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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2011년 사람여행 - 69. 사람여행 중에 닥친 최대의 위기 본문

연재/여행 속에 답이 있다

2011년 사람여행 - 69. 사람여행 중에 닥친 최대의 위기

건방진방랑자 2021. 2. 17.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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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여행 중에 닥친 최대의 위기

 

 

징그럽게 온갖 잠금장치들이 달려 있는 문을 보고 기가 막혔다. 하지만 어쩔 텐가? 이 교회도 이 교회만의 사정이 있는 것이고 나는 어떻게든 잘 곳을 구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이곳엔 교회가 두 군데 있지 않은가. 아직 실망하기엔 많이 이르다. 그래서 실망할 겨를도 없이 다른 교회로 가니 아까 전의 교회에 비하면 작지만 오히려 이 마을의 분위기엔 잘 어울리는 듯했다.

 

 

▲ 어둠이 서서히 깔리면, 그 때부터 새로운 걱정이 눈을 든다. 걷는 건 좋은데, 머물 것이 늘 걱정거리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실컷 비웃어 주리라

 

교회문도 열려 있다. 사택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문을 열고 사모님으로 추정되는 젊은 분이 나오신다. 정중하게 인사드리고 목사님 좀 뵐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런 경우 반응은 두 가지다. 사모의 권위가 세거나 자신이 나서도 된다고 생각하면 자신에게 직접 말하라고 하는 경우와 목사님을 찾아온 사람이기에 목사님을 바로 소개시켜주는 경우다. 사모님으로 추정되는 분은 전자에 속하는 분이었다. 자신에게 직접 말해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미 나의 행색을 보고 도움을 청할 거라고 짐작했을 테니, 자신에게 말하라는 건 자신이 직접 악역을 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역시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사람 좋은 표정으로 지금껏 자게 해줬는데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부턴 안 쟤워주기로 했습니다.”라고 짧고 간명하게 말하신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는데, 솔직히 난 침을 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은 파김치가 됐고 여기서 거부당하면 갈 곳도 없는 극한의 상황인데, 짐짓 착한 척하는 그 모습이 가증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심리적 마비 증상일 뿐이다. 그분은 이제부턴에 방점을 찍으며 이야기하셨지만 난 안 쟤워 주기로 했습니다에 방점을 찍고 들었다. 과연 정말 쟤워주긴 했는지, 어떤 불편함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의 밝은 미소로 잘라 말하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졌을 뿐이다. 경북 청도 동산교회의 이승란 사모님이 이런 얘길 해주셨다. “성심껏 돕는 분들은 자식을 키워 본 경험이 있기에, 꼭 자기 자식 같아서 그렇게 한 걸 거예요.”라고 말이다. 그땐 그러려니 했는데, 오늘 상황을 겪어보니, 무슨 이야긴 줄 알겠더라.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실 분이 아니었기에 돌아서야 했다. 그런데 내 뒤에서 미안해요라고 말하면서 밝은 표정으로 서 계신다. 말과 행동의 부조화에 참담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의례적인 제스처인가. 아예 그런 얘길 하지 말던지, 할 거면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하던지. 이건 뭐 귀찮은 일 처리해서 좋다라는 말이 미안하다라는 말로 잘못 나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억하심정이 들더라.

물론 언제든 이런 식으로 거부당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잘 수 있었던 건 정말 운이 좋은 경우라 할 수 있고, 이곳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감정이 상한 이유는 오늘 하루 무리하며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고, 교회가 무려 두 곳이나 있음에도 잠자리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다.

 

 

▲ 수산면으로 들어설 때의 사진. 꽤나 지쳐 보인다.

 

 

 

모든 방법이 막히다

 

경찰서에도 찾아갔지만 자기가 이곳에 발령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난색을 표하시더라. 마을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출입문엔 관리자의 번호가 적혀있다. 곧바로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몇 명이나 왔냐?”고 물으신다. 뭔가 긍정적인 신호려니 했다. 그래서 혼자 왔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때부터 상황은 급반전되어 마을회관이 너무 넓어 내주기가 곤란하다느니, 멀리 나와 있어 힘들겠다느니 말씀하시더라.

믿었던 곳에서 모두 다 거절당하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하나 앞이 깜깜해지더라. 수산면은 내가 지금껏 잠자리를 얻기 위해 해왔던 방법이 하나도 통하지 않던 곳이었다. 참담하고 씁쓸했다. 컨디션도 최악이고 오늘 무리하며 걸어선지 몸도 파김치가 되었다. 산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서있으니, 내가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궁지에 몰렸을 땐, 내빼선 안 된다. 어떻게든 마을 사람들과 부딪히며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다 극한의 상황에 몰린다면 노숙이라도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런 원칙은 국토종단 때 공주시 경천리에서의 경험을 통해 세우게 되었다.

사람과 이야기하는 중에 방법을 찾아야 했기에 중국집에 갔다. 볶음밥을 먹으며 주인아저씨에게 어디 잘 곳이 없느냐고 운을 띄웠다. 잘 되면 여기서 자라고 할 수도 있고, 안 되더라도 잘 곳을 알려주시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여긴 잘 곳이 없어요.”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고 다른 얘기는 일절 없으시더라.

대화가 차단당하고 가능성도 꽉꽉 막혀 있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이러다 정말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워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컨디션이 최악인데, 그럴 경우엔 내일은 힘이 나지 않아 여행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칙은 어떠한 상황이건 현장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그 순간 그게 뭔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는 것도 있지 않던가. 그래서 제천 시내로 나가기로 맘먹었다. 다행히도 조금 기다리니, 제천으로 가는 버스가 왔고 난 거기에 몸을 실었다. 몸도 맘도 다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힘도 없고 기운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다. 제천에 도착하자마자 찜질방에 갔고 쥐죽은 듯 잠만 잤다. 몸이 피곤하니 모든 게 다 귀찮다. 잘 자라!

 

 

▲ 이 정도 마을 규모인 곳에서 잠자리를 구하질 못할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다.

 

 

 

지출내역

 

내용

금액

볶음밥

5.000

시내버스비

2.000

찜질방

8.000

일일 총합

15.000

총 지출

134.400

 

 

인용

목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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