찍 출발하겠다고 부산을 떨거나, 한숨 늘어지게 자고 나서 간다고 하면 이분들은 그만큼 나를 신경 써야만 하고, 그만큼 생활리듬이 깨지기 때문이다(8시까지 다들 주무시더라. 그럴 줄 알았으면 나도 2시간 푹 잘 걸 그랬다). 조금의 기척이라도 나면 재빨리 챙겨야겠다고 생각하며 누워있으니 자는 둥 마는 둥 해야 했다.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에서 ‘서로 부대끼며 어우러짐’으로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오늘은 5시간만 잔 것이다. 민가에서 잘 때의 안 좋은 점이 바로 이거다. 나의 리듬에 따라 여행 스케쥴을 조절할 수 없으니 말이다. 몸이 피곤하다고 해서 나만 바로 잘 수도 없고, 사람을 만나러 온 것이기에 여행기 정리하는 게 급하다 해서 방에 처박혀 있어서도 안 된다. 그렇게 주어진 귀중한 시간을 어찌 그토록 무의미하게 보낼 수가 있을까? 그래서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더 나누려 하며, 그분들의 생활 속으로 끼어 들어가려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여관이 아닌 민가나 교회에서 자는 의미가 더욱 커지니 말이다.
이게 ‘민폐’라고 혀를 차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확실히 신세를 지는 건 맞지만, ‘폐’라고까진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은 서로 알게 모르게 돕고 도움 받으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치대며 살아가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어쩌면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그 마음속엔 하잘 것 없는 무언가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연약함이 있기 때문이리라. 자존심에 상처를 쉽게 입는 사람은 내면의 힘이 약한 사람이다. 그러니 상처받지 않도록 나의 것만을 지키려 노력하게 되며, 그러면 그럴수록 남과는 어우러질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스스로 강해지고 어우러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틀이 깨질지라도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닫히지 않고 열리게 되며, 고여 썩지 않고 풍요롭게 된다.
‘방콕’과 ‘여행’의 차이
이렇게 민가에서도 자보고 교회에서도 자보니 거부당할 걸 걱정하면서 주저할 필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절당할지라도 한 번 정도 얘기해 보는 거다. 그래야 후회가 없다. 허락받는다면 같이 부대끼며 생활하고 타지방의 모습도 볼 수 있고, 나의 모습도 면밀히 체크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이런 적극적인 마음이 없으면 여행의 의미는 반감된다. 어떤 상황이든 적극적으로 임하려는 마음에 희망이 있다.
여행을 떠났다고 여행을 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집에 머문다고 방콕이라 할 수 없다. 집에 머물면서도 여행을 할 수 있으며, 여행을 떠나서도 방콕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행이란 이질적인 외부와 부딪히며 강고하게 쌓아온 자의식을 허무는 것이다. 그러니 여행을 떠나면 내가 어떤 문화적 문법에, 어떤 관념에 갇혀 살았는지를 알게 되며 그것이 만고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니 여행을 갔다 와선 관점이 바뀌며, 삶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앉아서 유목하기’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말들이 가능한 것이다. 몸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이질적인 것을 맘껏 받아들이고 공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떠난 자의 모습이며, 여행하는 자의 모습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녀 여권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방콕한 것과 같은 경우도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과 떠난 후에 동일한 생각과 동일한 모습이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흔히 외국에 떠나보면 도리어 ‘애국자’가 되어 돌아온다고 한다. 막상 해외에 나가서 보니 한국이 얼마나 질서정연한지, 아름다운지 보이며 한국적인 것들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란다. 이것이야말로 방콕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떠났지만 떠나지 못했고, 이질적인 것과 만났지만 오히려 기존의 관념으로 그런 것들을 모두 쳐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돌아다니며 방콕하기’가 되는 것뿐이고 그건 머문 자의 모습일 뿐이다.
지금 나의 여행이 ‘여행’이 되느냐, ‘방콕’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내가 어떻게 이 여행을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지금은 누군가의 도움을 이렇듯 무작정 받으며 여행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도울 것이다. 나 혼자 잘났기에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개개인은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게 하나로 뭉치면 시계의 초침과 분침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내가 과연 어떤 톱니바퀴가 되고 싶은지는 지금부터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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